Burgos에서 Hornillos del Camino로 가다

2024. 9. 2. 12:19꿈속의까미노순례길

Burgos(부르고스)에서 Hornillos del Camino(오르니요스 델 까미노)까지 26.1km 희에대한 묵상

 

고통없는 영광은 없다 ( There is no glory without pain)

Burgos Burgos

My love Burgos !

 

깊은 잠에서 깨아난 상쾌한 아침

어제의 악몽이 파노라마처럼 내눈앞에 펼쳐지고

네가 죽음의 불구덩이속에 있다할지라도

온전하게 머리카락 한올도 다치지 않게 하겠노라고

약속하셨던 지난날의

어느 한순간의 그분의 음성이 떠오르면서

가슴이 따듯해지고

기쁨과 감사의 눈물이 가득차 오른다

절대로 빠벼나갈 통로가 없는

저멀리 달빛아래 나를 향해 둔탁한 발걸음을 옮겨 놓는 거대한 짐승

사자와 생사의 한판승부를 벌려야하는

절망앞에서

옮겨놓는 발걸음 마다

죽음의 공포로 아득했던

어제의 그절박했던 순간들이 가슴절절하게 생생하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밤길에

휘황한 불빛을 빛추며 나타난 자동차

갈곳없는 나를 2km의 전방의 알베르게까지

태워주었던

선한 눈동자의 주름진 얼굴의 스페인 남성은

하늘이 보내주신

내 생명의 은인으로 각인되며

그감사함을 무엇으로 표현할까...

창밖으로 보이는 유난히 파란 하늘과

푸른 들판의 풍경이

한장의 수채화 처럼 눈앞에 아름답다

그랬다

아침 6시에 맞춰진 알람시계의 가느다란 울림을

감지못하고 달콤한 꿈속을 헤메이다가

남들보다 늦은 아침 기상을 맞이하고 있는것이다

 

나는 다급한 동작으로 침낭을 챙기면서

떠날 준비에 생각을 차단시켰다

 

어제의 예기치 못했던 잠잘곳이 없는 돌발상황이 빚어낸 비극으로 인하여

나도 모르게 스페인의 까스티야레온 지방의 부르고스 주도에 깊숙이 잠입하게 되었고

이제로 부터 빨렌시아 레온에 이르기까지 펼쳐지는 거대한 고원지대를 지나가게 된것이다

 

부르고스는 고대로부터 켈트족의 취락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9세기 말 아스투리아왕국에 의해 요새도시로 건설되었고

해발 850m의 언덕에 위치하고 있으며

800년동안 이슬람인들의 지배를 받아왔던 탓으로 인한 울분으로 시작된

"레콩키스타"라로 불리는 국토회복운동의 군사적인

전초기지 역할을 처음 시작한 정신문화의 도시이기도 한것이다

 

그리고 11세기에 까스티야 왕국의 수도가 되었으며

세비야 톨레도에 이어 부르고스는 스페인에서는 3번째로 큰규모의

부르고스 대성당(Catedral de Burgos)으로 유명한 대도시이기도 한것이다

 

또 다른 이름 산따 마리아 대성당이라고 불리우기도하는 이성당은

1221년 알폰소10세가 마우리시오주교의 후원으로 짓기 시작했고

프랑스의 영향을 받아 빼어난 고딕 양식의 건축물로서

1972년이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역사적인 보존가치가 높고

세계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는다

 

스페인은 이탈리아 중국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을 최다 보유한 국가로서의

예술 문화선진국의 자부심이 대단해서 부러운 마음이 가득해지기도 하는것이다

 

메세타(Meseta)란

순례자들에게 철저한 고독과 깊은 침묵을 강요하는

아무것도 없는 무한히 넓은 고원지대로서

뼈에 사무치는 외로움과 마딱뜨릴 용기가 없는

순례자들은

체면과 가식을 벗어던지고

미리 기차와 버스로 레온 지방까지 날아가 버리는

공포의 구간으로도 그악명이 높은곳이다

 

유럽지역의 모든이들이 스페인에 별장을 가지고

노후를 보내는것이 꿈이라는

태양의 나라 스페인

그러나 일년 삼백육십오일이 따뜻할것 같은

해발 850m 고원지대 부르고스의

여름과 겨울은

상상을 초월하는 계절의 혹독함이 내재되어 있는 곳이다

 

여름날에는 아프리카 사막과같은 열기와 건조함으로

겨울에는 시베리아의 냉혹한 통토의 차가움과 북풍한설이

순례자들에게 감내하기 힘든 고통의 구간으로 회자 되고 있는것이다

 

어쨌거나 나는 죽음으로 가는 길 일지라도

내가 가야하는 길이라면

오직 선택의 여지 없이 가야 하기 때문에

태초의 바람과 빛이 쏱아지는

고원지역에 홀로 우뚝서게 되었다

 

세상의 모든 생물과 사람들이 아무런 고통없이

얻어지는

수확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저푸른 벌판의 나무들이

북풍한설과 거센 비바람을 이기고

봄이오면

어김없이 고결한 푸르름을 피워내듯이

사람들도 어떠한 고통의 체험을 통하여

성장하고 인격을 완성시키고 성숙하게 되는것 같다

 

온실에서 자란 나무가

세상의 모진 풍파를 이기지 못하고

살아남지 못한다는 이치를

깊이 깨닫는 소중한 단련의 시간이 되는것이다

 

몸과 마음을 고통스럽게 하였던 어제의 칠흙같은 암흑이

나를 의연하게 하였고

오늘 이광활한 대지위에 굳건히 내딪는 나의 발걸음에는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는 희열이 가슴 가득히 차오르게 하는것이다

 

어제의 황망함속에 내가 머물러야하는 곳에서

3개의 마을 9km를 더 지나온 만큼

오늘의 나의 일정은 26km에서 9km를 뺀 17km 정도의 코스이다

남들은 눈물로 걸어야 하는 이길을 나는

한가롭고 짧은 시간에 가벼운 마음으로

통과하도록 예비하신 그분의 은혜를 감사드린다

 

홀로 태어나고 홀로 돌아가야하는

인간의 원초적인 고독을 닮은 메세타는

거대한 침묵의 바다이기도 하다

 

아무것도 없는 허황한 벌판의 고원의 대지에는

푸른 밀밭의 물결

노란 유채꽃이 바람을 타고 파도를 이루고 일렁인다

 

멀리 지평선 넘어로 한없이 내달리는 고요함이

도망치고 싶은 싸늘한 고독의 눈물인가 !

 

귓가를 스치는 바람과

쏱아지는 햇살의 따가움은

그토록 견딜수없는 침묵의 바다를 이루고

한없이 서성이게하는 가없는 외로움인가 !

 

메세타 고원은

내게 태초의 언어로 쓰여지는

한가닥의 시가 되고 음악이 되었다

 

성서속의 첫귀절에 나오는 황야일까

메세다 고원은

하느님께서 최초에 사용하셨던 켐퍼스 같은것

 

얼마나 거대한 고귀한 그림판인가

천지사방

하늘과 땅이 맞닿아

오직 보이는 것은

하늘과 땅을 가르는 아득한 지평선뿐이다

저멀리 일렁이는

한줄기 시원한 바람의 속삭임은

사랑으로 충만한

천지창조의 불꽃이 아니었을까

 

처음의 시작도 끝맺음도

사랑으로 엮어 만든 붉은 혈맥의성서는

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어느곳에서도 오직

말씀으로 존재하는 사랑이시다

 

스페인 민족의 가슴속에

자랑스러운 영웅으로 남아있는

엘시드의 고향이기도 한 부르고스는

 

나를 순례자들에게 버림받게 하기도 하였고

엄청난 고통의 밤길을 혼자 걷게 하기도하였고

나를 기쁨 넘치는 소용돌이 속으로 안내하고

진정한 하느님의 사랑을 만나게 하는 도시이기도 했던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걸어왔던 도시 중에서

가장 멋지고 감명깊은 예술과 종교문화의 도시 부르고스였던것이다

 

내가 묵어야할 방이 없을까봐 미친듯이 걷지 않아도 되는 오늘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 마다 한아름 가득 따뜻한 미소를 주고 받으면서

서로에게 한껏 힘이 솟아나게 하는 에너지를 선물하는 까미노길

메세타의 끝없는 평원을 걸으면서 오늘의 화두로 떠오른것은 희였다

 

세자매중의 셋째로 올해 나이 만 40세의 미혼. . .

그래서 언제나 내가슴을 짓누르는 아픔으로 작용하는 이 아이는

내가 진정으로 원하지 않은 이념논쟁에 나를 휘말리게 하면서

나의 생명선을 갈가먹는 상처를 남기고 무책임하게 집을 떠나있는 것이다

 

내게서 이념이란 짐승을 사육하기 위한

사육자들의 최고의 사기술이라고 생각되는것이 그첫번째요

상대적인 관점에서 이념이란

인간을 원초적인 행복으로 이끌수있는

인간본성에 바탕을둔

사상과 철학을 담고 있어야한다는 나의 주장이 그두번째가 되는것이다

 

6.25를 체험한 우리 세대들은 남과북의 분단을 가지고온

북한의 붉은 이념을 생리적으로 받아 들일수가 없는 것이다

사람은 경험을 통하여 가장 확실한 지식과 정보를 온몸으로 익히게 되는것이다

그것은 동물들도 마찬가지이다

생과사를 넘나드는 앎의 지식은 체험하지 않은 교육만으로

그것을 정확하게 인지하기가 여려운 것은 인지 상정이 될것이다

 

더욱이 이념은 각개인의 혈액속에 축적된 DNA가 말없는

삶의 지표가 되기 때문에

좋아하고 싫어하는 선호도가 너무나 선명하게 작용한다

그리고 잠재의식속에 비축되어있는 감각에 따라서

행동하게 되는것은 인간과 동물들의 생활의 철칙이 될것이다

 

더욱이 나는 6.25 사변 직전해에 내나이 만세살때 내 아버지을 붉은 무리들에게 잃었다

그 충격적인 삶의 흔적이 너무나 강열하여 그 무엇으로도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바꿀수가 없을뿐만 아니라 절대로 설득 당하지 않는 고집스운 삶을 살아야 했던것이다

나에게서 공산주의 사회주의는 타협의 대상이 될수가 없는 목숨을 건 이유가 되는것이다

 

그런데 6.25세대 이전의 사람들은 살아남기위해서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서

아무것도 할수없는 고립된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후회없는 삶을 살고자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것에만 온정신을 쏱고 희생하며 살아왔던것이지만 ....

 

자식들이 성장하여 대학에 진학하면서 6.25사변은 분명하게 스탈린이 김일성이를 앞장세우고 남침한 전쟁임에도

남한의 이승만이가 미국의 주구가 되어 북침한것이라고 아이들이 배우면서 붉은 이념에 물들어가는 내아이들이

정상적인 사고력을 잃어버리는 영혼의 파괴과정을 전혀 눈치체지 못한 가운데 오랜 세월동안 방치된 상태로

지냈던것이고 아이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성년으로 성장하고 있었던것이다 . . .

그것을 알게 되었을때의 청천 벽력같은 절망감이란 ~

이루 말할수 없는 고통으로 뼈를 가르는 슬픔으로 요동치게 하였지만

정신이 붉은색으로 물들어 버린것은 어떤 약으로도 치료가 불가능했던것이고

신세대와 구세대의 간극을 좁힐수있는길은 멀고 어렵다는 것을 깨닫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것이다

 

몸집이 성인으로 자라버린 아이들을 조종할수있는것들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떤 시도도 신세대는 구세대인 부모를 무식함으로 단숨에 단절 시켜버리고

피해가기 때문에 대화 자체가 이루어질수가 없었던것이다

부모와 자식의 진정한 사랑의 관계가 아니라 필요한것을 채우워주는 도구에 불과했던것이다

그래서 구세대가 할수있는 일이란 이들의 삶이 체험을 통하여 성장할때까지

자애로운 마음으로 기다리고 기다리고

한없이 기다리는 것으로 그들과의 불화를 피할수밖에 없었던것이다

 

그 세월이 얼마인가 ?

그죽음보다 깊은 고독의 시간이 얼마인가?

이들의 나이가 20대에서 40대의 성인으로 성장되었지만

밑으로 두아이들은 자기들의 정체성을 목숨을 걸고 지키려고 하는것이다

그럼 내가 나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이들의 생각을 수용할수 있는것일까 ?

아닌것이다 ~ !

사상이란 생명위에 존재하는 죽음도 불사하는 강열한 권력으로 존재하는것이다

그것이 부모라고 할지라도 생명을 건 투쟁으로 맞서는 전쟁이되는것이다

억장이 무너지는 일인것이다 참담한 비극인것이다

 

이념이 부모와 자식의 혈연을 무용지물로 만들고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무서운 권력이 가정을 파괴하고 지배하는것이다

공산주의 이념이란 이 얼마나 잔혹한 것인가?

얼마나 끔찍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는가를 내가 설명하지 않아도 알것이다

그들의 교육이 부모와 자식을 근본적으로 갈라 세우고

기존의 도덕과 윤리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휴지 조각이 될뿐만 아니라

부모와 자식의 전통의 기존질서가 무시된 상태로

적대관계에서 대립하도록 교육되고 사육되고 있다는것이 진실인것이다

그들은 절대로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도록 훈련받는것이다

그래서 혈연으로 맺어진 하나의 가족의 공동체가 아니라

가정위에 우두머리가 존재하여

호칭 마저도 너와 내가 전혀 다른 개체가 되고

아버지 동무가 되고 어머니 동무가 되는것이다 ~~~ !!!

지구상에 인간이 생존해온 시대로 부터 왕조 시대를 거쳐오면서

씨족의 집단에서 나라가 형성되었고

그리고 발달된 형태의 왕정시대의 주권은

왕에게만 존재해 왔던것이 이념의 시작점이 될것이다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것이 아니라 임금에게 있는것이었다

그왕에게 있었던 주권이 국민에게 옮겨온것이 민주주의 시발점이 될것이고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것은

원시문명을 거처오면서 진화된 사람의 인격의 성숙이 불러온 값진 선물인것이다

발달된 오늘날의 자유민주주의 그리고 자유시장경제가

바로 인간들이 다듬고 키워온 진정한 인간삶의 행복의 근간이 아니겠는가 ?

 

주권이 각개인과 국민에에 있는것을 가장 싫어하는 인간들은

소위 말하는 정치하는 집단으로서

호시탐탐 무소불이의 권력을 잡아서 인간사회를 지배하려는

예전에도 지금도 존재하는 인간들의 거침없는 약육강식의 야망이 아니겠는가?

 

권력을 잡기 위한 수단으로서 개인주의는

정치인들이 가장 싫어하고 받아 들일수 없는 걸림돌이 되는것이다

모든 국민을 노예처럼 종처럼

자기 손바닥위에 올려 놓고 마음대로 하기 위해서는

개인주의와 민주주의가 절대로 용납 될수없는 것이

공산주의 전체주의 사회주의 사상이 될것이다 ~ !!!

 

개인의 자유를 인정하는것은 공산주의 사회주의 자들에게는

마치 독약과 같은것이 될것이다 ~ !

절대로 사람들을 한그물속에 가두어 사육할수가 없는것이다

그래서 생겨난것이

인간의 원초적인 본성에 역행하는 "평등한 삶"을 누리게 해주겠다는

속임수가 연구되었을것이다 빨갱이들의 위대한 사기술의 출연인것이다

 

인간본성인 경쟁의 삶에서 도태 될수밖에 없는 일반대중을 향하여

약한자들에게 사탕 발림으로 강자들의 것을 빼앗아서

나누어 주겠다는 평등주의가 어리석은 일반대중에게 먹혀들어간것이다

그것이 지상천국이라고 일컫는 공산주의 발상인것이다

이미 지구상에서 철처한 실험을 통하여 사라진 쏘련의 붕괴가

그공산주의의 피페한 삶의 역사를 잘 설명하여 주고 있지 아니한가?

 

지상천국이라 일컫는 공산주의가 지구상에서 종말을 고한지가 언제인가?

그러나 주체사상이란 다른이름으로 변질된 공산주의로 사회주의 체제로

3대를 이어오는 북한은 이지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인간존엄으로 태양과 같은 존재의 유일종교의 교주가 된것이다

 

인간을 집단노예로 다루고 지배하기 위한

야만적인 노력과 연구는 오랜 세월동안 축적되어 왔던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서를 본떠서 만든

사이비종교 3대교주 김일성 주체사상 유일종교가 아닌가 ?

 

우두머리 하나 즉 예수가 왕이 되고

모든 인간의 아버지 행세를 하는것과 같은것이다 !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것 아니라 한집단의 우두머리에게 있는것 처럼

내가 낳은 아이들도 그우두머리의 물건으로 변질되는것이다

그것이 김일성 교주의 절대권력의 법칙이 되는것이다

 

그곳에 감정이 개입되지 않는것이다

인간의 감정이 이입된다면

그이념은 설곳이 없어질것이니까

그래서 공산주의는 유물론이 되는것이다

감정이 없는 물건이 사람이다

내자식이 그공산주의 자의 물건이 되는것이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먼저가 아니고

한집단의 우두머리는 유일하게 "하나"이면서

내아이의 주인은

그우두머리가 되고 먹고 입히고 마시게 하는것이 우두머리가 함으로 인하여...

 

우리의 아이들은 그우두머리의 소유이며 그우두머리가 원하는 대로

영원하게 물건으로 존재하는것이고

나와 자녀와는 동급의 우두머리의 종이요 노예가 된다는것이다

이것은 나와 저녀가 죽는날까지 지속되어야 할 법칙이 되는것이다

 

인간을 유물론으로 해석하는 공산주의 자들에게는

부모가 자식들을 좌지우지하는 소유권같은 것을 허용할리가 없는것이다

 

그것이 그우두머리가 말하는 내아이에 대한 인권이 되면서

내가 부모로서 무슨 말을 하게되면 불법이 되고 인권침해가 되는것이다

그들이 "학생인권"을 말하는것은 아이들을 부모로 부터 격리시켜서

물건으로 만들고 우두머리가 소유하기위한 거대한 사기술이 되는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인권. . .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인간을 좀먹은 독벌레인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으면서 집단 수용하여 물건으로 만들어

우두머리의 소유물이 되고 부모들에게는 소유권이 영원하게 박탈당하는 것이다 ~~~~ !!!

 

이러한 공산주의 사상이 인간세상을 암흑으로 만들고 살인이

그소유물의 법칙아래 마음놓고 벌어지게 되는것이다

부모가 잘못하면 당국에 신고하여 인민제판을 받고 부모는 사형에 처해지는것이다

이것은 북에서 집단수용소를 탈출한 청년이 고백한

그부모를 죽인 사연은 사람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드는 실화인것이다

이것이 지금 세상에서 꾸며진 일이 아니라 우리들이 직접 체험하여온 현실이 아닌가?

우리가 어릴적에

소작인들이 빨갱이 완장를 차고 자신이 의지하고 살았던 지주를

인민재판으로 끌어내어 재판없는 살인을 하는것을 얼마든지 볼수가 있었던일이다

 

나도 내아버지를 인민군을 대동하고 한밤중에 우리집에 처들어온

지방 빨갱이였던 소작인의 아들에 의해서 목숨을 잃으셨다

 

우리아버지와 함께 희생된 사람이 무려 남자가 그밤에 4명이나 된다

그당시에는 6.25전쟁 바로 직전이라서 한밤중에 인민군들이 한밤중에 출몰하여

지방의 유지를 잡아가거나 암살하는 일들이 빈번했던 악몽같은 세월이었던것이다

 

정세의 불안정으로 아버지를 보필하던 동지와 작은 아버지

그리고 우리집에서 일꾼으로 있었던 약혼날짜를 받아둔 청년은

인민군들이 우리집을 포위한 틈을 타서

뒤뜰의 담장을 뛰어 넘어 도망치려다가 총을 맞고

그자리에서 절명하였던것이다

나는 그밤을 결코 잊지 못한다 절대로 . . .

 

나는 그당시 너무나 어려서 그순간

그 이전의 일을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 . .

그러나 그날밤

아버지께서 황망하게 집을 나서는 소리가 들리고

"너는 누구냐? "하는 소리가 찌렁찌렁하게 울렸었다

"내가 이집 주인이다 " 하셨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듣게된 우리 아버지의 음성이 되는것이다

그리고

"김동무 ! 이동무 ! " 하던 다급한 목소리가 들리고

뒤뜰로 뛰는 소리가 들리는가 했을때

탕! 탕! 탕! 하는 무서운 세발의 총소리가 울렸었다

 

나는 그당시 어머니를 따라 대청마루에 있었는데

엄마의 무릎까지 닿는 키의 어린 내가

어머니의 치마폭을 잡고 있었고

아버지를 배웅하려 나오셨던 어머니께서는

대청마루의 열린문을 붙잡고 벌벌 떨고 계셨다

사시나무 떨듯하시는 엄마의 가슴위로

달빛에 번쩍이는 장총 끝에 달린 무서운 칼날이

어머니의 목을 겨누고 있었던것도 기억나는것이다

 

나는 그당시 만3살 4개월 13일이 되는 1949년 10월 13일이었던것이다

 

나는 이기억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후에 어머니께 말씀드렸는데

너무나 놀라워 하시는것었다

 

내가 결혼하기 전해 였던것 같은데

보통 사람들은 절대로 그어린 나이때를 기억하지 못한다 하시고

내아버지께서 나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셨음을 말씀하시고

어린나를 두고 가시는것이 너무나 힘드셨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내가 그토록 그장면을 기억할수 있도록 했을것이라하셨다

 

그랬다

나는 아들없는 집안의 넷째 딸이었는데

유난히 아버지의 사랑이 극진하셔서 아버지의 밥상머리에 앉을수 있는 권리는

내가 유일했었다고 하며 아버지께서 그당시에도 나를 업으시고

마을을 댕기시는것을 마다하지 않으셨는데 남존여비의 유교사상에서

남성들이 아이를 업어주는 일은 절대로 흔한일이 아니라는것이다

 

그이튼날 아침 아버지의 죽음을 알리는 통곡소리가 들리고

어머니께서 흰옷을 입으시고 머리를 풀고

멀리 아버지가 끌려가신 언덕으로 달려가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리고 아버지가 기거하시던 방이 아닌 사랑채에 시신이 모셔지고

흰두루마기를 입으시고 하얀천으로 둘러친 커다란 평상위에 누워계셨는데

가슴팍위로 아직도 선혈이 붉게 붉게 흘러 내리고 있었고

흰천에 싸인 평상위에 피가 흘러 내리는 것을 볼수가 있었던것이다

아버지! 아버지 !그분이 내 아버지이셨던것이다 ~ !

 

내아버지께서 사망하신 시간은 전날밤 12시경이라고 호적에 기록되어있다

그렇다면

아버지께서 끌려 가시다가 돌아가시고 집으로 돌아오신 시각은

다음날 아침 10시

시신의 피가 아직도 흘러 넘칠 수가 없는 시간에 집으로 돌아오신 것이다

 

어머니와 동네어른들의 증언에 의하면 나를 옥희언니라고 불리는

우리집에서 일하시던 아줌마의 딸이 업고 있었는데

내가 너무나 서럽게 울어서 온동네 사람들이 모두 따라 울었다고 전해온다

옥희언니라고 불리는 그언니는 우리 둘째언니와 동갑이었고

내가 그토록 울었다는 기억은 전혀 없는것이다 ~~~ !!!

 

우리집에서 일하던 청년의 죽음 그리고 작은 아버지와 우리아버지

아버지의 신원을 보필하셨던 동지

이렇게 20대와 40대의 청장년들의 생떼같은 죽음은 지금도 나의 본적지에서

유명하며 애국선열들의 사당에서 해마다 마을제를 모시고 있는것이다

 

내가 결혼하여 첫아이가 세살때쯤에 산림청에서 근무하는 국가공무원들이

내가 운영하였던 서울 화곡동의 제과점에 앉아서 우리아버지의 존함을 거명하면서

김일성 빨갱이 자금을 받았던 아버지를 죽인 남씨 집안의 아들이

프랑스 유학까지 가는 호사를 누렸던 이야기를 하는 것을 경리실 방에서 우연하게 듣게 되었는데

그당시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아서 한동안 말을 잇지를 못하고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새로운것이다

 

우리집안의 소작인이었던 남씨 집안의 아들들은 4명이었으며

한명은 프랑스로 유학을 갔고 세명은 월북하였으며 아버지가 돌아가신후

자신의 어머니를 찾아 몰래 마을에 진입한 큰아들 한명은 군경과 예비군 합동작전으로

그집을 표위하자 산으로 도망치다가 사살되었다

그리고 북으로 갔었던 두형제도 제명을 다하지 못하고 북에서 죽었고

프랑스로 유학을 간 아들은 조국으로 돌아 오지 않고

돈을 벌어서 고향의 땅들을 매입하고 지금은 그곳의 재벌로 둔갑되어 있지만

자손이 없이 세상을 떴다는 소식과 내아버지의 희생이 전설이 되어 있는것이다

 

소작인 남씨의 집을 헐었을때

그집의 지하에는 엄청난 크기의 지하 벙커가 있었다는것이다

그당시 그까마득한 1950년대에도

그러한 빨갱이들의 악랄한 골수간첩들의 행위가 뿌리를 내리고

사람들을 헤치고 있었다는것에 대하여 지금도 경악을 금치 못하는것이다

 

이데올로기 전쟁의 상흔이 얼마나 깊은가를 누가 짐작이라도 하겠는가 ?

본인이 당해본 일이 아니면 그고통의 깊이를 이해 할수가없는것이다 ~ !

 

아버지께서 희생되신후 전쟁중에 아군이 밀려난 자리에 인민군이 들어와서

어머니가 아버지 때문에 잡혀가시고 나를 포함한 네명의 딸들이 어머니를 면회하러 다녔는데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그다음날 어머니를 총살 시키고 떠날려고 했었고

그곳으로 합류하게된 인민군 장교가 예전에 아버지의 은혜를 입었던 분이라면서

죽음 직전의 어머니를 풀어 주는 기적이 일어나서 어머니의 생명을 구하기도 하였던것이다

 

누구라도 내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말하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한다

우리 어머니께서도 그리말씀하셨다 너무나 기이한 일이라는것인데

내아버지에 대한 나의 기억은 나의 생명을 지켜주는 등불 같은것이 되었다

 

모진 세파속에서 고통을 이기는 인내가 되었고

아버지께서 내게 보여주신 그짧은 순간의 사랑의 힘으로

힘겨운 세상을 승리로 이끌수있는 에너지를 간직할수가 있었던것이다

 

나의 아버지의 사랑의 힘은 커다란 내삶의 스승이 되었던것이다

아직도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폭포수같은 눈물이 쏱아지고는 한다

사람은 사랑을 먹고 온건하게 자랄수가 있고 살아갈수있는 힘을 간직하게 되는것이다

 

나는 내딸을 잃었다

어쩌다가 세딸중에서 두딸을 빨갱이들의 먹잇감으로 내어준꼴이 된것이다

나는 이시대의 가장 수치스러운 패배자가 되었다

내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여

내아버지를 생각하면 이루말할수없는 죄송함을 느끼게 되는것이다

 

우리 아이들은 나를 보고 엉터리 사기치는 글을 너무 많이 읽어서

엄마가 세상을 바로 볼줄 모르는 이상한 사람이 되었다고 한탄을 하는것이다 !!!

 

내가 무슨 말만 하면 어이가 없다는듯이 말을 가로체 버린다

그래서 나는 말한마디도 제대로 못하고 그냥 지나가 버릴수밖에 없었던것이다

평화를 깨고 싶지가 않았고 어떤말로도 그들을 설득할수가 없었기 때문인것이다

 

어디서 부터 무엇을 어떻게 이야기 해야 할지를 몰라서 아예 입을 다물어 버린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른것이다

 

지금의 이나라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2017년 3월 10일 탄핵을 기준으로

5.18광주폭동 그리고 세월호의 망령이 지배하는 4.16의 노란리본의 시대이다

 

그들 노란 리본의 당사자들은 일반인들을 제외한 어린 학생들이

304명의 영혼들이 죽음의 값으로 8억씩 받았다

최근에 법원 판결에 승소하여 각각 6억원의 손해배상을 국가에서 지급 받게 되면

모두 14억의 돈을 받아 죽음값의 재벌이 304명이나 탄생하게 되는것이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국민들이 2014년 4월16일 부터 4년에걸처 모아준 돈들이 각각 4억이상씩은 챙겼을것이다

 

노란리본의 세월호는 4.16으로 명명되어서 5.18민주혁명 유공자에 준하는 기준으로

신분이 격상되어 국가의 유공자처럼 되었다는 것을 어찌 이해하라는것인가?

 

5.18은 북한에서 5.18광주민주혁명희생자기념비로 수백명의 이름이 존재하고 있으며

북한의 교과서에도 실렸다고 북한 스스로 공언하고있는것이 사실로 들어나고 있는것이다

 

그것을 유추하여 볼때 노란리본의 세월호가 4.16 기념일로서

5.18에 준하는 동급의 기념일이 된다는것은 초록은 동색이라는것을 의미하는것이다

 

나는 세월호의 그날을 처음 부터 실시간으로 지켜 보면서

안타까운 눈물을 흘렸던 사람이다

 

그것을 5.18과 같은 동급으로 몰고가는

그들의 만행을 절대로 수용할수가 없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월호 침몰은 절대로 순수한 해양사고라고 할수가 없는것이다

 

우리 셋재딸 희는 중국어를 전공하여 북경 언어유학 기간을 거쳐서

그동안 상하이에서 베이징에서 줄곹 직장생활을 하다가

작년에 귀국하여 한국에서 근무중이다

 

그아이가 새로운 직장에서 일하게 됨으로서

우리집에서 함께 지내게 되었는데

어느날인가

퇴근후에 가방을 풀어 헤쳐놓은것을 내가 정리하다가

못보던 검은봉지가 있길레 무엇인가 하고 풀어 보았더니

노란리본이 100개 정도는 되게 수북하게 들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너무나 섬뜩해서

얼른 봉지를 묶어서 두고 그아이가 아침에 들고 갔었던 커다란 백팩을 보니까

노란리본이 매달려 있는것이다 ~~~ !

노란리본이 매달려 있는것이다 ~~~ !

 

아아 .... 이일을 어찌 할까 . . . .

내가 늘 피하고 말하고 싶지 않았던 일들이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것이다

 

이것은 결코 피할수없는 위기앞에서 서게된것이다

여기가 어디라고 노란리본을 달고 다니는것이냐 ?

 

이곳은 대단위 아파트 단지이고 날마다 이웃사람들과 엘리베이터에서

아침저녁으로 만나게 될것이다

아무도 노란리본을 달고 다니지는 않는것이다

아파트 단지안에서도 선거때면 이념논쟁으로 싸우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노란리본을 달로 다니면서 자랑하는듯이

사람들을 위협하는 사람은 없는것이다 ~~~ !

 

나는 남들에게 절대로 쓸때없는 피해를 주고 싶지가 않고

남들의 눈을 불편하게 하는 노란리본을 모른척할수가 없는것이다

 

내딸이 이렇게 엄마를 역행하는 노란리본을 달고

이것 보라는듯이 시위할줄은 몰랐엇다 ~~~ !

 

그래서 정말 어렵게 말을 꺼냈던것이다

 

노란리본을 달고 싶으면 다른곳에서 달고 댕겨야 한다고 말했었다

엄마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는 달고 다니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을때

그것이 뭐가 잘못되었냐면서 뛸듯이 분노하는것이다

 

내아이의 말은 동네사람들이 중요한가

자식이 더 중요하지 않느냐는 적반하장의 항의로서

그것이 어찌 부모가 할일인가고 말하는것이다

이말은 정녕 내가 우리 딸에게 하고 싶은말인것이다

 

그리고 문제의 그노란리본이 들어있는 검은 비닐봉지가 생각이 났는가

그것을 어찌했느냐 ?

그것을 어디에다 버린거야? 하면서 외마디 소리를 지르는것이었다

 

내가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목숨을 걸고 길러낸 나의 딸이

엄마의 인격을 송두리체 짓밟는 말을 서슴없이 하고 있는것이다

 

내가 왜 그것을 버리겠는가 ?

엄연히 본인이 그것을 버리던가 간직하던가

선택을 하도록 하는 것이

성숙된 인간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

 

하도 어이가 없어서 내가 왜 그것을 버리겠는가

하고 소리를 치니까

그순간 자신이 쏱아놓은 소지품을 뒤적거려서

그것을 찾아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왜 노란리본을 달고 엘리베이터를 타면 안되냐고 하는것이다 !

동네사람들 때문에 자신이 노란리본을 달수 없다는 엄마의 말을 수용할수없다는것이다

죽어도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는것이다

 

자식이 부모의 불편한 마음을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이 편한대로 하겠다고

반격하여 오는 것에 대하여 천지가 무너지는 절망감을 감당할수가 없었던것이다

 

오죽하면

이곳은 엄마가 사는 영역이기 때문에

너가 나의 영역안에서 살고있는 동안에는 나에게 불편을 주면 안될것이고

노란리본은 이곳에서 살고 있는 주민들과 엄마가 좋은관계를 유지하는데 걸림돌이 된다면

그런짓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예의라고 말했었다

 

밤늦은 시간에 퇴근하고 돌아온 그아이는 나와의 생각의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노란리본을 맘대로 못달게하는 엄마를 비인간적이고 이해할수없는 엄마로 취급하면서

한밤중에 짐을 챙겨서 집을 나가버린후에 거의 일년동안 소식이 두절된것이다

 

자식이 잘못하는것을 보고도 말을 못한다면 그것은 부모로서의 도리를 잊은것이 되는것이다

내가 그날 그말을 하지 않고 그대로 지나칠수는 없는일이였던것이다

 

나는 내가 살고 있는 동네의 이웃에게 막무가내의 태도를 보이는것을 용납할수가 없는것이다

그리고 내가 자신의 뜻을 수용하지 않는다고 하여 집을 박차고 나갔으면서도

내가 자식을 내쫒아버린 냉혹한 엄마인것처럼 생각하는것에 대해서 화가 나고 가슴이 아팠었다

그아이는 그동안 수없이 전화를 걸어도 전화를 받지 않았고 나중에는 전화번호를 바꿔버렸다

 

그아이와 내가 천추의 한을 남기지 않기를 바라는것이다

스페인의 까미노길에서도 소식을 전하기를 간절히 시도 했지만 무위로 끝났다

 

나는 평생동안 내아버지를 그리워하면서 살아왔었다

이제는 그이념때문에 내아버지 아닌 내자녀를 빼앗긴 슬픔속에 끝없는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게 된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