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rth, Wind And Fire - 2

2024. 9. 20. 09:13팝아티스트

 
 
데뷔/결성: 1970년

활동/시기: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멤 버: 모리스 화이트(보컬·드럼·칼림바), 버딘 화이트(베이스), 필립 베일리(보컬·콩가), 래리 던(피아노), 알 매케이(기타), 프레드 화이트(드럼), 랠프 존슨(드럼), 자니 그래이엄(기타), 앤드류 울포크(색스폰)


1990년대 힙합시대에 음악적 자산으로 줄기차게 재조명을 받은 어스 윈드 앤 파이어(Earth, Wind & Fire)는 1970년대를 수놓았던 펑크(funk)음악을 결정지은 대형 흑인그룹이다. 펑크를 논할 때 단연 첫손에 꼽아야 할 불멸 불후의 그룹이다. 우리에게는 감성적인 발라드 'After the love has gone'로 인식된 감이 있지만 엄연히 그들의 음악은 16비트의 탄력적인 연주를 내건 펑키 사운드를 특질로 한다.

라틴형의 펑크에 가스펠 하모니를 엮어 능란한 혼 섹션과 다양한 악기로 채색해낸 그들의 연주는 가히 흑인음악에 관한 한 '백과사전' 사운드로 불릴만했다. 리더이자 프로듀서인 모리스 화이트(Maurice White)의 실험적 음악아이디어와 아프리카에 기원을 둔 악기 칼림바(Kalimba) 연주 그리고 1971년 가입한 필립 베일리(Philip Baily)의 가성 보컬은 즉각 이들을 떠올리게 하는 고유의 트레이드마크였다.

펑크 음악은 소울에 이어 모든 악기연주를 동원하는 '밴드'의 개념(흑인이 노래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연주한다!)에 흑인 본래의 아프리카 연주감성을 복원한다는 실천의지(아프리카로 돌아가자!)가 낳은 산물이었다. 아프리카 음악이란 기본적으로 멀티리듬과 정글리듬이 생명이다. 어스 윈드 앤 파이어는 바로 이것을 미국 대륙에 이식하려는 모리스 화이트의 웅대한 야심에 의해 탄생되었다.

1941년에 태어난 뉴올리언스의 술집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던 할아버지의 재질을 이어받아 시카고 콘서버토리 음악학교에서 교사가 될 목적으로 작곡과 퍼커션 연주를 전공했다. 그러나 직업으로 방향을 바꿔 1962년에 전설적인 시카고 체스레코드사로 들어가 정규 세션 드러머가 되었다. 여기서 그는 척 베리, 하울링 울프, 머디 워터스, 임프레션스, 폰텔라 배스 등의 레코딩에 참여했다.

이후 1967년부터 1969년까지는 램시 루이스 트리오(Ramsey Lewis Trio)와 함께 내리 10장의 앨범 작업을 하면서 아프리카 재래의 악기로 엄지손가락으로 두드리는 독특한 음색의 피아노형 악기 칼림바를 소개하게 된다. 그는 1960년대에 중동과 아프리카를 여행하면서 이집트를 비롯한 아프리카문화에 매료되었고, 이것은 나중 어스 윈드 앤 파이어 음악은 물론 앨범커버에 반영된다.

1969년 말 솔티 페퍼스(Salty Peppers)란 이름으로 함께 활동한 웨이드 플레몬스와 돈 화이트헤드와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한 모리스 화이트는 밴드 명을 어스 윈드 앤 파이어로 바꿔 그들의 역할을 조정하고 동생 버딘 화이트를 끌어들여 라인업을 완성한다. 1971년 그룹 타이틀을 내걸어 워너브라더스 레코드에서 앨범 <Earth, Wind & Fire>를 발표했으나 가능성을 확인하는데 그친다(전미차트 172위).

2집 <The Need Of Love>를 낸 뒤 화이트는 가스펠 그룹의 음악감독이었던 필립 베일리와 그와 함께 음악을 한 건반주자 래리 던(Larry Dunn) 등 여러 멤버를 충원해 대형밴드로 개편을 단행했다. 당시 콜롬비아 레코드 사장 클라이브 데이비스는 그들의 뉴욕 록펠러 센터 공연을 보고 계약을 갱신, 그들은 워너브라더스에서 콜롬비아로 적을 옮기게 된다.

4집 <Head To The Sky>가 골드, 5집 <Open Our Eyes>가 플래티넘 레코드를 기록하면서 싱글들도 서서히 상위권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Mighty mighty'는 29위, 악기로 독특한 지향을 알린 'Kalimba story'는 55위를 기록, 나름대로 성적이 괜찮았다.

하지만 1974년 말에 제작에 들어간 사운드트랙 앨범 <That's The Way Of The World>(영화에 직접 밴드로 출연한다)이 차트 정상을 차지하면서 마침내 어스 윈드 앤 파이어는 고대하던 광채의 길로 접어들었다. 영화의 테마곡이자 나중 그래미상을 수상한 'Shining star'는 싱글차트 1위를 강타했고 타이틀곡도 12위에 올랐다. 이 덕분에 앨범은 순식간에 20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이 시기부터 1979년에 발표한 <I Am> 앨범까지 내리 6장이 모두 각각 200만장 이상이 팔려나가 대표적 흑인그룹으로 자리잡았다. 특히 마법적 장치와 불꽃 조명을 내세운 진보적인 스테이지 쇼로 관객들을 사로잡던 1976년부터 1979년까지의 전성기에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대중적 인기와 영향력을 과시했다.

싱글도 잇따라 호조를 보여 1976년 'Sing a song'은 5위, 'Getaway'는 12위, 1978년 비틀스 곡을 펑키하게 재해석한 'Got to get you into my life'(비지스와 피터 프램튼이 주연한 비틀스 소재의 영화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에 삽입되었다)는 9위, 펑키 리듬이 매끈하게 펼쳐진 'September'는 8위를 기록하며 모두 골드 싱글이 되었다. 'September'는 동시에 발매된 그들의 베스트 앨범 <The Best Of Earth, Wind & Fire Vol.1>에 수록되어 앨범의 400만장 판매고 수립을 견인했다.

1979년 흑인 여성그룹 이모션스(Emotions)와 함께 부른 'Boogie wonderland'는 6위, 그리고 그들로선 드문 발라드 'After the love is gone'는 2위까지 올랐다. 뒤의 곡은 훗날 당대의 프로듀서로 떠오른 데이비드 포스터(David Foster)가 썼다. 데이비드 포스터를 얘기할 때 반드시 거론되는 곡이기도 하며 선율의 마법사답게 멜로디가 압권인 덕에 지금도 애청되고있다. 또한 1978년 32위에 그친 'Fantasy'는 비록 당시에는 히트하지 못했으나 나중 1995년 내한한 호주출신 그룹 CDB가 리메이크하는 등 새롭게 알려지면서 골든 레퍼토리로 상승했다.

이 무렵 어스 윈드 앤 파이어의 지휘자 모리스 화이트는 히트제조기로 명성을 떨치면서 이모션스, 데니스 윌리암스, 웨더 리포트가 소속된 외부 프로덕션마저 설립했으며, 독특한 제작스킬에 대한 수요가 급등하면서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닐 다이아몬드, 제니퍼 할리데이 등의 음반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작곡자 프로듀서로서 시대를 갈랐던 비지스의 배리 깁이 부럽지 않을 기세였다.

1980년에는 유럽과 남미 순회공연을 가지면서 지구촌밴드의 위치를 다졌으며 이듬해 낸 앨범 <Raise!>에서는 'Let's groove'로 싱글차트 3위에 올라 그들의 대표작 리스트에 또 한 곡을 더했다. 1983년 'Fall in love with me'(17위)는 마지막 히트 싱글이었다. 이후 그룹 출신의 필립 베일리, 로니 로스, 웨이드 플레몬스 그리고 모리스 화이트는 제각각 솔로 히트곡을 남겼다. 아마도 그중 팬들에게 가장 인상적인 곡은 필립 베일리가 필 콜린스와 호흡을 맞춰 1985년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Easy lover'(2위)일 것이다.

대중적 인기와는 멀어졌지만 어스 윈드 앤 파이어는 음악적 조류에 맞춰 1990년 <Heritage>에서는 래퍼 M.C. 해머를 내세웠으며 1993년에는 다시 워너 브라더스로 돌아가 <Millenium> 앨범을 발표하면서 긴 생명력을 과시했다. 이들은 1998년에도 장기 유럽순회공연에 이어 동시대에 활약했던 펑크 그룹 아이슬리 브라더스(Isly Brothers), 오제이스(O'jays)와 함께 미국 투어를 가지면서 그들의 음악이 힙합의 영구적 자원임을 다시금 각인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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