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others Four

2024. 9. 13. 16:44팝아티스트

브라더스 포는 50년대 초와 60년대 사이에 재생된 포크음악의 그룹들중 가장 길게 살아남은 그룹중 하나로 차별성을 견지하고 있다. 아마도 역사상 우연히 음악 활동을 가장 길게한 그룹이 아닐까?

2001년 현재 43살의 나이들로 어떤 해체도 없이 두 명의 오리지날 멤버가 아직도 건재한 채로 그룹은 유지되고 있다. 소수만이 이 차별성을 기억한다면 그것은 브라더스포가 미국의 포크음악 역사상 가장 많은 부분기억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차대전후의 대부분의 포크음악적 평가는 우디 구스리나 밥 딜런에 의해 구현되는 정치적이고 음악적으로 이슈 지향적인 곳과 킹스턴 트리오, 채드 미첼 트리오 그리고 브라더스포로 구현되는 보다 부드럽고 오락적으로 지향된 곳에 촛점이 맞추어진다.

브라더스포는 이러한 행동들과 음악들을 했을까?
이들의 음악들이 잘 팔렸을 지라도 포크음악이라는 언급이 있을때 이들이 가장 미국적 비주얼로 여러해동안 정의 내려졌다고 볼수 있을까? 역사상 거의 언급이 없으며 심지어 귀니스 후스 후 포크 뮤직에조차 이들은 언급되어있지 않다. 브라더스포에 대해서 크게 잘못 생각하는 점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킹스턴트리오와
경쟁하려는 시도를 했다는 것이다. 사실상, 밥 플릭 (업라이트 베이스, 바리톤, 베이스), 존 페인 (기타, 바리톤), 마이크 커클랜드 (기타, 반조, 테너) 그리고 딕 포울리 (기타, 바리톤)는 1956년 와싱턴 대학에서 대학원생일 때 만났고 1957년 부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 일년전에 킹스턴 트리오는 그들의 첫번째 녹음을 만들었다. 포크음악은 이 시대 대학에서 가장 자유주의적인 아트로 일어났고 모든 캠퍼스에 트리오나 4중주단이 있는 듯 했고 대부분 친목에서 시작되어 결성되었다. 플릭, 프레인, 커클랜드, 그리고 포울리도 파이감마델타의 멤머중 하나였고 의학계 엔지니어, 그리고 외교쪽의 진로를 열망하고 있었다. 아마추어 공연자로서였으나 그들은 훌륭한 공연을 했고 전통적 톤과 새로운 음악, 그리고 로맨틱한 발라드로 하모니를 이루는 능력으로 캠퍼스 청중들을 기쁘게 해주었다.

그들은 매우 우연히 실질적인 농담에서 프로로 전향했다. 라이벌 친목단체의 멤버 중 하나가 한 여자에게 그 그룹멤버들에게 전화하도록 시켰다. 그녀는 자신을 로컬 시애틀 비너스, 콜로니 클럽 매니저의 비서로 소개하고 그들을 청중앞에 서도록 초대했다. 그들이 거기에(클럽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초대도 없었고 오디션 스케줄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어쨌든 그들은 거기에 있었고 그 클럽 매니저는 그들에게 몇 개의 노래를 청하고 마침내 그들을 고용까지 하였다. 그 계약은 1958년까지 지속되었다. 비록 그들이 맥주외에는 받은 급료가 없지만 그 경험은 이 그룹이 허락받은 매우 가치있는 것이었다. 즉석에서 청중들은 그들을 브라더스포로 명명했다. 판명되었듯이 만약 그들이 음악으로 커리어를 쌓을 계획이었다면 브라더스포의 타이밍은 이보다 더 좋을순 없었다.

1958년 7월, 킹스턴트리오는 “톰 둘리”라는 싱글노래를 내놓았고 3백만개의 판매고를 올리고 포크리바이벌붐은 거기서 눈덩이처럼 불기 시작했다. 1959년 이스터주간에 브라더스포는 보다 나은 재즈연주가가 되기위해 샌프란시스코로 옮겼고 헝그리 아이 클럽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여기서 그들은 모트 루이스를 만났고 그는 재즈 피아니스트 데이브 브루벡의 매니저였다. 루이스는 브라더스포를 설득해 데모테입을 만들고 이것을 콜럼비아 레코드에 가져갔다. 이 회사는 그들의 데모테입을 마음에 들어했고 이 4중주단 (브라더스포)은 레코딩 계약를 하고 풀타임 매니저도 갖게 되었다. 그들은 1959년 독립기념일에 뉴욕에 도착해서 그들의 레코드 데뷔를 위해 레퍼토리를 점검하고 목소리를 가다듬는데 몇주를 보냈다.

이 그룹의 첫번째 싱글인 "Chicka Mucha Hi" "Darlin' Won't You Wait"은 1959년 말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러나 그들의 두번째 싱글인 이미 4년전에 테리 길크슨, 리카드 데어, 그리고
프랭크 밀러가 쓴 어두운 무드의 “그린필드”는 섬광 같은 히트를 쳤다. 브라더스포 버전은 그들의 우아한 하모니에 의해 조명되어져 1960년 초에 세상에 나왔다. 그 해 2월에 차트에 올라 마침내 40위 안에 20주 동안 상승을 기록하였다. 갑자기 브라더스포는 자라나는 포크 리바이벌 현장의 두드러진 2인자로 여겨졌다. 이것은 당시 각광을 받으며 전 아메리카를 돌며 콘서트을 벌이던 킹스턴트리오에게만 적용되던 것이었다. 브라더스포는 그해 겨울 그들의 데뷔 앨범을 내놓았고 전국에서 탑 20위에 들었다.

세 번째 싱글, "My Tani"는 하와이풍의 포크팝으로 봄에 발표되어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았다. 그러나 그들의 네 번째 싱글 "The Green leaves of Summer"는 그들을 유명하게 만들었다.
이노래의 브라더스포 버전은 존웨인의 영화 알라모에서 따왔는데 사운드트랙의 소유권은 콜럼비아에 있었다. 비록 차트에는 낮은 등급으로 매겨졌지만 1961년 아카데미 시상식 방송에서 오스카 노미네이트 송으로써 공연할수 있었다. "The Green Leaves of Summer"는 싱글로선 유일한 평작이었으나 그들의 두번째 앨범 BMOC(Best Music on/Off Campus)는 1961년에 발매되어 탑텐에 들었다. 이 앨범들은 싱글들보다 더 다양한 사운드와 매우 다른점을 드러내 보인다.

두 장 모두 처음의 두개의 긴 연주들은 특별하고 폭넓은 다양한 무드와 포크의 맥안에서 사운드를 잘 고안해 들려준다.
"Greenfields" 나 "The Green Leaves Of Summer"는 각각의 상박의 비트속에 균형을 이룬 활기차고, 영적인 노래들로 "Hard Travellin"이나 "I Am a Rovin' Gambler"와 같은 음악들이라 할수 있다. 팬들은 이 엘피를 구입하므로서 진정한 가치를 얻을 수 있고 브라더스포의 콘서트 청중들을 이 앨범들은 만들어냈다.

이때까지 브라더스포는 연간 300회의 풀타임 콘서트 스케줄을 유지해 오고 있었다.일본에도 갔었고 물론 팻 분 체비 쇼케이스나 미치 밀러 싱얼롱 (밀러는 콜러비아에서 아티스트와 레파토리 분과의 책임자였다), 에드 설리번 쇼같은 텔레비전 버라이어티 쇼에도 나왔다. 1961년 브라더스포의 노래책이 나왔는데 전통적 가치를 담고 대부분 호머 스니치나 스튜어트 것츠에 의해서 (노랫말이) 새로운 단어들로 개조되었다. 밥 플릭의 새로운 서정노래들과 함께 "Froggy Went a Courtin" 같은 전통적인 노래를 기초로 저변에 깐 싱글 “프로그”로 브라더스포는 차트에 올랐는데, 이 노래는 AM라디오에서 흘러나와 1961년 사월에 32위를 그들에게 안겨주었다. 그리고 1962년 초기 탑100중에서 중간에 오른 “블루 워터 라인”이 있다.

이 그룹의 콘서트는 코메디와 음악이 혼합되어져 매우 매력적인 것으로 판명이 나면서 1년새 2장의 라이브 앨범이 발매되었던 것이다. 브라더스 포는 1963년에 매우 유명해 졌는데 그때 그들은 ABC방송국의 시리즈물 Hootenanny의 주제곡 "Hootenanny Saturday night"을 녹음하였다. 이 노래 자체가 중요한 성과를 거둔 것은 아니지만 이 그룹이 매주 주요 텔레비전 방송에 포크뮤직으로 노출되도록 해주었다. 이 시리즈는 1963년 4월 데뷔이래 열성팬을 확보케 했다. 비록 매우 정치적인 베트남 포크 아티스트인 펫 시거가 출연하길 거부하며 이 시리즈가 18개동안 존속
되는 동안 논란을 불러왔지만. 이 논쟁은 포크음악사에서 하찮게 보이지만 곧 이어 음악사뿐 아니라 미국사회에서 갑자기 닥쳐올 포크음악 부재의 힌트를 암시한다.


킹스턴트리오, 라임라이터, 하이웨이맨, 채드미첼트리오 같은 작은 그룹들 또 뉴 크리스티 민스트렐스, 세렌디퍼티 싱거스 같은 큰 포크 밴드들과 함께 브라더스포는 1963년 많은 청중앞에 섰다. 비록 후트내니가 아직 방송되고 있고 이들 그룹들은 여러 지역에서 계약 공연을 했지만 변화는 그들을 둘러싸며 다가오고 있었다. 밥 딜런의 두번째 앨범 'Freewheeling' 이 그 해 콜롬비아 레코드에서 발매되었다. 원곡들은 시민의 권리나 핵 박멸의 위협 같은 이슈를 다루었는데 실질적으로 이 세대들에게 분노와 벌거벗은 메시지로 전투에 임할 것을 명하는 것이었다. 이 노래들은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능동적인 포크 청취자들에게 낙인과 같은 동기 부여를 하며 들려지기 시작하였다.

'Freewheeling'과 그 뒤를 이은 'The Times They Are A-Changin'...이 두개 앨범이 나타난 시점은 몇몇의 대학생들이 이러한 사회적 이슈에 주목할뿐 아니라 군대에 가서 그들의 생애중 2년이라는 시간을 허비할 만큼 그들이 정부에 빚진 것이 무엇인지 의문 제기를 하고 있던 때였다. 딜런의 즉각적인 영향은 포크음악사회에서 일게되는 점진적 변화의 예고였다.

1963년 여름(마틴 루터 킹 목사의 "I Have Dream" 연설로 최고점에 달한 시점에서) 시민권리를 위한 워싱턴 행진에서 "Blowin' in the Wind" 라는 그의 노래과 함께 이 히트 싱글은 피터, 폴, 메리에 의해 성취되었다. 포크음악은 안전지대, 즉 비정치적 성향으로부터 급작스레 튀어나오게 된듯했다. 뉴 크리스티 민스트렐스은는 정치성에서 떨어지려 하였으나 그들의 라이벌 밴드 세렌디피디 싱거스는 1964년 이 심각하고 이슈화한 운동을 "Freedom's Star" 같은 노래에 담아 그들의 첫번째 앨범으로 데뷔하였다.

포크음악에로의 밥 딜런의 접근은 논쟁될만한데 특히 그의 거친 쪼개짐, 우디 거스리가 영향을 준 외적 인격은 브라더스포의 것처럼 인공적이고 낭만화한 비트이지만 간단하게 조준되어 청중들에게 다른 기대를 심어주었다. 1964년 초에 비틀즈의 상륙과 이 두가지 접근의 여지가 분명히 있었다. 갑자기 영국으로부터 불어온 거대한 전자 사운드는 (비틀즈를 말함) 라디오 주파수를 점령하고 레코딩회사 대표들을 관심을 끌었다. 어쿠스틱 기타, 밴조 그리고 밴조와는 완전히 다른 전자 악기들을 들은 틴에이저들은 열광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의 학생청취자들은 포크송이 아니라 이러한 확대된 전자음향을 듣기를 원했다. 만약 그들이 포크음악을 들었다면 음악 어딘가에 섞여서 들어간 심각한 정치적 관련 사항으로 인지된 확실한 음악을 듣기를 원했다. 1964년 끝무렵, 브라더스포와 대부분의 그들의 포크밴드 동료들은 그들의 젊은 청취자 대부분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제공되던 라디오 스테이션에서도 제외되고 있었고 밥 딜런이 초래한 보다 동기부여되고, 시끄럽고, 성난 청중들이 포크음악 테두리에서 이들을 소외시키고 있었다. 1965년 딜런이 갑자기 전자 악기로 그의 음악을 융화시켰을 때 그는 대다수의 포크음악 청취자들을 휩쓸어가 버렸다.

브라더스포는 결코 그들의 음악에서도 또 그들 자신도 정치적인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목적은 엔터테인먼트 (오락)였고 어떠한 주의 주장으로 청중을 끌거나 새로운 환경에서 경쟁을 하는 것이 아니였다. 1964년 막바지에 브라더스포의 음악은 레터맨과 페리 코모와 함께 듣기 쉬운 음악으로 격하되었다. 운좋게도 콜럼비아는 존중받는 소수의 레코딩 회사였고 '빅 포크 힛트'와 '모어 빅 포크 힛트'가 각각 1963년과 1964년에 발매되었다. 브라더스포는 "Try to Remember"를 그들 버전으로 방송에서 노래하였고 이 노래는 그들의 다음 LP판의 타이틀이 되었다.

1966년 그들은 앨범 어 비틀즈 송북을 녹음했는데 이것은 영국의 음악적 침략이 가져온 영국(비틀즈) 음악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If I Fell"을 가장한 채 듣기 쉬운 음악의 차트에서 히트를 기록하였다. 브라더스포는 계속적으로 포크음악을 하였고 미국 호텔들과 성인들에게 제공되던 여러 장소들에서 성인들이 원하는 정치적 투쟁이나 항의, 전기적 음악을 배제한 음악들을 들려주고 해외에서는 미국사람에 의해 연주되는 순수 미국적 포크음악을 듣기를 원하는 주의주장을 하지 않는 청중들앞에 섰다.

1960년대 중반에서 후반에 그들은 콘서트를 개척하고 일본에서는 레코드를 팔 수 있었다. 이것은 그들이 다음 10년을 버틸 힘을 주었다. 1967년 콜럼비아의 앨범 "A New Word's Record" 오리지날 멤버로 구성된 마지막 작품이었다. 1969년 아들이 죽음에 따라 초기 멤버 마이크 커클랜드는 떠났고 그의 자리는 마크 피어슨이 교체되었다. 그도 워싱턴대학의 동창으로 그는 밴조나 12줄 기타뿐 아니라 피아노도 그들의 사운드에 가미시켰다. 1969년 "Let's Get Together"의 발매와 함께 이 그룹과 콜럼비아의 계약은 끝이 났고 1970년 그들은 한장의 LP를 위해서 팬터지 레코딩으로 자리를 옮겼다.

다음 10년동안 그들 신상에 보다 많은 변화가 온걸까?
피어슨은 2년후에 떠났고 밥 하워스가 그 자리를 대체했으며 그는 18년동안, 피어슨이 다시 돌아와 그의 자리를 대체하기 전까지 이 그룹을 지켰다. 밥 플릭은 1970년대에 3년간 그룹을 떠났고 그자리에 톰 코에가 들어왔다. 코에는 이 그룹에 전자 베이스 음향을 들여왔다. 초기 멤버 딕 포울리는 1990년까지 활동했는데, 그 후 테리 라우버는 31년만에 그의 자리를 대체했다. 이 모든 세월동안 그리고 21세기 초에 들어서 까지 브라더스포는 그들의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들의 음반 판매는 1970년대에 잔인하게도 바닥까지 추락했지만 그들에겐 직업적으로 일할수 있도록 항상 미국 전역에 걸친 리조트 호텔에 설 기회와 외국 무대에 설 기회가 있었다. 마치 킹스턴 트리오가 계속적으로 활동하며 간헐적으로 레코딩을 했듯이 말이다.

1990년에 들어서 브라더스포는 포크 연대 표제를 위한 레코딩을 다시 시작했다. 일본에서 발매된 이 훌륭한 라이브 앨범은 콜럼비아 레코드에서 제작한 그들의 초기 음악 대부분을 재생해서 CD에 담은 것으로 수집가들의 선택사항이었고 수집할 만한 음악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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