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미노 데 산티아고 (산티아고 가는길)

2024. 9. 9. 12:42꿈속의까미노순례길

함박웃음방/자유게시판

2018-07-03 17:58:19


까미노 데 산티아고(산티아고 가는 길)

산티아고 가는 길(야고보의 길)은 스페인 북부지역을 가로질러,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있는 웅장한 대성당으로 향하는 중세시대 순례 길을 따라 서쪽으로 천천히 걷는 길이다. 10세기의 순례자들은 대성당의 은상자에 담겨있는 성 야고보의 유골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강도나 늑대들의 위험을 감수했다. 고대의 켈트족들도 서쪽으로 태양이 지는 곳 그리고 피니테라의 Ara Solis 태양신전을 향해 이 길을 갔다.

산티아고(성 야고보 - 예수님의 12제자 중 큰 야고보, 야고보가 둘 있었음, 영어로는 St. James)는 예수의 12제자중의 한 명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뒤, 그는 유다를 떠나 이베리아 반도 동쪽 끝까지 선교여행을 떠난다. 스페인 북쪽의 갈리시아 지방까지 가서 전도를 했지만 원주민들에게 환영받지는 못했고 유다로 돌아가기 전까지 7명만 개종시킬 수 있었다.

그 후 팔레스타인 지방으로 돌아간 성 야고보는 유다의 헤롯왕에 의해 기원후 44년에 예루살렘에서 처형되어 순교한다. 그는 예수의 제자 중 첫 번째 순교자가 된다. 성 야고보의 시체를 그의 두 제자들이 사공도, 닻도, 노도 없이 돌배에 태워 바다로 보냈는데, 놀랍게도 그 배는 약 일주일정도 후, 그의 선교지였던 이베리아 반도 끝 갈리시아 해변의 파드론에 도착하게 된다. 그의 시체는 야고보의 제자들에 의해 내륙으로 20여km 떨어진 ‘리브레돈’이라는 산에 묻히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무덤은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잊혀졌다. 특히 5세기 서고트족과 8세기 이슬람교도들의 침입과 전란을 겪으면서 그의 무덤은 소재조차 알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야고보의 무덤은 그 후 수세기동안 잊혀졌고, 스페인의 기독교화는 서서히 진행되어 갔다. 기독교화는 8세기에 뜻밖의 사건으로 끝나게 된다. 북아프리카에서 건너온 이슬람 군대가 대부분의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하고 프랑스로 몰려가는 중이었다. 아직 약간의 기독교도가 스페인의 북서쪽에 남아 있기는 했다.

813년에 호기심 많은 기독교 수행자인 수도승 [페라요]가 별빛을 따라 간 들판에서 한 구의 유골을 발견하게 되고, 영주와 왕으로부터 그 유골이 성 야고보라는 사실이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

Iria Flavia의 주교는 그 발견을 축복하였다. 몇 년 뒤, Asturias의 왕인 알폰소 2세가 이곳을 방문하고, 성당을 건축한 뒤 성 야고보를 스페인의 수호성인으로 선언했다. 이곳 지명이 라틴어인 campus stella(별들의 들판)라고 불리다가 후에 콤포스텔라로 굳어지게 되고, 야고보의 스페인어 이름인 산티아고를 붙여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Santiago de Compostella] 새로운 성지의 지명이 되었다. 이 기적적인 사건은 유럽 전역으로 일파만파 전해졌다.

성 야고보의 묘가 발견된 9세기는 이슬람교도에 대항하는 레콘키스타 운동이 막 시작된 시기였으며, 강대한 적과 싸우기 위한 정신적 지주가 필요하던 때였다. 그리스도교도의 영토에서 발견된 산티아고의 묘는 이 정신적 지주에 딱 어울리는 조건을 지녀, 역대 아스투리아스 왕에 의해 묘는 보호되고 성지와 순례의 길이 갖추어졌다. 이 사건은 유럽 그리스도교 사회에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무덤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9세기에 기독교 당국은 이슬람 침략에 대항하는 방법의 하나로 또는 북부 스페인 사람들이 이교도로 개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산티아고까지의 순례를 장려했다. 지역 교회 종사자들도 순례자들이 사용할 여행자금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들에 의한 순례지로서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띄우기는 중세 마케팅의 하나였다.

순례자들의 숫자는 이 후 수백 년 동안 계속 증가했다. (특히 예루살렘을 터키가 점령하면서 그곳으로의 순례가 위험하게 되었다) 프랑스인들이 정말로 적극적이었다. 그래서 피레네 산맥의 생장피드포르에서부터 스페인을 관통해 가는 길을 Camino france (프랑스 루트)라고 부른다.

결국 콤포스텔라는 12세기에 전성기를 누리며, 로마 중세 때부터 예루살렘과 로마와 나란히 그리스도교의 3대 성지 중 하나로 손꼽혔다.(특히 1189년 교황 아렉산더3세가 성년(Holy Year : 산띠아고 성인의 축일인 7월 25일이 일요일 인 해)에 순례하는 사람은 사후 연옥(Purgatory)기간을 전부 면제해 주고 평년에 순례한 사람은 연옥기간의 반을 면제 해 준다는 칙령을 내림으로서 더욱 성행) 12세기에는 1년에 50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산티아고 순례 길을 나섰으며, 15세기까지 순례의 길은 번성했고, 길을 따라 수많은 유적들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유적지보다 훨씬 다양하고 놀라운 전설들이 탄생했다.

기독교도의 수복이 완료된 후 순례자 숫자는 줄어들었고 17세기 이태리 순례자인 도미니코가 안내책자를 집필할 때쯤에는 상당히 많이 줄었다. 18세기와 19세기에 거쳐 계속해서 서서히 순례자들이 줄어들었고 20세기 들어서는 극소수의 스페인 사람들만이 순례를 했다.

오늘날의 카미노

순례자들이 줄었지만, 완전히 잊혀진 것은 아니었다. 산티아고(성 야고보)는 여전히 스페인의 수호성인이었고, 지역 주민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마을 주변 순례 길을 걸을 수 있었다. 1960년도에 오 세브레이오의 교구장이었던 돈 에리아스가 "El Camino de Santiago"라는 최초의 근대적인 가이드북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1982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교황으로서는 처음으로 방문하게 된 것을 계기로 카미노의 인기가 높이 치솟기 시작했다. 1987년에 EU는 카미노를 유럽의 문화유적으로 지정했다. 유네스코는 1993년에 카미노를 세계문화유산에 추가했다.

산티아고에 이르는 길은 여러 루트가 있다 메인 루트만 소개하면 레반테(Levante) 길, 라 라나(La Lana) 길, 마드리드(Madrid) 길, 에브로(Ebro) 길, 노르테(Norte) 길, 인글레시 마리티모(Inglesy Maritimo) 길, 플라타(Plata) 길, 프란세스(Frances) 길 등이다. 그 중에서 순례자들이 가장 많이 걷는 대표적인 루트는 [카미노 프란세스]인데, 프랑스의 남부 생장피드포르에서 아름답기로 소문난 피레네 산맥을 넘어 산티아고까지 가는 길로서 대략 800km의 여정이다. 보통의 사람들은 약 30일이 소요되며, 산티아고에서 반도의 서쪽 끝, 땅 끝 마을이라 불리는 피네스테레(피스테라)까지는 약 90여 km를 더 걸어야 한다.

종교적인 동기로 걷는 사람이 많지만, 오히려 문화적, 정신적인 이유에서 걷는 사람도 있고, 또 스포츠나 레저 개념으로 걷는 사람이 더 많은 듯하다. 전 세계에서 모여든 순례자들이 하루에 15km ~ 25km정도를 쉬며, 걸으며 글로벌 시대를 실감하듯 세계 각국에서 온 다양한 순례자들을 만날 수 있다.

유럽에 사는 순례자들 중에는 자신의 집에서부터 걷기 시작해 산티아고로 가는 사람도 있고, 다시 자신의 집까지 걸어서 되돌아가는 사람도 있다. 해마다 구간을 쪼개서 몇 년에 걸쳐 순례를 완성하기도 하고, 또 몇 번씩 반복해서 순례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제 산티아고 가는 길은 스페인의 명소를 넘어서 유럽문화의 핵심 아니 세계 순례자들의 명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산티아고까지의 마지막 100km 이상을 걸은 순례자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있는 순례 사무국에서 콤포스텔라 (순례 완료증서)를 신청할 수 있다. 순례자 숫자는 성스러운 해에 절정에 이른다. 2004년에 18만의 순례자들이 산티아고에 도착했다. 다음 성스러운 해에는 더 많은 순례자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해에도 약 7만 명의 사람들이 카미노를 걷는다. 이중 절반이상이 스페인 사람이고 나머지는 유럽 여러 나라 사람들이다.

야고보(JACOB)는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 등에서 많이 알려져 있다. 영어식 발음으로 ‘제임스’ 혹은 ‘지미’, 불란서어식 발음이 ‘쟈크’, 독일어식 발음이 ‘야코프’, 스페인어식 발음이 ‘이야고’인데 그 앞에 성자(聖 San, Saint) 호칭이 붙어 산티아고(Santiago)가 된 것이다. 전 세계 기독교권 국가에서 산티아고라는 도시가 아주 많이 있다.

많은 순례자들이 산티아고(성 야고보)가 그랬던 것처럼 기다란 지팡이를 사용하고, 조개껍질을 배낭에 매달거나 목에 건다. 갈리시아 해변에는 조개껍질이 많았고, 중세의 순례자들은 종종 기념품으로 조개껍질을 여기서 집어 갔다. 조개껍질 모양은 카미노 길의 거의 모든 곳에서 볼 수 있다. (순례길에 있는 교회나 주택들) 몇몇 순례자의 노래가 지금까지 불리기도 한다. 또한 순례자들에게 전진하라고 격려하는 벽의 낙서 "!Ulreial!"도 살아남았다.

순례자들 사이에도 약간 이상한 풍토가 보이기도 한다. 많은 도보순례자들은 자전거 순례자들을 한 단계 낮춰 보고, 카페인이 제거된 순례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몇몇 알베르게에서는 자전거 순례자를 받아들이지 않거나 또는 저녁까지 기다리도록 요구하기도 한다. 도보순례자 또는 자전거 순례자들은 또한 종종 자동차나 오토바이를 이용하는 순례자들은 순례자가 아닌 관광객으로 부르기도 한다. 같은 도보순례자들 중에서도 스틱이나 지팡이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것이야 말로 완벽한 순례라고 말하며, 오직 자기 두 발과 의지로 걸었다고 자부하면서 어깨를 으쓱거리기도 한다. 말이나 노새를 타는 순례자들은 요즘 매우 드물다 (전체 순례자 중 1% 이하)하지만 순례는 어디까지나 순례 그 자체일 뿐이다.

카미노는 스페인의 다양한 지역과 다양한 상태의 길을 지난다, 좁은 길에서 넓은 길 또는 포장된 길. 대부분의 길은 걷기에 적당하고, 울퉁불퉁한 길도 상당히 많다. 또 몇몇 돌길이나 비포장길에서는 비온 뒤에 미끄러워질 수 있다. 도로 옆길을 지나는 것은 그리 편하지 않다. 갓길이 좁은 곳 또는 교통량이 많은 곳 등이 있기 때문에 매우 위험하기도 하다. 도로를 걸을 때는 여러 명이서 길의 좌측으로 걸어야 한다.(달려오는 차를 볼 수 있도록!)

길 표지는 아주 잘 되어 있어서 길을 잃어버릴 경우는 거의 없다. 모든 교차로에 조개껍데기나 노란 화살표로 표시가 되어 있다. 길옆, 나무 또는 길가 주택 등에. 길을 잃었을 때는 지역 주민들이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도시를 지나면서 종종 어려움에 부닥치기도 한다. 건물을 짓는 등의 건축공사 도중에 노란화살표나 순례길이 사라져버리기도 한다. '메세타' 지역에서는 그늘이 거의 없는 꽤 먼 길을 가야한다. 평지에서 부는 바람은 강하기 때문에 순례자를 금방 지치게 만든다. 때문에 순례자들은 잘 먹고 잘 마셔야 한다. 꼭 더운 날씨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오늘날의 현대 사회는 초고속 시대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이든지 빨리 빨리, 남보다 뒤쳐지면 경쟁에서 탈락하는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시대이다. 카미노는 이런 초고속 문명 시대에 문명의 이기를 거부하고 한 시간에 4km라는 인간의 [자연 속도]로 목표를 향해 가는 것은 현대 고속 문명사회에 던지는 [인간 자각]의 도전장일 수도 있다.

[산티아고 가는 길]은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는 성공보다는 목적지까지의 과정을 사랑하는 행복이라고 한다.

1. 순례자의 표식

카미노를 걷는 순례자들을 상징하는 것은 망토와 지팡이, 호리병 그리고 조개껍데기(가리비)이다.

물병으로 쓰는 호리병과 걸음을 도와주는 지팡이, 비와 추위를 막아주는 망토와 함께 조개껍데기는 산티아고를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상징물이다.

전설에 의하면 한 순례자가 길을 나섰다가 바다에 빠졌다. 그 절대 절명의 위기상황에서 그는 산티아고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고, 그런 그에게 커다란 조개껍데기가 나타나 그를 무사히 육지까지 태워다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순례자들은 산티아고까지 자신의 여정이 무사하길 기원하며 조개껍데기를 지니고 다녔고, 오늘날의 순례자들도 배낭에 하나씩 매달고 다니는 것을 잊지 않는다. 순례를 무사히 마치고 피스테라에 도착하면 신발이나 옷을 태우는 것과 함께 이 조개껍데기를 바다에 던져 감사를 뜻한다고도 한다.

============================================================ 디오님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