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에바깐시온 (칠레의 저항적 노래운동)

2024. 5. 23. 09:08음악창고

음악창고

2012-08-14 21:59:18


 
 

★ 누에바깐시온 (칠레의 저항적 노래운동)


Nueva Cancion(누에바 깐시온)-새로운 노래운동-은 1970년대 남미 전역에서 일어났던 민족운동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는데, 그 성격은 민속 자료의 수집과 연구에서 비롯되어, 안데스 전통 민속음악을 발굴하고 그것의 현대적인 재해석을 지향하는 운동의 성격을 띠고 출발했다. 본격적인 누에바 깐시온 운동의 시발점은 1970년 칠레의 아옌데 정권의 출범 전후로 볼 수 있고, 더 근원적인 동력은 쿠바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선거운동에 누에바 깐씨온 음악인들이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50년대 후반부터 두각을 나타낸 누에바 깐시온의 어머니 비올레따 빠라로부터 영향받은 빅토르 하라와 인티-이이마니 (Inti Illimani : 께추아어로 "이이마니山의 태양"), 낄라파윤(Quilapayun : 마뿌체어로 "세 명의 수염을 기른 사람"이란 뜻), 야뿌(Illapu : 께추아어로 "천둥·번개") 등의 그룹들이 그들이었다. 또한 같은 대륙의 음악인들도 이 새로운 노래운동에 참여한다. 우루과이의 다니엘 비에리티와 알프레드 시타로사, 페루의 왈츠의 여왕이라 일컬어진 차부가 그란다,
멕시코의 안파로 오초아와 로스 르크로리스타스, 쿠바의 실비오 로드리게스 등이 그들이다.

제국주의적 착취의 근절과 독점타파, 그리고 농지개혁 등은 아옌데 정권이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그리하여 구리광산, 철강 및 석탄 산업 , 은행 등 주요 산업을 전면 국유화하고 임금인상을 추진한다 . 특히 해외자본의 외국회사들을 국유화함으로써 국내외적으로 커다란 반감을 산다. 미국의 통신회사 ITT(International Telephone & Telegram)의 국유화 조치는 칠레의 사회주의화에 대한 미국의 우려를 드러내는 계기가 된다.

미국 국가안보회의(당시 의장: 헨리 키신저 안보담당특별보좌관)의 칠레에 대한 물밑 작전이 감행된다. 즉, 비축 구리를 방출시켜 구리의 국제시장가를 15.7% 하락시킴으로써 칠레로 외화유입이 차단되고, 계속해서 미국은 대외차관통로를 봉쇄함과 동시에 칠레의 미국산제품수입이 격감된다. 다른 한편으로 미국은 반(反)인민연합세력과 군부를 지원함으로써 아옌데의 지지기반을 약화시킬 수 있었다.

미국의 경제봉쇄조치로 1973년 1월에 인플레이션 150%에 달하는 등 경제적 고통이 심화되었다.
4월 광산노동자 파업, 의사·법률가·건축가 등 일련의 중산층이 반(反) 아옌데 세력으로 형성 됐으며, 인민연합 내부에서 개혁의 혼선이 빚어지는 등 아옌데의 점진적 개혁노선이 한계를 노정한다. 결국 CIA가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마련된 셈이었다.

1973년 3월 인민연합이 의회선거에서 과반수 지지를 획득하게 됨으로써 아옌데의 신임투표를 계획한다. 9월 11일 신임투표계획 발표예정일이었던 그날 아침, 미국의 지원을 받은 육·해·공 3군, 경찰대의 연합쿠데타가 발생하고 군사평의회는 의장에 피노체트 육군총사령관을 선출한다.

한편 아옌데 대통령은 자신의 가족들에게 대통령궁을 떠날 것을 명령하고, 그의 딸들은 강제로 대통령궁 밖으로 나오게 된다. 경찰이 쿠데타 세력에 가세함으로써 모네다 궁전을 지키던 방위군은 방위군 사령관의 철수명령에 따라 대부분 대통령궁을 빠져나갔다. 아옌데 자신은 남은 몇 명의 경호원들과 쿠데타군에 맞서 모네다 궁전에서 끝까지 자동소총을 들고 항전하다 타계하였다.
(당시 군부는 자살이라고 발표했다.)

"내가 이제 박해받게 될 모든 사람들을 향해 말하는 것은, 여러분들에게 내가 물러서지 않을 것임을 이야기하기 위한 것입니다. 나는 민중의 충실한 마음에 대해 내 생명으로 보답할 것입니다.
나는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우리 나라의 운명과 그 운명에 믿음을 갖고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이 승리를 거둘 것이고, 곧 큰 가로수 길들이 다시 개방되어 시민들이 걸어 다니게 될 것이고 그리하여 보다 나은 사회가 건설될 것입니다. 민중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것이 나의 마지막 말입니다. 나의 희생이 헛되지 않을 것임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


※ ↑ 윗글은『영혼의 집 2』p.194 에서 옮김



"누군가 이 암울하고 쓰라린 순간을 극복해내리라 믿습니다. 머지않아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보다 나은 사회를 향해 위대한 길을 열 것이라고 여러분과 함께 믿습니다." -- 쿠데타군에 포위된 채 행한 아옌데의 마지막 방송연설 중

곧이어 쿠데타 이후 아옌데에게 협력했거나 인민연합과 관계된 모든 사람들에게 국외 강제추방, 구금, 고문, 사형집행 등 가혹한 탄압이 자행되며, 누에바 깐씨온 운동에 참여한 음악인들도 마찬가지로 시련을 겪는다. 군부 쿠데타로 자국민뿐만 아니라 해외 음악인들도 본국으로부터 체포, 감금, 즉결 사형, 해외 강제추방 등 사회주의 이념을 뿌리 뽑으려는 메카시즘은 철저하게 실행된다. 키에타노 부아르조와 시코 바르키는 국외 망명, 우루과이의 아니발 산파조는 행방불명되었고 1972년 자신의 노래로 구금된 다니엘 비에리티도 때를 맞춰 이 시절에 추방된다.

1974년 12월에 피노체트는 대통령으로 임명되고 즉시 계엄령선포을 선포하고 정치활동을 금지하여 의회를 마비시킨다. 이후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수용하여 시장경제로의 전환, 500%에 달하던 인플레이션을 1976년 180%로, 1982년 10%로 낮추었으나 외국인 투자와 산업기반이 다국적 기업소유로 실질임금수준은 정체되었고 사회복지 혜택은 개인적 부담으로 떠넘겨졌다.

"아옌데 정권시절엔 돈이 있어도 물건을 살 수가 없었다. 그러나 피노체트 통치하에서는 사고 싶은 물건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데 주머니가 비어있다." -- 칠레 한 언론인 (『콜롬부스에서 후지모리까지』송기도·강준만 저 , 개마고원 p.210)

1989년 12월 대선 17개 야당통합후보 파트리시오 아일윈이 당선, 헌법이 개정되고 민정이 복귀됨으로써 형식적으로나마 군부독재가 마감되었다. 1994년 3월부터 집권한 에두아르도 프레이 루이스 타글레(Eduardo Frei Ruiz Tagle) 대통령이 집권하고 있다.

2000년 1월 16일 실시된 대선 결선 투표에서 집권 중도좌파 연합 후보인 사회주의자 리카르도 라고스(61)가 51.31%를 얻어, 보수우파 후보 호아킨 라빈(46세, 48.7%)을 누르고 당선됐다.
27년만에 아옌데가 부활한 것이다. 하지만 정책기조는 '신자유주의 정책'이 유지되는 중도좌파이다. 라고스는 오는 3월11일 취임, 6년 임기를 시작한다.

한편 최근 피노체트에 관한 외신보도가 눈길을 끌었다. 피노체트는 1998년 10월에 체포돼 영국내 가택연금 조치가 취해졌으나 건강문제로 석방될 것이라고 한다. 피노체트의 석방과 칠레본국 송환을 둘러싸고 지지와 반대가 양분되는데, 영국 전 수상이었던 보수우익 마가렛 대처는 환영의사를 표명했다. 대처의 지지 이유는 지난1983년 아르헨티나와의 대 포크랜드전에서 칠레 군부정권의 지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반면 <국제사면위원회>, <국제인권연맹>, <고문 희생자 진료를 위한 의료재단>, <칠레인 유가족협회>, <5월광장 어머니회>,

피노체트를 반인륜 혐의로 기소한 스페인 후안 가르손 판사, 벨기에 정부 등은 당연히 반발하고 있다.
만일 피노체트가 석방된다면 벨기에 정부는 그 조치에 대하여 국제적 압력을 행사할 것이며, 본국 칠레의 국민 또한 학살자 피노체트에 대해 사법당국의 엄중한 조치가 취해지도록 요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피노체트의 사법처리를 강구하고 있는 국가는 월드뮤직이 발달했다는 점이다. 프랑스는 월드뮤직의 최고시장이고 벨기에 또한 안데스 민속음악인들이 활동하는 무대이다. 과거 라틴아메리카를 지배했던 스페인, 이 나라의 플라멩꼬는 세계적 문화상품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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