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초대 대통령 아들 이인수 박사

2024. 5. 19. 14:09역사와문화산책

2019-01-15 15:54:57


 

“건국 역사 없는 대한민국, 열등국민 만든다”


“대한민국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면서도 제 나라의 건국 역사를 모르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건국 6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건국역사를 부정하는 세력들의 패배주의가 우리 한국민들을 열등민족으로 살게 만드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지난 14일 서울 종로구 이화동 낙산 자락에 위치, 대학로의 분주함과는 다르게 쏟아지는 봄 햇살 속 이화장(대한민국 건국대통령 우남 이승만 박사 기념관)의 오후는 한가로웠다. 그러나 대한민국 초대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거처였던 이화장을 지키고 있는 아들 이인수 박사(77)의 마음은 그리 한가롭지 못한 듯 했다. 건국을 이룬지 올해로 60주년을 맞이했지만 건국의 역사가 떳떳하게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좌우 이념대결의 희생양으로 전락한 오늘의 현실을 보는 것이 가슴 아프기 때문이다.
이화장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한눈에 들어오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동상 옆으로 초대 내각을 구상한 ‘조각당’이 보인다. 이곳은 한국전쟁 이후 열강들의 시선 속에서 나라를 세우려는 몸부림이 치열하게 진행됐던 역사의 현장이다. 본채는 이승만 박사 내외가 살던 곳이고, 조각당은 1948년 7월 20일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 박사가 이곳에 조각본부를 두고 초대 내각을 구상한 곳이다. 이처럼 건국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이화장은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 6호로 이인수 박사 내외가 정부의 보조 없이 손수 관리하고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정부에서 소정의 지원을 해 주어 안내 직원을 뒀는데 그것도 몇 년 전에 중단돼 관리를 위해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을 받고 있다. 건국의 역사를 담고 있는 이화장이 이처럼 찬밥신세인 이유가 무엇일까.
이인수 박사는 그것이 초대대통령인 이승만 박사에 대한 대우와 맞물린다고 했다. 이승만 박사에 대한 평가와 건국의 역사가 의도적으로 왜곡돼 왔다고 주장하는 이 박사는 “이승만을 금기하다보니 대한민국의 건국사가 없어지고 그가 크게 활약한 자유수호의 전쟁과 국가발전을 위한 업적도 매도되고 말았다. 교과서는 건국과 6·25 전쟁을 빼고 4·19로 대한민국의 역사가 시작된다”며 “반세기 동안 지속해 온 반 이승만 시대를 끝내고 건국역사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박사는 “이승만 하면 부정선거와 4·19 혁명만 앞세웠지 건국을 위해 이바지한 부분은 폄훼되고 의도적으로 가려져 왔다”면서 “이것이 국민교육으로 이어지면서 건국 역사를 제대로 알 수 없었고 국민 정체성의 위기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박사는 대한민국 건국 60년을 맞으면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명예회복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는 것에 주목했다.
이 박사는 1910년 망국으로부터 1948년 나라의 독립을 찾은 대한민국 건국이 있기까지 이승만 박사의 노력이 4·19로 인해 왜곡되고 폄훼되어 ‘천하의 악당’으로 매도되는 것은 가당치 않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반면 백범 김구 선생을 민족의 지도자로 추앙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지적했다.
이 박사는 한국전쟁 후 자유민주주의와 적화통일의 기로에 놓여 있던 가운데 “이승만 박사가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한국민족이 자유선거로 삶의 체제를 선택하고 주권을 회복하는 선거를 치르려 했던 것”과 달리 “백범을 비롯해 김규식, 양김은 이미 북에 김일성 정권이 세워지고 공산군이 조성된 실태를 보고 남한에 정부가 수립되어도 곧 북이 쳐내려올 것이니 대한민국을 건국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고 남한 단독 총선거를 반대했다”며 “백범이 북의 김일성을 만나 만든 4·30성명의 내용이 이에 대한 증거”라고 말했다.
이 박사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 대한민국을 세우려 했던 이승만 박사의 노력을 기독교인들이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버지는 굿 크리스찬이셨다”고 증거하는 이 박사는 양자로 입적되고 한 달 뒤에야 하와이에 망명 중이던 아버지 이승만 박사를 만날 수 있었는데 성경말씀을 그대로 삶에 실천하려 했던 그의 모습을 통해 “기독교가 얼마나 위대한 종교인 것을 알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이 박사는 “이승만 박사는 자신의 삶을 하나님이 이 땅에서 맡기신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나라 건설을 생각할 때도 이미 북한 정부가 수립된 상황에서 회의적인 시선들이 많았지만 ‘한편이 죽어가는 몸을 살아있는 편이라도 완전히 살려서 죽은 편을 살리기를 꾀해야 할 것’이라며 하나님의 뜻 앞에 두려움 없이 나아가셨다”고 말했다.
또 부인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집으로부터 경비를 받아 생활해야 했던 망명지에서도 늘 국민들의 안위를 걱정했던 이승만 박사는 임종을 맞으면서도 “심신이 쇠하여 하나님의 사명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민족을 맡기니 부디 축복 내리소서”라며 하나님께서 우리나라를 인도하실 것을 고대했다고 한다.
이승만 박사 내외가 살던 본채에는 이들의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물건들을 전시해 놓았는데 검소하다 못해 도무지 한 국가를 세우고 경영했던 대통령의 살림이라고 보기는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의 궁색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이에 대해 조혜자 여사는 “가난한 국민들 잘 살게 하려고 본인들 스스로 철저하게 아끼는 생활을 실천했다”며 “이게 크리스찬의 삶”이라고 말했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27년간 사용하고 물려준 냄비, 찌그러진 세숫대야를 보여주며 조 여사는 “이것 때문에 남들 세탁기 쓸 때 나는 손빨래를 해야 했다”며 시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냈다. 여기저기 기운 속옷과 각 국 주요 인물들에게 선물하기 위해 프란체스카 여사가 손수 만든 물건들에서도 절약정신은 짙게 묻어났다. 이승만 박사의 물건들 중 늘 몸에 지녔던 성경책에는 전국 주요 교회들의 예배시간이 깨알같이 적혀 있다. 어느 곳에서든 예배를 엄수하려는 노력을 엿볼 수 있다.
한시를 즐겼던 이승만 대통령이 아내를 위해 지은 시로 손수 부채를 꾸며 선물한 것을 이야기하자 이 박사는 “이승만 박사는 학식이 뛰어날 뿐 아니라 인격이 매우 풍부한 분이셨다”며 그 풍부함과 따뜻함으로 국민들을 사랑했다고 설명했다.
이 박사는 “건국 반세기를 넘어가는 가운데 이제는 정치인, 학자, 문학계 인물들이 정직하게 역사를 봐주기를 바란다”면서 이승만 대통령 복권운동이 힘을 얻게 되길 기대했다.
한편 건국 60주년을 맞아 이승만 박사가 일제 시대 교회의 핍박에 대해 쓴 〈한국교회 핍박〉을 연세대학교 신학부 서정인 교수가 고어체로 된 원서를 현대문체로 번역하고 각주를 달아 새롭게 발간, 오는 26일 오후 2시 이인수 박사와 조혜자 여사가 권사직분으로 섬기고 있는 정동제일감리교회(송기성 목사)에서 출판기념행사를 갖는다.
건국대통령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와 건국60년기념출판위원회가 주축이 되어 발간되는 이 책은 이승만 박사가 1913년에 저술한 것으로 ‘기독교 105인 사건’을 조명, 당시 일제의 압제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았던 기독교의 면면을 고찰했다.

김택용 목사/이승만 박사기념사업회 워싱턴지회 회장

학력에 있어서 일등 대통령 이승만 박사

세계 역대 지도자들 중에 우뚝 선 지도자

학력이 인격의 척도일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람의 교양과 인격을 형성하는데 학문의 비중은 무시할 수 없다. 나는 여기서,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를 생각해 본다. 학문적 배경만을 놓고 보자면 이 박사의 학력은 대한민국 역대 지도자는 물론, 전세계지도자들 중에서도 결코 손색이 없다.
이승만 박사는 일찍이 워싱턴 DC 소재 조지워싱턴대에서 학사학위, 명문 하버드대에서 석사, 그리고 프린스턴대에서 박사학위(1910년 35세 때)를 받았다. 이승만 박사에게 박사학위를 수여한 총장은 훗날 미국의 대통령을 역임한 Woodrow Wilson이다.
알다시피 프린스턴 대학교는 미국 최고의 명문대학이다. 내가 처음으로 프린스톤 대학교에 대해 눈을 뜬 것은 대학원을 수학하고 있을 때였다. 1961년부터 1963년, 4·19와 5·16 이후가지의 격동기에 나는 고려대학교 대학원 정치외교학과에서 수학하고 있었다. 당시 대학원에서는 김상엽, 함병춘, 윤천주, 오병헌, 민병기, 오병헌, 김영기, 윤주영, 조기준 교수 등 유명 교수들이 강의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조순승 박사의 국제정치학 강의는 학생들이 가장 선하는 강좌 중의 하나였다. 그분은 불과 수년 전 미국 디트로이트 소재 미시간주립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엘리트 학자로 그 신선함이 돋보였다.
하루는 조 교수가 자기의 유학 경험담의 한 토막을 들려주었다. 연세대학교에서 조교수를 역임하고 고려대학교 부교수로 부임한 그의 경험담은 수강생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컸다. 조 교수가 청운의 꿈을 안고 유학을 계획할 때, 처음부터 미시간 주립대를 마음에 품은 것은 아니었다. 그의 첫 번째 지망은 프린스턴대였다. 하지만 그의 노력과 희망과는 달리 결국 프린스턴으로부터 합격통지를 받지 못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미시간 주립대학에 지원, 합격하여 입학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조 교수는 물론 미시간 주립대학도 좋은 학교지만 프린스턴이야말로 정말 좋은 학교이며 그 당시까지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한국인은 단 한명이며, 그분이 바로 이승만 박사라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프린스턴대학에서 Ph. D. 학위를 받은 이승만 박사의 실력을 높이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강조했다.
45년 전의 학창시절을 더듬어보며 오늘도 나는 민족의 거인 이승만 박사를 다시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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