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택동의 문화대혁명

2024. 5. 19. 13:43역사와문화산책

2019-01-16 22: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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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택동의 비밀
1912년 청나라가 망한 후 중국은 오랜 내란상태에 들어갔다. 1920년대에 들어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와 모택동의 공산당 정부가 양대 세력이 되어 패권을 다투는 가운데 외적이 침입하였다. 일본이 1931년 만주를 점령한 것이다. 하지만, 모택동과 장개석은 외적 일본보다는 자기들끼리 싸우기에 바빴다. 장개석은 일본이 피부병이라면 모택동은 심장병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이 한마다 말로, 3자간의 관계를 알 수 있다. 중국을 얕본 일본은 1936년 드디어 만주 국경을 넘어 중국 본토로 침공하기 시작했다. 이른 바 국공합작이 이루어져, 공동전선을 폈지만, 이미 때는 늦어 일본은 중국 본토를 휩쓸었다. 그러나 여전히 대륙남서부의 농촌은 장개석의 남경정부, 북서부의 산악은 모택동의 연안정부의 세력권이었다.


중국을 완전 점령한다는 일이 여의치 않자, 일본은 관심을 태평양 쪽으로 돌려 미국(진주만)을 공격했다. 이래서 중국은 뜻하지 않은 또 하나의 세력(미국)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은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만을 국가로 승인한 터였다. 부패 무능한 국민당이 아니라, 공산당이지만 장래가 보이는 모택동과 손을 잡자는 주장이 있었지만, 이는 소수의견일 뿐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천문학적인 막대한 원조에도 불구하고 장개석의 국민당 군대는 지지부진 패퇴만 거듭하였다. 미국은 이런 형편없는 국민당 정부를 대 일본전의 파트너로 삼는 것이 너무 괴로웠다. 그래서 미국의 새로운 비군사 정보기관인 OSS가 나서서 비밀리에 모택동과 회동, 협력을 성사시켰다. 이것이 소위 1944년 6월의 "딕시사절단(Dixie Mission)"이다. 이래서 국민당으로 가던 전쟁물자가 공산당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이는 유고에서 미국이 티토를 지원한 것과 같은 양상이다. 정치적으로 파산 상태인 장개석 정권을 버리고, 공산당이지만 모택동과 손잡는 것이 당장 전쟁 수행에서나 장기적인 아시아 정책 면에서 미국에 이롭다는 설득력 있는 OSS의 주장에 따라 모택동과 루즈벨트의 만남으로까지 이어질 뻔했지만, 주변의 반대세력, 특히 국민당 정권과 친 국민당 계 미국 외교관들과 OSS와 밥그릇 싸움을 벌이던 미 해군정보조직, 그리고 미국 사회의 반공주의 여론에 밀려 사태는 반전되고 말았다.


미국에 배반당한 모택동은 종전 후 국민당을 대만으로 몰아내고 1949년 공산정권을 수립했다. 그리고 1년 후 한반도에서 미군과 전쟁을 벌였다. 이래서 미국에서는 "어찌하다가 미국이 중국을 잃었는가?" 라는 성토가 일어났다. 당시는 매카시즘이 지배하던 때라, "딕시사절단"에 참가했던 인사들이 공산당을 도와주었기 때문이라며 비난받은 끝에 대거 거세당했다. 하지만, 미국은 그 후, 세상이 자기들 혼자 주무르는 인형극장이 아니며, 중국은 미국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스스로 그렇게 되었을 뿐이라는 반성이 일어났고, 1972년에 들어 중-미 수교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2차대전으로 인해, 다시 말해 일본의 침공과 미국의 개입으로 인해 왜곡된 중국의 내정은 아직도 100% 종료된 것이 아니다. 대만의 "자유중국"이 모택동이 못다 해결한 유산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출처] [펌] 20세기 전쟁 비사 - 모택동의 비밀|작성자 난이꺼












한국전에서 전사한 모택동의 아들 모안영
모안영은 모택동의 두번째 처인 양개혜와의 사이에서 낳은 3형제 중 맏이다.
그는 1922년 후난 성 창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모택동은 모안영이 여섯살 되던 해 1927년 추수봉기 이후에 도주하면서 가족과 헤어졌는데 모안영의 어머니 양개혜는 1930년 국민당 군벌이었던, 하건에 의해 공산당 잔당으로 몰려 11월 14일 처형당했다. 전향을 강요당하며 모진 고문을 당하고 처형당한 양개혜는 모택동이 장사사범중학교에 다닐 때 가장 존경했던 스승 양창제의 딸이었다. 결국 양개혜를 전향시키는데 실패한 국민당은 마오안잉에게 그의 어머니 양개혜의 처형 장면을 강제로 지켜보게 한다. 아들 마오안잉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의 어머니 양카이휘는 30세의 젊은 나이로 그렇게 처형당했다.
그해 석방이 된 모안영은 국민당의 추적을 피해 상하이로 도주했다가 그 곳에서 공산당 지하 조직의 보호를 받았다. 그러나 그 비밀 조직이 발각되면서, 그들 형제는 동건오라는 가난한 공산당원에게 맡겨지게 된다. 1931년 거지나 다름없는 생활을 해야 했던 터라, 어린 4살짜리 막내 모안룡은 병사하고, 둘째인 모안청은 거리에서 구타를 당해 정신이상자가 되었다.










1936년 모안영은 파리로 건너가 다시 모스크바로 갔고 그곳 프룬제 군사학교에서 가명으로 공부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소련군에 들어가 전차소대장으로 동부전선에 참전하였다. 이때 그는 포로로 잡혔고, 아들에게 심적인 빚이 있었던 모택동은 권력을 써서 그를 빼냈다. 전쟁이 끝나고 1949년 중국으로 돌아와 1949년 10월 8살 연하인 20살 처 류숭린과 결혼하였다.




1950년 김일성이 한국전쟁을 일으켰다. 초반에 밀물처럼 밀어붙이던 기세는 미군 등 유엔군의 참전으로 전세는 불리하게 돌아갔다. 당시 중국은 내전의 후유증으로 심한 몸살을 앓고있던 터라 김일성의 전쟁을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북한이 밀릴 경우 적국과 직접 국경이 닿을 수 있기 때문에 다른 당간부들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모택동은 참전을 결심한다. 입술이 없으면, 이빨이 시릴 것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알았기 때문이다. 또한 한참 신혼에 젖어있는 자신의 큰 아들에게도 전쟁 참여를 권유한다. 권유라기 보다는 강제적인 조처였을 것이다. 인민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전쟁에 자신의 아들만 빼 놓을 수 없는 분위기였을 것이다.




이후 중국인민 지원군이 결성되었고 모안영은 이 부대에 지원하여 중국의 10대 원수 팽덕회의 러시아어 통역관으로 팽덕회와 함께 압록강을 건넜다. 이미 유럽의 전선에서 포로로 잡힌 경험이 있는 마오안잉을 위한 팽덕회의 배려였을 것이다. 그러나 모안영은 한국전쟁에 참전한 지 약 한 달 만인 1950년 11월 25일 평안북도 동창군 대유동에서 미군 전투기 폭격으로 전사했다. 11월 24일 두대의 정찰기(P-61 Black Widows)가 떠서 중국군의 위치를 탐지하였으며, 다음 날 정오에 4개의 네이팜탄을 투하하였다. 그 중 하나가 모안영이 있는 동굴 근처에 떨어져 사망을 하게 된 것이다. 원인은 어처구니 없게도 김일성이 수고한다며 내려준 계란을 요리해 먹다가 새어나간 불빛 때문이었다. 그가 결혼을 한지 1년 1개월 되던 날이었다.




그의 새까맣게 탄 주검을 안고, 팽덕회는 넋이 나갔다. 익명으로 참여를 했기 때문에 그때까지도 모안영이 모택동의 아들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팽덕회는 모안영을 살리려고, 불타고 있는 진지에 뛰어들려고 했다가 부하들의 필사적인 만류로 발만 동동 굴렀다. 모안영의 죽음을 안 주은래는 바로 모택동에게 죽음을 알리지 못하고, 3개월 이후에나 죽음을 보고 한다.




모택동과 그의 처 강청은 비통에 빠졌다. 모택동은 눈시울을 붉히며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하더니 "전쟁에는, 희생이 따르는 법이지..."라고 넋이나간 푸념을 했다. 모택동도 신혼 1년차인 며느리 류숭린에게 아들의 죽음을 3년 뒤에나 알리게 된다.




팽덕회는 그의 시신을 중국으로 가져오려고 했지만, 모택동은 다른 인민군과 함께 묻히는 것이 도리라며 거절을 했다. 결국 그의 유해는 평안북도 회창군 인민지원군 총사령부 열사릉원에 묻혔다.








2009년 그보다 20년 늦게 태어난 원자바오 총리가 그의 묘 앞에서 묵념을 하면서 소회를 달랜다.




"동지가 염원하던 부국강병의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확실히 중국은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부강해졌다. 미군 함대조차도 벌벌 떨 미사일을 개발했고, 세계에서 가장 빠른 컴퓨터와 세계에서 가장 빠른 기차를 발명했고, 전투기는 물론이고 민간 항공기조차도 이제는 수출하고 있는 실정이다. 뿐만 아니라 중국 상공에서 얼쩡거리는 적국의 첩보위성 쯤은 언제든지 요격시킬 수 있는 기술력을 갖추었다.




원자바오의 넋두리가 왜그리 부러운 것일까? 우리는 아직도 19세기를 정리하지 못해 꿈에도 생각지 못한 친일파가 득세하고 있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어떤 이들은 모택동이 한국전쟁을 일으키도록 도와줬다는 말을 하는데, 당시 중국공산당은 국공내전을 마치고 국내에 안정기가 필요하던 때였다. 따라서 중국 공산당 지도부들은 한국전쟁 참여를 반대했다. 그러나 결국 순망치한의 현실을 선택하게 된다. 또 어느 무식한 분은 마오안잉이 후방으로 빠져서 편하게 군생활하다가 재수없이 폭탄에 맞아뒈졌다고 얘기를 한다. 마오안잉은 소련군 전차부대 소대장으로 세계2차대전 때 최전방에서 전투를 하다가 포로로 잡히기까지 하였다. 또한 중국공산당도 제공권이 이미 미국에 장악당하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적어도 큰아들에게 큰 빚이 있는 마오쩌둥은 아들을 쉽게 전방에 보내지 못하고, 원수 팽덕회(펑다화이)에게 맡기지만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 비록 남에게 대범한 척했지만, 팽덕회에 대한 미움은 사라지지 않았고, 결국 문화혁명기에 그를 숙청함으로써 뒤끝을 강하게 남겼다.








우리의 적국이었던 중국조차도 이러할진대 대한민국은 어떠한가? 적어도 정치인를 하겠다는 사람이라면 군대를 마치지 않은 이들은 출마조차도 하지 못하도록 법을 제정해야 한다. 부모의 권력으로 멀쩡한 놈들이 불량품 취급받아 군대를 면제받은 이들은 장관, 차관은 꿈도 꾸게하지 말아야 하며, 정치는 아예 꿈도 꾸지 못하게 제도화해야 한다. 또한 다른 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자녀를 둔 이들도 정치를 하지 말아야 하며, 장차관까지는 못하게 하는 강력한 법을 시행해야 한다




모택동과 장개석
신해혁명 이후 중국은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장개석과 혁명을 완수하려는 공산주의계열로 갈려 혼돈의 시기를 맞게 되었다. 황제가 사라진 중국은 미국과 영국 등 외국 세력들이 정치에 간섭했으며, 중국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중국은 대륙을 지배하기 위한 처절한 싸움을 전개해야만 했다.
중국의 전체 실권을 장악한 장개석이 중심이 된 국민당군과 그의 독재에 반대하는 모택동이 구성한 홍군으로 나뉘어진 중국은 심각한 내전에 빠져들었다.


1931년 11월 중국의 동북부 지역에 모택동을 중심으로 한 공산진영은 임시 소비에트 공화국을 선포하며 세력을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장개석은 모택동의 움직임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대규모 토벌대를 조직하여 홍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모택동만 제거한다면 전 중국은 그의 손에 들어올 수 있는 기회였다. 그의 공격은 얼마 지나지 않아 호북, 호남, 하남을 평정하고 모택동의 근거지로 즉각 10만의 군대를 파견했다.


모택동의 공산군과 홍군은 장개석의 포위망을 탈출하기 위해서 3년 뒤 그 유명한 1만 2천킬로미터의 기나긴 대장정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 장정에 많은 민병, 농민들이 국민당의 보복을 두려워하며 행렬의 뒤를 다르기 시작했다. 약 10만 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인원이 기나긴 행렬을 유지하며 도망친 것이었다. 행렬의 처음과 끝의 거리는 약 일주일을 걸어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장개석은 이 행렬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여 한 달 동안 모택동은 오만 오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잃어야 했다. 무사히 포위망을 탈출한 홍군은 서쪽으로 움직이며 귀주와 준의에서 지방토벌을 제압하고 오랜만의 휴식을 취하였다. 이곳에서 홍군은 더 이상 국민당군과의 내전보다는 중국대륙을 노리고 군대를 파견한 일본에 대한 저항을 전개해야 한다는 생각에 북쪽으로 행군을 시작했다.


이때 장개석은 모택동 일행이 사천으로 들어올 것으로 예상하고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이미 힘을 잃은 모택동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모택동은 장개석의 의중을 알아채고 다시 준의로 방향을 바꾸었으며, 장개석이 다시 좇아오자 이번에는 북상하여 위기를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장개석은 모택동 일행을 토벌하기 위해서 끝없이 추격
하였고 모택동은 홍군의 주력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사천의 서쪽 무공에 도착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분투했다.


마침내 모택동은 강과 산을 건너 티베트를 지나 해발 4천 미터가 넘는 대설산을 넘어 기어이 장국도가 이끄는 제4방면군과 합류하게 된다. 강서 이후 7천 킬로미터를 8개월 동안 걸어온 모택동의 북상항일을 반대하여 기어이 모택동과 헤어져 남하해 버렸다.


모택동은 8천명이라는 인원을 거느리고 다시 북진을 개시했다. 거대한 늪지대를 건너 납자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국민당군을 무찌르고 10월에는 육백산을 넘어 마침내 섬서성의 오기진에 도착했다. 그 곳에서는 제15단군 사령 서동해가 마중 나와 있었다. 이제 모택동의 기나긴 고난의 시간이 끝났음을 예고한 것이었다.


모택동은 산맥 열여덟을 넘고 강 열일곱을 건너, 성 열둘을 가로지르고 소수민족지구 여섯 곳을 통과하였으며, 62개의 시와 마음을 공략 점거했다. 총 거리는 1만 2천 킬로미터라는 어마어마한 거리였다. 그리고 얼마 후 모택동이 있는 곳으로 도망쳤던 제4방면군과 하룡의 제2방면군이 섬북으로 도착하여 장개석에 대한 역공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모택동의 홍군을 섬북이라는 외진 곳으로 몰아낸 장개석은 강한 군사력을 중심으로 중국 최고의 실력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는 구미 열강으로부터 신식무기를 구입하여 각 지방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1936년 당시 그의 군대는 약 2백만 명에 이르렀으며 그 중에서도 장개석 직계 군대는 약 1백만 명에 이르렀다. 장개석은 중국을 지배하며 교통망의 정비를 서둘러 진행하기 시작하여 철도와 자동차 도로의 건설에 주력했다.


그리고 외국과 맺은 불평등 조약을 파기하고 대학, 학술기관의 설립을 추진하여 내란에 지쳐 있던 중국을 근대와의 과정에 접어들게 했다. 하지만 장개석은 국민을 위한 정치보다는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려는 의도를 품고 있었다. 그는 화폐개혁을 행하여 모든 산업을 국유화하면서 국민에게서 막대한 세금을 거두어들였으며, 지방에는 공산당을 탄압하기 위한 치안조직을 구성했다. 이 치안 조직의 유지비는 농민이 감당하게 하여 국민들의 살림살이를 더욱 어렵게 만들어 갔다. 뿐만 아니라 장개석은 자신의 부와 권력을 위해서 비밀조직을 결성하여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신해혁명 이후 독재의 시대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장개석은 중국을 지배하였지만 보호하지는 못했다. 자신의 정권을 지키기 위해서 일본과의 전쟁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그는 일본과 전쟁을 벌일 경우 지방군벌과 홍군이 자신을 공격할 것이라 생각하고 일본과 지속적으로 타협하며 영토를 내주고 있었다. 그는 오히려 항일의식을 금지시킬 정도였다. 이에 많은 국민들이 분노하여 국민 스스로 의용대를 조직하여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장개석의 우유부단한 모습과는 달리 모택동은 대장정의 목표인 일본의 격퇴를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있는 섬북의 주변은 어이없게도 장개석의 군대가 포위하고 있었다.


총구가 일본이 아니라 동포에게 겨누어 있다는 것은 가슴 아픈 현실이었다.
이에 모택동은 일본과의 전쟁에 다함께 동참할 것을 호소하는 '8.1'선언을 발표했다.


[형제는 서로 다투어도 밖의 모욕은 함께 저지한다는 진지한 각오로 모두 일어서라. 일본침략자와 그들과 타협한 장개석을 쳐부숴라. 용감히 소비에트정부와 동북 각지의 항일정부와 하나가 되어 전 중국의 통일국방정부를 조직하라. 홍군과 동북인민혁명군 및 각종 항일
의용군이 하나가 되어 전 중국통일 항일연합군을 조직하라.]


모택동의 항일 투쟁선언에 많은 중국인들은 공감을 표명했다. 지금 가장 시급한 문제는 내전의 종식이 아니라 일본의 침략을 어떻게 막아낼 것인가 라는 문제였다. 하지만 장개석은 포위망을 풀지 않았다. 이에 심균유, 장내기, 동행지 등이 중심이 되어 전국 구국연합회를 결성하여 모택동과 장개석에게 내전을 중지하고 일본과 전쟁을 수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모택동은 받아들였지만, 장개석은 오히려 군대를 동원하여 모택동을 공경하려고 했다. 국민보다는 일개인의 안위만을 생각한 장개석의 의도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장개석이라 해도 국민들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많은 장군들이 일본과 타협하는 그에게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했으며, 여론도 그를 매국노라 칭했다. 이에 장개석은 모택동과의 내전을 중시하고 힘을 합하여 일본과 싸울 것을 승인하게 되었다.


중국대륙은 이제 힘을 합쳐 일본과 싸울 것을 다짐하며 사로 적대 관계였던 국민당군과 홍군이 함께 전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모택동의 제안이 성공했던 것이다. 그는 권력보다도 일본의 침입을 막아야 한다는 절대절명의 사명에 더 큰 비중을 두었기에 많은 중국인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게 되었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일본군은 중국에 전면적인 공격을 개시하여 마침내 중일전쟁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현대화된 무기를 앞세운 일본군 앞에 중국군은 번번이 패했으며, 전쟁 시작 반년 만에 수도 남경을 일본에 내주어야 하는 불운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남경에 들어온 일본군은 짐승처럼 중국인들을 살해하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살육은 밤낮없이 진행되었다. 이것이 바로 '남경 대학살'이다. 이때 죽은 사람의 수만도 무려 30만 명에 이르며 어린아이에서부터 노인들까지 닥치는 대로 목숨을 빼앗긴 지옥과도 같은 사건이다. 연일 일본은 전투에서 승리했으며 중국군은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하지만 이러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순간에도 장개석은 어떻게 하면 공산당의 군사권을 장악할 수 있을까 하는 것에만 골몰했다. 뿐만 아니라 3개월만 싸우면 소련군이 출동하여 자신들을 도와줄 것이라 생각하며 일본군과의 전투를 회피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택동의 생각은 이와 달랐다.


장개석과 군대를 합쳤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패하는 이유를 알아내고자 고민을 계속했다. 그는 오랜 생각 끝에 현대화된 장비를 갖춘 일본군과 정면으로 대결을 펼친다는 것은 무리였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중국의 지리를 이용하여 국민과 군대가 협조하는 게릴라전을 전개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실제로 북쪽에서 전투를 전개하고 있는 부대들은 게릴라전을 적절히 사용함으로써 일본군의 진출을 막아내고 있었다.


중국연합군은 일본의 공격에 다시 저항을 시작하였고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장개석은 연합군의 대표하는 이유로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일본을 무찌르기 위해서는 모택동도 그것을 불만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활발히 전개되던 전쟁이 1939년경부터 대치상태에 들어가 더 이상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화북과 화중에서 활약하고 있는 모택동의 팔로군과 신사군은 계속해서 일본군을 밀어내고 있었다. 이러한 승전보를 들으며 장개석은 두려움을 느꼈다. 전 중국을 지배하고 있는 자신의 권력이 약화될 것을 걱정한 그는 오히려 일본군을 공격하고 있는 팔로군을 공격함으로써 다시 한번 권력에 대한 그의 끝없는 욕심을 드러냈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모택동과의 협력도 끝나고 말았다.


장개석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 했지 항일이라는 절대절명의 문제에는 관심이 없었던것이다. 사태가 장개석과 모택동으로 가라지자 많은 사람들은 전투를 중지한 장개석보다는 끊임없이 일본과 전투를 벌이는 모택동의 진영으로 몰려들었다.


과거 화려하게 정권을 유지했던 장개석보다는 중국의 운명을 극복하기 위해 일본과 싸움을 전개하는 모택동에게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이다.


모택동은 전면적인 군사활동뿐 아니라 지역 농민들에게도 항일 게릴라전을 펼칠 것을 독려하여 전국은 일본에 대한 복수심으로 들끓기 시작했다. 그에 힘입어 1940년에는 팔로군이 40만 명으로, 신사군은 10만 명으로 급증하였으며, 그와 함께 행동하는 민병만도 1백만을 넘어섰다. 모택동의 군대는 일본군에 대한 공격의 끈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순간에도 장개석은 전투에서 승전보를 울리는 모택동군을 시기하여 전투중인 신사군에게 다시 공격을 감행하여 9천명을 사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모택동은 힘이 들었다. 일본군과 싸우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장개석은 계속해서 자신의 군대를 공격해오니 답답할 뿐이었다. 그는 중국의 평화를 위해서 두 개의 적과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러한 전세는 미국이 일본과 태평양전쟁을 개시하면서 중국에 유리한 입장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미국이 전쟁에 참전했다는 소식에 중경에서 움직이지 않던 장개석은 다시 정권에 복귀해야겠다는 생각만 하였으나 모택동은 자신의 지역에 있는 국민들과 함께 항일전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1945년 장개석은 중경에서 국민대회를 열어 자신의 일당독재를 확립하기 위해서 공산당에 대한 규제조치를 발표하여 모택동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등극을 위해서 모택동과의 내전을 다시 시작할 뜻을 내비친 것이었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전쟁의 상황은 급변하여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일본이 전쟁에 항복하게 되었다. 이 소식은 전 중국을 기쁨에 들끓게 했지만 다시 장개석의 욕심에 의해 내전에 빠지지 않으면 안되는 상태로 접어들었다.


장개석은 국민당군을 이동시켜 잔인하게 홍군을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일본군에게는 보이지 않았던 용맹성을 나타냈다. 하지만 중국 국민들은 누가 자신들이 택할 지도자임을 잘 알고 있었다. 과거 일본가의 전쟁에서 꽁무니 빼며 오히려 일본군을 무찌르고 있는 군대를 습격한
장본인이 누구라는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모택동의 군대는 가는 곳마다 환영을 받았지만 장개석의 군대는 무력으로 마을을 지배하려 했다.


장개석의 패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국민이 등을 돌린 이상 그는 모택동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었다. 우유부단하며, 개인의 안일만을 위해서 살인도 서슴지 않는 그에게 아무도 도움을 주지 않았던 것이다. 얼마 후 그의 부대는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여 기어이는 중국대륙에서 탈출해야 하는 운명이 그에게 다가왔다.


1949년 12월, 20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과 함께 장개석은 미해군 함정의 보호를 받으며 쓸쓸히 대만으로 도망쳐야만 했다. 그는 대만에 정부를 수립하여 지배권을 확대시켜 갔다.
한편, 대륙에서는 같은 해 10월 1일, 모택동에 의해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이 선언되었다.


이제 중국대륙은 모택동이 지배하게 되었으며, 항일전쟁을 자신의 권력수단으로 사용한 장개석은 대만이라는 작은 섬에 살게 된 것이다. 권력에 눈멀지 않고 오직 민족의 미래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한 사람에게 빛이 내리는 법이다. 아무리 훌륭하고 뛰어난 사람이라 해도 주변 사람들을 돌보지 않는다면 그는 반드시 실패하고 마는 것이다. 모택동과 장개석의 대결은 이러한 사람됨의 문제에서 결말이 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택동의 문화대혁명과 중국인 대학살
12명의 작은 모임에서 출발한 중국 공산당은 불과 20여 년 만에 거대 중국을 손아귀에 넣었다. 그리고 중국 역사에서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많은 국가처럼 이들도 분열되거나 와해될 것이라는 예측을 벗어나 12억 중국인들을 억압하며 50년 넘게 정권을 유지하고 있다. 이같은 무소불위(無所不爲)의 통치 기반을 다진 인물이 바로 모택동이다.
1949년 봄 모택동은 지금까지의 중국혁명은 '지방으로부터 도시를 포위하는' 비(非)정통적인 노선을 걸어왔으나 앞으로는 도시가 지방을 이끌어가는 정통노선을 걷게 되리라며 중화인민공화국(중공)의 성립을 선언했다. 당시 중국 인민들은 어느 누구도 신생 공화국의 희망찬 미래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희망은 빗나갔으며, 그것은 또 다른 재앙의 시작이었다. 모택동은 타고난 혁명가이자 반란의 명수이며 선동가였다. 그는 新 중국 건설의 모든 문제를 대중의 지지를 동원해 기존 질서를 파괴하는 반란으로 해결하려 했다.
신(新) 중국 건설의 선두에 선 모택동은 인민을 총동원해 난국을 돌파하는 특유의 혁명적 방법을 동원했다. 소련이 수년 내 공업생산력에서 미국을 따라잡게 될 것이라는 흐루시초프의 허풍에서 힌트를 얻은 모택동은 1958년 15년 내에 영국을 따라잡겠다고 선언했다. 소위 '대약진운동'의 시작이었다. 모택동의 대약진 운동은 특유의 대중동원을 통해 노동력을 집중적으로 투입해서 공업과 농업 생산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켜 봉건적 후진사회인 중국을 빠른 시일 내에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구상이었다.
우선 농업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농촌에 대규모 집단농장인 '인민공사'를 설치했다. 인민공사는 완전한 평등주의에 입각한 농업공동체로 농민의 사유재산은 모두 공사의 것이 되며, 막사에서 공동생활을 하고 식사도 같이 하는 한편 모든 수입은 평등하게 분배한다는 것이었다. 5억의 중국 농민은 조상 대대의 재산을 처분하고 2만6천여 개의 인민공사에서 공동생활을 하게 됐다. 갖고 있던 모든 것을 처분했다. 살고 있던 집들도 부수고 그 재목으로 공동막사를 지었다.
무소유의 이상적 '공산사회'가 마르크스와 레닌이 상상도 하지 못했던 가난한 중국농촌에서 한때 실현됐던 것이다. 모택동은 한 메모에서 "레닌은 뒤떨어진 나라일수록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어렵다고 말했다. 현재 보는 바와 같이 이것은 올바르지 않다. 경제가 뒤떨어질수록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수월하며 사람은 가난할수록 혁명을 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인민공사’결과 도시와 농촌에 식량부족 사태 발생


또 한 가지, 대약진 운동에서 모택동은 도시와 농촌의 '4해(害)', 즉 파리 모기 쥐 참새를 퇴치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이 운동에는 모든 국민이 동원됐다. 왜 참새가 포함됐는지는 모르지만, 참새잡이 모택동 전술은 기발함을 넘어서 소름이 끼친다. 전 국민이 전국적으로 총동원돼 참새가 땅에 앉지 못하도록 쉴새없이 소리를 쳐서 쫓는다. 앉지 못하고 하늘을 빙빙 돌던 참새는 그만 지쳐 떨어져 최후를 맞게 된다. 대약진운동 중 유일하게 성공한 것이 '4해 퇴치운동'이었다.












▲ 대약진시기 철강증산운동의 모습


대약진 운동의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1958년 가을 들판에는 곡식이 넘쳐 대풍이 들었고 용광로에서는 엄청난 철이 쉴새없이 생산됐다. 그런데 분명히 대풍이라고 했지만, 인민공사에서 제공하는 음식의 질과 양은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떨어지기 시작했다. 도시에도 물품과 식량부족이 초래됐다. 그리고 겨울부터 재앙이 찾아왔다. 1958년 중국에서는 너무도 많은 것이 잘못되고 있었던 것이다.


1958년은 풍년이었다. 그러나 곡식들은 대부분 거둬들이지 못한 채 썩어갔다. 건장한 마을 청장년들은 모두 용광로에 매달려야 했다. 부녀자들과 어린이들이 허리가 휘도록 일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지방 지도자들은 모택동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생산량을 부풀려 보고했다. 생산량에 따라 세금이 정해졌기 때문에 농민들은 엄청난 세금을 치러야 했다. 심지어 어떤 지역에서는 생산된 곡식을 모두 세금으로 내는 바람에 먹을 것이 하나도 남지 않은 곳도 있었다.


대약진운동’으로 굶어죽은 사람만 3,000~4,300만 명


더욱이 세금으로 거둬들인 곡식은 빚을 갚기 위해 소련으로 보내졌다. 심각한 식량부족으로 기근이 초래되는 와중에도, 모택동은 곡식을 소련으로 보냈다. 자신의 인민공사가 실패했다는 사실을 흐루시초프가 아는 것이 두려웠던 탓이다. 그러나 가장 큰 잘못은 인민공사 자체에 있었다. 인민공사에서 농민들은 일할 의욕도 생산량을 늘릴 열의도 가질 수가 없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일하지 않는 옆사람과 동일한 수입밖에 얻을 수 없는 상황에 누가 열심히 일하겠는가? 생산량은 급속히 줄어갔다.


마을마다 만들어진 용광로는 사실상 무용지물이었으며 화근이었다. 토법로는 철광석을 제련하여 철을 얻는 것이 아니었다. 철을 녹여 철을 만드는 용광로에 불과했다. 인민들은 냄비, 주전자, 칼, 수저, 난로, 도끼, 삽, 가래, 금고, 자물쇠, 심지어 트랙터까지 모든 철을 용광로 속에 던져버렸다. 여기서 얻은 철은 거의 사용할 수 없는 쇳덩어리에 불과했다. 용광로를 지피기 위해 집집마다 가구와 문짝을 태웠고 급기야 숲을 태워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의 산이란 산은 모두 민둥산으로 변했다.


실로 중국 농촌은 자멸을 향해 매진했으며, 중국은 철기시대에서 석기시대로 퇴화했다. 농민들은 밭을 일굴 농기구가 없었다. 대기근이 찾아왔다. 인재였다. 아프리카에서 보던, 뼈만 남고 배가 불룩한 어린이들과 굶어죽은 시체를 1959년의 중국에서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죽은 사람보다도 모택동의 대약진운동에서 굶어죽은 사람의 수가 훨씬 많았다. 최소한 3,000만 명, 많게는 4,300만 명이 죽었다는 추정도 있다. 그러나 모택동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혁명의 대의를 위해 생명은 희생돼야 한다"고 했다. 6억 국민을 대상으로 한 그의 실험은 5∼7%의 인구를 희생하면서 철저한 실패로 끝났다.




모택동, 黨 지도부 파괴 위해 ‘문화대혁명’ 일으켜


대약진 운동이 실패한 이후 모택동은 또 하나의 혁명을 꾸몄다. 바로 '문화대혁명'이다. 문화혁명은 1965년 11월 강청(江靑)의 수하인 상해의 이론가 도문원이 '문회보'에 쓴 "해서파관(海瑞罷官)을 평한다"에 의해 시작됐다. '해서파관'은 북경 부시장 '오함'이 쓴 희곡이다. 해서는 명대의 충신으로 폭군이었던 황제의 잘못을 용감하게 직언하고 충성을 다한 인물로, 모택동은 해서를 본받으라고 장려하기까지 했었다. '오함'도 해서를 본받으라는 모택동의 지시에 따라 해서파관을 썼다.
▲ 문화혁명 당시 모택동의 홍위병들은 거리를 휩쓸고 다니면서 닥치는대로 파괴와 폭행, 그리고 살인을 일삼았다. 특히 이들은 관리나 부유한 자, 지식인의 집에 난입하여 폭행과 살인을 저질렀다.
그러나 그것은 모택동이 친 덫이었다. 모택동은 과거에도 '백화제방백가쟁명'(百花齊放百家爭鳴)을 주창하여 지식인들로 하여금 정적들을 비판하도록 하여 그들을 숙청하는 데 활용한 적이 있었다. 충신 해서가 황제에게 직언하고 고초를 당했듯이, 팽덕회도 대약진운동의 문제점을 지적하여 모택동에 의해 숙청 당한 바 있었다. 많은 당간부들은 팽덕회가 해서와 같은 인물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때가 온 것이다. 모택동과 강청 일파는 '해서파관'은 우익분자 팽덕회를 숙청한 모택동을 해서에 빗대 비난하는 것이며, 그 배후에는 유소기 등소평 등 당 지도부가 연루돼 있다고 뒤집어 씌웠다.
모택동이 그의 충직한 당 지도부를 파괴하기 위해 동원한 것은 9살에서 18살에 이르는 초중고의 어린 학생들, 소위 '홍위병(紅衛兵)'이었다. '백가쟁명' 때 지식인들은 정적들을 비난해주었지만, 모택동도 비난했다. 그러나 청소년들은 그럴 염려가 없었다. 그들은 사리를 판별할 눈이나 비판능력도 없으며 단지 맹목적이었다. 모택동은 이 점을 활용했다.
홍위병, 관리나 부유한 자, 지식인 집에 난입 폭행과 살인 저질러


모택동은 1966년 가을 천안문에 여덟 차례나 오르며 전국에서 모여든 수천만의 홍위병들에게 반란을 획책했다. 모택동은 홍위병에게 사구(四舊), 즉 낡은 사상, 낡은 문화, 낡은 풍습, 낡은 습관을 타파하라고 지시했다. 중국 전역에서 학생들이 당 사령부와 사구를 폭파하기 위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거리를 휩쓸고 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파괴와 폭행, 그리고 살인을 일삼았다. 관리나 부유한 자, 지식인의 집에 난입하여 폭행과 살인을 저질렀다.


일례로 1967년 8월 13일부터 10월 7일 까지 후난성(湖南省) 다오현(道縣) 인민 무장부 말단 민병들이 ‘상강풍뢰(湘江風雷)’의 조직원과 검은 5부류를 도살했다. 66일 동안 10개 구역 36개 공사(公社), 468개 대대(大隊), 2778가구에서 총 4,519명이 연루되었다. 그 중 ‘지주, 부농, 반혁명, 나쁜 사람’이 38%를 차지했고, 지주와 부농의 자녀가 44%였다. 살해당한 사람 중에서 연령이 제일 많은 사람은 78세였고 가장 어린 경우는 생후 10일 밖에 안 된 아기였다. 이것은 다만 특정지역에서 문화대혁명 중에 발생한 한 가지 사건에 불과하다.












▲文革기간 내내 수난을 받은 문화 유산




1968년 초, ‘혁명위원회’ 가 설립된 후, 계급 대오(隊伍)를 조사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그 당시 네이멍구(內蒙古)에서는 ‘내인당(內人黨)’을 조사하면서 35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살해한 유혈사건을 만들어냈다. 1968년 광시(廣西)에서는 4.22 군중 단체에 대한 무장 대학살에 수만 명이 참가했으며, 당시 사망한 사람이 11만 명에 이른다.


농촌의 경우는 더욱 심각했다. 홍위병들은 옛 지주 소실의 자식이거나 金을 숨기고 있다고 의심되는 자, 이웃이 허위로 흑색분자로 고발한 자 등 아무 죄가 없는 마을사람들을 자본주의체제 부활을 노리는 중죄인으로 분류해 가차없이 사형에 처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국가조직은 완전히 와해됐다.


제2인자로 국가주석이었던 유소기는 백주에 사무실에서 홍위병들에게 붙잡혔다. 경호원들도 못 본 체했다. 등소평도 붙잡혔다. 부인과 자식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소위 '비투대회'(批鬪大會)에 끌려가 굴욕적인 자세로 자아비판을 해야 했다. 유소기는 결국 모진 고문 속에 살해됐다. 등소평의 장남은 북경대에서 홍위병들에게 고문을 받다가 4층에서 던져져 평생 장애인으로 살고 있다.


홍위병, 외교부 점거 후 해외 중국 대사관에 혁명 선전·공산주의 선동


중국 문제에 정통한 뉴욕타임스의 대기자 해리슨 솔즈베리(Harrison E. Salisbury)는 모택동 홍위병의 잔학성을 가리켜 "히틀러의 나치 친위대도, 아르헨티나의 파시스트도, 스탈린의 비밀경찰도 모택동의 홍위병에게는 발밑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한편 낡은 것을 없애라는 모택동의 지시에 따라, 문화재들은 파괴되고 책은 불태워졌다. 심지어 중국 고전극인 경극의 가면과 의상도 불태워지고 배우들도 형용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얼마나 많은 인류유산이 문화혁명 중에 파괴됐는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다.


시간이 감에 따라 모택동조차도 홍위병을 통제할 수 없는 사태가 초래됐다. 국가주석이 백주에 붙잡히는 판에 국가기관이 무사할 리 없었다. 홍위병들은 중국 외교부를 점령 폭파했다. 그들은 외교문서를 철저히 파괴했으며 소련, 영국 등 외국 대사관에 침입해 방화했다. 외교부장 진의는 자아비판을 해야 했으며 고문을 당해 결국 죽었다. 외교부를 점거한 그들은 해외의 중국 대사관들이 혁명을 선전하고 지역 공산주의를 선동하는 역할을 하도록 지시했다. 그로 인해 중국대사들은 대부분 소환됐고 몇몇 국가들은 중국과 단교했다. 대외 무역은 급격히 감소했다. 중국의 대외정책은 다른 부문들과 마찬가지로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모택동, 커다란 침대 위에서 10대 소녀들과 섹스 즐겨


모택동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인민해방군을 동원했다. 그리고 68년 7월 홍위병을 해산시키고 1000만 홍위병을 모두 농촌으로 하방(下放)시켰다. 홍위병 세대는 지금도 중국의 골칫거리다. 오십 줄의 그들은 한창 공부할 나이에 농촌에서 똥거름을 치며 지냈다. 홍위병이 제거된 이후에도 76년 9월 모택동이 죽을 때까지 문화혁명의 광기는 계속됐다. 약 1억의 중국인이 문화혁명 때에 모진 고초를 당한 것으로 알려진다.(당원만 300만 명 숙청)


모택동은 현대의 진시황이었다. 그는 대부분의 날들을 커다란 침대 위에서 중국 고전들을 읽거나 10대 소녀들과 섹스를 하면서 살았다. 마오쩌둥이 죽은 뒤 문화혁명의 목적과 결과가 모두 부정되면서 많은 사람들은 아예 정치를 외면하게 되었다.


한편 중국 인민들 사이에서는 심각한 파벌의식이 여전히 남아 있다. 문화혁명 기간에 서로 반대 입장에 있던 사람들이 같은 작업장에서 함께 일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며, 그런 일은 그들이 일선에서 물러날 때까지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 인류 역사상 자신이 만든 체제를 부수려고 그와 같이 엄청난 대중의 힘을 동원한 지도자는 결코 없었을 것이다. 그 체제에 가해졌던 폐해는 심각한 것이었으며 모택동이 궁극적으로 달성하려고 했던 목표는 실현되지 못한 채 남아 있다.


1981년 6월 중국공산당은 '건국' 이래의 역사적 문제에 관한 당의 결의’에서 문화대혁명은 당 ·국가 ·인민에게 가장 심한 좌절과 손실을 가져다 준 모택동의 극좌적 오류이며 그의 책임이라고 규정했다. (kon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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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모택동의 문화대혁명과 중국인 대학살|작성자 돈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