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5. 19. 14:01ㆍ역사와문화산책
2019-01-15 19:46:18
1. 6.25전쟁의 원인
공산주의 사상에는 폭력혁명론이 있는데
그 사상에 근거해서
공산주의자 김일성(본명 김성주)씨께서
남한의 공산화를 생각하며
탱크를 몰고 남쪽으로 무력침략 하였습니다.
2.6.25전쟁의 피해(사망자는 몇명. 이런식으로 자세하게)
미국의 통계로는 60만 명이 전쟁 중에 사망하였고,
전체 참전국의 사망자를 모두 합하면 20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한국의 사망자는 백만 명이 넘으며 그 중 85%는 민간인이다.
소련의 통계를 보면 북한의 11.1%에 해당하는 113만 명의 인구가 전쟁을 통하여 사망하였고,
양측을 합하여 250만 명이 사망하였다.
80%의 산업시설과 공공시설과 교통시설이 파괴되었고,
정부 건물의 4분의 3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으며 가옥의 절반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다.
3년 1개월에 걸친 한국 전쟁은 한반도 전체를 폐허가 됐고,
참전한 외국의 병력에까지 극심한 해를 입었다.
그 밖에도 약 20만 명의 전쟁미망인과 10여만 명이 넘는 전쟁고아를 만들었으며
1천여만 명이 넘는 이산가족이 발생했다.
이 전쟁의 결과는 단언컨대 비극이다.
자료출처:
공대생의 잡 블로그김홍경 님의 Daum블로그blog.daum.net
3. 6.25전쟁의 피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
현재 남한, 즉 대한민국(South Korea)의 경우 이산가족찾기를 통해서
흩어졌던 가족과 친족들을 모았던 일이 있습니다.
관련 웹 사이트
이산가족정보통합시스템reunion.unikorea.go.kr
국가와 국가
북한의 공산진영과
남한의 자유 민주주의 & 개인 자본주의 진영 간의 대립으로 인한 분쟁이었기 때문에
전쟁에 관한 부분은 국가가 재판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합니다.
관련 웹 사이트
"예비검속 희생자, 국가 손해배상책임":: 공감언론 뉴시스통신사 ::www.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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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부터 1953년까지 남한과 북한이 싸운 전쟁. 미국, 소련, 중국도 이 전쟁에 참여했으며 다른 이름으로 ‘한국 전쟁’이라고도 불림. 시대현대 사회 목차 6·25 전쟁의 배경 - 폭풍 전야 6·25의 경과 및 결과 - 전쟁이 남긴 상처 추석 특집으로 TV에서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를 해 주더라. 한 형제인데, 서로 다른 편이 되어 싸우는 모습이 너무 마음 아팠어. 왜 그렇게 싸우게 된 걸까? 형과 아우가 서로 다른 편이 된 것도 이상하고, 무엇 때문에 그렇게 서로 잔인하게 죽이면서 싸워야 했는지도 너무 궁금해. 6·25 전쟁의 배경 - 폭풍 전야 교과단원 6학년 1학기 3-2. 대한 민국의 수립과 발전|중학교Ⅹ. 대한 민국의 발전 남북간의 적대감은 갈수록 커졌어 일제로부터 해방되었다고 기뻐한 것도 잠시, 38 도선을 경계로 한 민족에 두 개의 국가가 세워지면서 이제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지. 남북은 서로 경쟁하며, 같은 민족이라기보다는 적으로 생각하게 되었어. 북한은 남한을 미국이 친일파를 내세워 다스리는 식민지라며 적대시했어. 남한에서도 ‘북진 통일’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북한을 적대시했지. 소련과 중국이 북한의 남침을 도와주기로 약속했어 1949년 3월, 김일성과 박헌영 등 북한의 핵심 인물들이 평양을 떠나 소련을 방문하여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의 지도자들과 만났어. 이때 소련은 북한이 남한을 공격하는 것에 동의하고, 긴밀한 협력을 약속했지. 김일성은 이어서 중국 공산당의 마오 쩌둥과 만나 남침에 대한 동의를 얻어냈어. 중국은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조선인 부대를 귀국시키고 보급품을 공급하겠다고 약속했지. 1948년 12월, 소련은 북한에서 군대를 철수시키고 미국에게도 남한에서 군대를 철수시킬 것을 강력히 요구했어. 1949년 6월, 미군이 철수하자 북한의 전쟁 준비는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지. 6·25의 경과 및 결과 - 전쟁이 남긴 상처 교과단원 6학년 1학기 3-2. 대한 민국의 수립과 발전|중학교Ⅹ. 대한 민국의 발전 1. 북한군의 진격 (1950.6.25.)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은 38 도선 전 지역에서 총공격을 시작했어. 그 전에도 38 도선 부근에서 종종 크고작은 군사 충돌이 있었기 때문에 서울 시민들은 ‘38 도선에서 또 전투가 벌어졌나 보구나.’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지. 그 사이 북한군은 서울을 향해 밀고 내려왔어. 전투가 시작된 지 사흘 만에 서울이 북한군에게 점령되었어. 2. 유엔군의 참전 (1950.7.17.) 마음이 다급해진 이승만은 미국에 도움을 요청했어. 미국은 빠르게 남한에 군대를 보냈고, 유엔을 움직여 유엔군도 보냈지. 미군이 개입했지만 남한군과 미군은 낙동강까지 밀렸지. 그러다 9월 15일 새벽, 미군이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하면서 9월 28일에는 서울을 되찾을 수 있었어. 서울에 돌아온 이승만 정권은 내친 김에 북진 통일을 이루려고 했어. 1950년 10월 1일 북진을 시작한 남한군과 유엔군은 10월 20일 평양을 점령하고, 10월 26일 압록강에 이르렀지. 3. 중공군의 개입 (1950.10.25.) 압록강까지 밀린 북한군이 중국에 도움을 요청하자, 중국은 18만 명의 중국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넘었어. 중국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다시 역전되었지. 12월 10일 평양이 다시 중국군의 손에 들어갔고, 1951년 1월에는 서울이 다시 북한군의 손에 들어갔어. 그러나 남한군과 미군은 우월한 무기를 앞세워 다시 북한군을 몰아붙였고, 3월 5일에 서울을 되찾았어. 4. 38 도선을 중심으로 한 치열한 전투 (1951.3 ~ 53.7.27) 1951년 3월, 38 도선을 중심으로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어. 전쟁 1년 만에 전선은 다시 최초의 출발점으로 돌아온 거야. 남북한은 물론 미군이나 중국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휴전의 필요성을 느꼈지. 2년 동안 계속 휴전 회담이 이뤄지고 있는 동안에도 산봉우리 하나라도 더 차지하기 위한 전쟁은 계속되었어. 그 전의 전투에 비해 이 시기의 전투가 가장 치열해서 사망자도 많았지. 결국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맺어졌고, 맞서 싸우던 전선은 휴전선이 되었어. 전쟁이 우리에게 남긴 것 1. 인명 피해 사상자 : 수백만 명 이산 가족 : 1천만 명 수많은 전쟁 고아 2. 경제적 피해 국토는 황폐화되고 많은 산업 시설이 잿더미가 되었다. 전쟁으로 농업 생산이 어려워져 식량이 모자라고, 수많은 공장과 도로, 철도의 파괴로 공업 생산량은 크게 줄어들었다. 3. 적대감과 보복 남한군은 북한과 관련된 자들을 ‘빨갱이’로 몰아 죽였고, 북한군은 남한과 관련된 자들을 ‘반동 분자’로 몰아 죽였다. 전선이 바뀔 때마다 서로에 대한 보복이 계속되었다. 4. 분단이 굳어짐 임시로 나뉜 38 도선은 휴전선으로 굳어지고, 남북한의 적대 감정이 높아져 대결로 치달았으며 남북 분단은 현실로 굳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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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6.25전쟁의 원인
1945 년 8월 15일 일본의 천황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우리나라는 일본에게서 독립을 하게되었다.
그런데 독립의 기쁨도 우리나라는 미소간의 이념대립과 의견차이로 남과 북으로 갈라지게 된다.
남한은 미군이 진주해 직접 3년간 미군정을 실시하고 소련은 북한에 진주해 김일성 정권을 내세워 간접적으로 군정을
실시한다.(그 덕분에 전권을 위임받은 김일성은 지주들과 친일파를 숙청했지만 미국은 그대로 친일세력을 남한에
남겨두게됨.) 미군정이 시작될때부터 김구, 김규식등은 남북의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나 1949년 김구가 안두희에게
피살됨으로써 그 세력은 없어지게 된다.
김일성은 소련을 찾아 탱크등 많은 군수물자를 지원받고 조국통일이라는 명목하에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에 남침을 개시합니다. 이게 바로 6.25이다.6.25 의 원인이라 따진다면 정확히 말해서
당시의 국제사회(자본주의VS공산주의)의 상황, 이데올로기의 차이로 말할 수 있다.
6.25전쟁의 결과
전쟁은 3년 1개월간 계속되었으며 전쟁으로 인한 인명피해는 민간인을 포함하여 약 450만 명에 달한다. 그 가운데 남한의 인명피해는 민간인 약 100만 명을 포함한 약 200만 명이며, 공산진영의 인명피해는 100만 명의 민간인을 포함하여 약 25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군인 전사자는 한국군이 22만 7,748명, 미군이 3만 3,629명, 기타 UN군이 3,194명이며, 중국인민지원군과 북한군의 정확한 전사자수는 아직까지 확인할 수 없는 상태이다. 전쟁기간중 한국은 43%의 산업시설과 33%의 주택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휴전협정 제60조에 의거 1954년 4월 제네바에서 대한민국과 UN 참전 16개국 그리고 북한과 중국 및 소련이 참석한 가운데 한반도 문제의 정치적 해결을 위한 정치회담이 개최되었다. 한국과 UN 참전국측은 UN 감시하에 남북한 토착인구비례에 의한 자유총선거 실시와 그 결과에 따른 민주적인 통일정부수립을 주장한 데 반하여, 공산군측은 오로지 주한 UN군의 철수만을 주장함으로써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같은 해 6월 회담은 결렬되었으며, 남북한은 항구적인 평화가 아닌 휴전상태에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쟁의피해
총 피해 액 :410,589,759,000환 (2,281,054,217 달러)
전사:58,809명, 부상: 178,632, 실종 및 포로 : 82.310
계 : 319,759연합군의 인명 피해전사 : 36,991 부상 :115,648 실종 및 포로 :6,944
계:159,583공산군의 인명 피해 북한군 전투 손실 : 520,000명 중공군 전투 손실 : 900,000명민간인
사 망(학살당한 인원 포함) : 370,599
부 상 :229,625
납 치 :84,532
행 방 불 명 :303,212
피 난 민 :240만
전쟁 미망인 : 20만
전쟁 고아 : 10만전쟁과정
1950.6.25 북한군의 남침 1950.6.26 유엔안보리, 북한군 침공중지 결의 1950.8.1 미 제 8군사령관, 낙동강방어선으로 철수명령
1950.8.5 인민군의 8월 공세 시작 1950.8.16 B-29 폭격기, 융단폭격1950.8.31 ~ 9.8 인민군의 9월 공세 1950.9.15 인천상륙작전
1950.9.28 수도 서울 탄환 1950.10.1 국군, 38도선 돌파 북진 1950.10.25 중공군, 제1차 공세 개시 1950.10.26 국군, 압록강 초산 도달
1950.11.21 미 제10군단, 두만강 혜산진 진입 1951.3.15 국군, 서울 재탈환 및 북진 1951.4.12 맥아더원수 해임, 리지웨이 장군 유엔군사령관 임명1951.6.23 말리크 소련 유엔대표, 휴전회담 제의 1951.7.10 개성에서 휴전회담 개시 1951.10.25 휴전회담장 판문점으로 이동 1951.10.28 군사분계선 설정 합의
1951.12.18 쌍방 포로명단 교환 1953.4.20-26 부상병 포로 교환 1953.6.8 포로 송환문제 타결 1953.6.18 이승만 대통령, 전격적 반공포로 석방 1953.7.27 휴전협정 !!
팁입니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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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일어난 원인은 북한에게 있다고 보기도 어렵읍니다. 북한은 계속되는 남한과 미군의 북한에 대한 지역적 침략과 선동을 중지해 달라고 수차례 요구했는데도 미국과 남한은 이를 어기고 계속적으로 북한을 자극했읍니다. 이는 미국 CIA와 국방부 그리고 정부 비밀문서에서 드러났읍니다.(지금은 해지됬지만) 북한이 남침한것은 맞지만 사실상 미국과 이승만의 합작품입니다. 마치 베트남처럼 미국이 통킹만사건을 조작하여 전쟁을 일으킨것과 유사합니다, 하지만 남한에서는 이를 은폐하고 무조건 북한이 남침한것으로 조작했죠. 이는 모두가 친일숭미매국노들의 짓이고 지금 60년 동안 이 땅을 유린하고 있읍니다. 사실상 북한이 남침한것으로 보는 이유는 전격전으로 내려왔기 때문에 전면전의 시작은 북한이 맞읍니다. 그런데 국지적으로 이미 남한과 미국이 먼저 도발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북한이 사실을 은폐하듯 남한도 사실의 거의 대부분을 은폐했읍니다. 지난 60년동안 말이죠. 그래서 이승만, 다카키 마사오, 전두환, 노태우, 이맹박, 발끈해 그리고 개썅도를 욕하는 겁니다. 개썅도 주민은 아무것도 모르고 지역연고와 다카키 마사오의 거짓에 속아서 이런 짓을 하고는 있지만 결과는 친일숭미매국노놈들을 지지하는 꼴이 되었기 때문에 욕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제는 많은 국민이 친일숭미매국노놈들과 미국이 선전하는 것을 믿고 따르는 멍청한 국민이 된겁니다. 진짜 원인은 남한의 친일숭미매국노놈들(이승만과 그 추종자들, 주로 친일숭미매국노놈들)과 미국입니다. 지금은 이 정신을 다카키 마사오, 전두환, 노태우, 이맹박, 발끈해, 자유청년연합, 뉴라이트, 어버이연합 등등이 주도하고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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