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역사왜곡 고발한다

2024. 5. 19. 14:16역사와문화산책

2019-01-15 15:20:25


KBS의 역사왜곡을 고발한다|KBS의 윤리적 범죄

시사논객 | 조회 909 |추천 0 |2006.06.13. 20:00 http://cafe.daum.net/1945movie/4nOx/5
금번 KBS드라마 “서울1945”이 계기가 되어 관심 가지고 들여다보니 요 근래 몇 년간 KBS에 좌익미화와 대한민국 정통성 파괴 성향의 프로그램들이 많았음을 알게 되었다. 시청자들을 속이며 특정 인사들에게 친일파 누명을 씌우는 그 좌익 성향이 교활하기까지하여 우선 그 예들을 한두 가지만 들어본다.

“서울1945”의 역사왜곡 구도 중 하나가 이승만 박사는 친일파요, 여운형은 독립운동가라는 것인데, 그러면 조선총독부의 일본인들이 바보라 이승만 박사는 체포하여 죽이려 하였고, 여운형에게는 번번이 거액의 정치자금을 제공하였다는 말인가? 조선총독부에도 정보가 있었을텐데 만약 여운형씨가 조금마한 독립운동을 하였더라도 독립운동가에 주는 정치자금은 독립운동자금인데, 그것을 여운형씨에게 제공하였을 리 있겠는가?

“서울1945”의 또 하나의 역사왜곡 구도는 이승만 박사가 박창주(김창룡)이라는 헌병경찰 출신과 손잡았으니 친일파라는 것이다. 박창주가 1940년대에 헌병경찰이었다는 것인데, 조선인 중에 헌병경찰은 없었으며, 구한말 조선군이 일제시대 조선군으로 서서히 재편되어가던 시기에 일시적으로 군인이 경찰의 역할을 맡았던 헌병경찰(오늘날의 전투경찰)제도는 1910년부터 1919년까지만 있었다. 그리고, 일제시대에 헌병경찰이 독립운동가들을 색출하기 위해 동원되었던 유일한 사건은 이승만 박사를 겨냥한 저 유명한‘105인 사건(The Christian Conspiracy Trial)뿐이었다.

1910년 7월에 프린스턴 정치학 박사학위를 우수논문으로 수여받은 이승만 박사는 미국에서 편안한 생활이 보장되었지만 배타고 바로 귀국하였다. YMCA 총무로 활동하던 1910년 10월부터 1912년 3월까지 약1년 반 동안 그의 강의를 들은 제자들 가운데에는 나중에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했던 임병직, 허정, 이원순, 정구영 등 유명인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1911년 11월, '데라우찌(寺內正毅) 총독 암살 미수'라는 핑계로 조선총독부가 조작한 이른바 ‘105인 사건(The Christian Conspiracy Trial)은 그들 시각에서 보면 이승만의 전국 YMCA 조직운동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이었기에 이승만은 검거 대상 제1호였으나 다행히 YMCA국제위원회 총무 모트(John R. Mott)박사의 개입으로 체포를 면하고 37세였던 1912년 3월 26일 서울을 탈출하여 미국으로 건너갔다.

일제시대 36년 간에 일본헌병이 독립운동가 검거를 위해 동원된 유일한 사건이 이승만 박사 체포를 위한 ‘105인 사건’이었다면 그것은 일본인들 편에서는 이승만 박사의 독립운동 조직이야말로 투철한 독립운동조직이었음을 말해 준다. '데라우찌(寺內正毅) 총독 암살 미수'건에 대해서는 일본측 주장을 우리가 다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나 거창한 독립운동 단체 이름 없이 항일정신 무장을 이승만 박사가 체계적으로 조선청년들에게 시키고 있었다는 사실이 분명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시절 키운 독립운동 제자들이 이승만 박사가 1946넌 10월 16일 환국하였을 때 다시 모여들었는데, 도대체 왜 KBS는 그들이 친일파라고 사기치는가?

박창주의 실제인물 김창룡은 1930년대 이후 국내에 거주하지 않았음에도 이 드라마는 김창룡이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을 많이 체포한 일본경찰로 등장한다. 박창주를 일본군이랬다 일본경찰이랬다 하는 엉터리 대사부터가 어이없다. 그를 친일파로 매도하기 위해 붙일 수 있는 말은 다 갖다 붙이는 모양인데 한 사람이 동시에 군인이면서 경찰인 것을 불가능하다. 그리고 작가는 의도적으로 공산주의자들과 독립투사라는 말을 번갈아가며 쓴다. 그런데, KBS 작가의 그런 이상한 논리대로라면 천연두와 콜레라균도 독립투사라는 논리가 된다. 일제 시대 이전에는 천연두를 앓은 곰보가 많았는데, 총독부가 천연두나 콜레라균을 공적으로 간주하고 싸웠으니 말이다.

KBS 정성희 작가가 쓴 엉터리 줄거리와 달리 그 당시 함흥에는 공산주의자들이 없었으며, 북한의 조선군은 소련군 남하에만 대비하고 있었다. 1904년 러시아가 조선을 합병하려 했다가 만주전선에서 일본군에 패하여 좌절된 것에 대한 원한을 품고 있었던 스탈린은 제2의 러일전쟁을 일으킬 준비를 위해 1930년대부터 연해주 조선인 강제 이주 정책을 실시했다. 그래서 조선인을 연해주에서 보는 대로 러시아군이 열차에 실어 중앙아시아에 강제이주 시키게 하였다. 사람을 짐짝처럼 군용화물칸에 실어 먹을 것도 안주고 밤낮으로 열흘 달려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에 내려놓으면 기진맥진하여 죽는 이들도 많았다. 함흥에서는 가까운 연해주의 친지들이 그렇게 갑자기 사라지는 것을 보았기에 반공정신이 왕성한 시기가 그 시기였다.

함흥에는 공산주의자들도 없解? 일제시대에는 공산당 때려잡는 도사견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박창주 실제 인물은 당시 해외 거주자였으며, 평생에 단 하루도 경찰 신분이었던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친일경찰로 등장시키는 악의는 무엇인가? 도저히 가능하지 않은 일을 실제 있었던 일처럼 방영하는 것은, 그리고 한 명이라도 그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시청자가 있다면 그것은 공영방송이 사기행각을 벌인 것이다. 더구나 단지 어떤 특정인이 몸바쳐 신생국 대한민국 군대를 공산주의의 마수로부터 지켜내었다 하여 그렇게 모함하는 것은 더욱이나 악독하다. KBS는 박창주 실제 인물과 같은 애국군인을 친일경찰로 매도할 근거를 제시하라!

박창주 실제 인물은 일본군에 입대한 사실이 없다. 조선인은 일제시대에 육사에 지원하거나 입교할 수 없었으며, 사병 입대 지원자를 받기 시작한 때는 중일전쟁이 시작되던 1937년부터였다. 그래서 조선인이 군대에 입대하려면 열우당 의원들 부친 혹은 조부들처럼 경성과 평양의 조선총독부국군병 지원자 훈련소를 수료하여야만 하였다. 예를 들어, 신동아는 2004년 9월호에서 열린우리당 신기남 의장의 부친 신상묵(辛相黙.1916-1984)씨가 1938년 3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전남 화순군 청풍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1940년 일본군에 지원, 일본군 헌병 오장(伍長.하사)로 근무했다고 보도했다. 신동아에 따르면 ‘시게미쓰구니오(重光國雄)’로 창씨 개명한 신씨는 조선총독부국군병 지원자 훈련소를 수료한 직후인 같은해 11월8일 반도호텔에서 일본군 지원병수료생 자격으로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좌담회에 참석했다.

신상묵씨의 대구사범 5기 동기생들에 따르면 신상묵씨는 조선총독부국군병지원자 훈련소를 나온 뒤 주로 조선에 주둔하는 일본군대에 배치받아 근무했으며 일본군 헌병 오장(憲兵 伍長․겐뻬이 고쪼)이 됐다. 오장은 한국군의 하사관에 해당한다. 당시 친일파 청산법을 제정하던 열우당은 열우당 의원들 부친 혹은 조부들이 일본군 헌병 오장이었다는 사실이 줄줄이 밝혀지자 일본군 헌병 오장은 계급이 낮아 친일파로 간주할 수 없다는 주장들이 방송되었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승만 죽이기를 위해 KBS드라마 서울1945가 일본군 헌병 오장을 친일파 중의 친일파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KBS야, 당시 해외 거주자였던 박창주 실제 인물이 신상묵씨처럼 조선총독부국군병지원자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은 적이 있느냐고? 아니, 조선총독부국군병지원자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은 적이 없는데 어떻게 일본군이 되는 것이 가능하냐고?

사실, 헌병 하사가 친일파라는 것은 억울하다는 당시 좌익단체들의 항변에도 조금의 근거는 있다. 일본은 조선군을 일본군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특히, 당시 법이 일본육본은 조선인 장병들에 대한 지휘 명령을 가지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러시아가 연해주의 조선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시키며 한반도 재침략을 서두르고 있던 시대에 오로지 대소 국방을 위해서만 근무하도록 조선인 지원병을 받았다. 조선총독부가 병역법을 바꾸어 조선인병사도 해외에 파병할 수 있도록 한 때는 1944년 여름 일본 근해의 섬들이 미해병대에 함락되어 일본이 다급해진 때였다.

그리고, 일본군이 독립투사들을 토벌하였다는 것도 사실보다는 거짓이 많다. 일본은 조선군을 조선군이라 불렀는데, 그 전신이 구한말의 조선군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한말 조선군 병사들이 한일합방 이후 태어난 세대로 물갈이된 해가 1937년이다. 구한말에 일본육사에 유학하였던 이들이 한일합방 후 일부는 독립군 대장들이 되었고, 일부는 조선군에 남아있었는데 독립군 대장들과 조선인 고위장교들이 서로 독립운동을 도왔다. 심지어, 독립군 가족 생계도 조선인 장교들이 자기네 봉급을 둘로 쪼개 도맡아 주었던 것이다. 이처럼 조국 광복을 위한 헌신에는 독립군과 조선군 내 조선인 장교들이 한마음 한뜻이었다. 설사 일본인 하사들이 조선인 청년들을 체포해와도 조선인 장교들이 풀어주도록 명령하였다.

1937년부터 조선인 지원병제도가 도입되었지만 지원병 수는 1년에 고작 만 명 안팎이었고, 신기남 의원 부친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달리 생계수단이 없었던 하층, 빈곤층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독립투사를 죽였다는 내용 또한 실제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진정한 의미의 독립군은 구한말 일본육사 출신들이 1910년대에 창군하여 1920년대까지 지속되었던 독립군이었다. 1937년 이후는 한일합방 이후 태어난 세대들이었는데, 그들 중에 눈에 뛸만한 독립운동가가 있었는가? 흉악범도 일제 시대에 재판을 받았으면 모두 독립투사라는 주장은 논리에 맞지 않을뿐더러, 1920년부터 군인과 경찰의 역할이 구분되어 조선군의 임무는 대소 국방에 국한되어 있었다.

1010년 한일합방되자마자 일본 본토 경찰을 조선으로 모두 데려올 수도 없는 것이요, 경찰이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지는 것도 아니므로 1919년까지는 헌병경찰제도가 도입되어 군인이 순사복을 입고 있었는데, 여운형의 건준의 치안대가 바로 헌병경찰제도를 그대로 모방한 것이었다. 그런데, 사실 군대와 경찰의 성격을 모두 지녔던 치안대는 일본 헌병경찰보다 더 잔혹하였었다. 붉은 완장을 차고 그들은 일제시대에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던 애국동포들을북한에서는 도끼로 때려죽였고, 남한에서도 죽창으로 찔러 죽이는 양민학살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여하간, 1919년에 헌병경찰제도는 끝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1937년 이후 입대자들을 무조건 헌병경찰로 간주하여 친일파로 매도하는 것은 자신의 부친 혹은 조부가 헌병 오장이었던 좌익 인사들에게도 억울할 것이다. 더구나, 박창주 실제인물은 조선총독부국군병지원자 훈련소에 입소한 적이 없었기에 일본군 신분이 전혀 불가능하였다. 조선총독부국군병지원자 훈련소 수료후 조선인 병사들 중 일부가 관동군에 파견되는 일도 있었지만 그 경우 먼저 조선총독부국군병지원자 훈련소를 수료하여 일본군 계급장을 달아야 했다. 그러나 박창주 실제인물은 일본군 계급장을 달지 않았다. 그는 만주국군 헌병이었을 뿐이다.

사실은 그들의 매국적 판단으로 독립군을 가장 많이 죽인 자들은 여운형과 박헌영이었다. 1920년대에 러시아가 군자금을 많이 상납하면 조선해방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하였고, 1930년대에 만주국과 티베트 등 주변국 침략을 노린 중국공산당이 항일연군에 입대하면 군사지원을 해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조선인들이 이 나라 저 나라에 공산당을 창당하였는데, 한반도 재침략 기회를 노리던 소련과 만주국 침략 기회를 노리던 중국이 손을 잡고 코민테룸에서 일국가 일당 원칙을 발표하였다. 결국, 만주국과 티베트 등 중국 공산당 침략 목표국들의 현지인들과 조선인들이 중국공산당에 예속되었는데, 동북항일연군이란 중국 공산당 마적단이 자기네 부하가 된 독립군들에게 조선족 마을 약탈을 지시하였다. 불복하면 독립군을 학살하였는데 이런 방법으로 학살하였다.

밥을 흘려도 민생단(어렵게 구한 식량을 허비하니까), 밥을 설구거나 태워도 민생단, 밥을 물에 말아 먹어도 민생단(화장실에 자주 가는 것은 전투력을 약화시키니까), 배탈이 나거나 두통을 호소해도 민생단, 사람들 앞에서 한숨을 쉬어도 민생단(혁명의 장래에 불안감을 조장하니까), 설사를 해도 민생단, 고향이 그립다고 말해도 민생단(민족주의와 향수를 조장하니까), 일이 어렵다고 불평해도 민생단, 일을 너무 열심히 해도 민생단(정체를 감추려고 일을 열심히 한 것이니까), 일제의 감옥에서 처형되지 않고 살아돌아와도 민생단, 오발을 해도 민생단, 가족 중에 민생단 혐의자가 나와도 민생단, 민생단 혐의자와 사랑에 빠져도 민생단, 옷을 허름하게 입어도 민생단으로 몰리는 등 무고한 사람들을 일제의 간첩으로 모는 꼬투리는 끝이 없었다.

이런 방법으로 동북항일연군이 독립군을 멸절시켰으며, 중국인 상관 명령으로 동포가 동포를 간첩으로 몰아 학살하는 일에 앞장섰던 이가 김일성이었다. 그래서 동북항일연군이라는 마적단이 1935년에 등장한 이후로는 조선족 인심이 돌아섰기 때문에 공산당 계열인 진정한 독립군마저 보금자리를 잃고 소멸되었다. 사실, 관동군은 만주에서 독립군과 평화롭게 지냈다. 1920년대까지는 어떻게 무장 독립군이 만주에서 독립군 사관학교를 운영하며 만주 전지역을 활보할 수 있었는가? 그것은 만철 경비가 본연의 임무였던 관동군은 독립군이 무엇을 하든 전혀 상관하지 않았으며, 독립군도 본국 여행의 유일한 수단이었던 만철을 공격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독립군을 학살로 멸절시킨 집단은 동북항일연군이란 공산당 마적단이었으며, 마적단이 조선족 마을을 약탈할 때 자국 국민 보호를 위해 만주국군이 출동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동북항일연군이란 마적단이 후에 팔로군으로 재편되어 만주국을 침략하였을 때 만주국군과 관동군 연합작전을 위해 관동주 이외 지역으로 출동한 적이 간혹 있었다. 그러나, 박창주 실제인물은 일본군도 관동군도 아니었다. 일만군 연합작전이 있었다는 것을 근거로 만주국군 복무 경력을 관동군 복무 경력으로 말하는 일이 종종 있었기에 만주국군과 관동군을 혼동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박창주 실제인물은 조선총독부국군병지원자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은 적도 없고, 관동군이 만주국 국적 소지자를 입대시킬 수도 없었다. 조선인이 일본군에 적을 두는 길은 경성과 평양의 조선총독부국군병지원자 훈련소에 입소하는 것뿐이었으며, 그 법을 관동군이 어기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훗날 국무총리가 된 정일권씨도 만주국군 헌병대 대위였거니와 김창룡이 만주국군 헌병이 되기 위해 만주국 신경에 있는 헌병교습소에서 교육을 받은 해가 1941년이었으며, 1939년부터는 만주에 독립군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상식이다. 민심이 돌아선 조선족이 마적단이 나타나는 대로 신고하였기에 김일성마저 1939년에 다섯 명을 데리고 블라디보스톡으로 이주하지 않았던가. 더구나 김창룡이 근무한 지역은 북만주의 만소 국경 지대로 그곳은 독립군이든 조선인 마적단원이든 간 적이 없었다. 공산당도 천연두도 콜레라도 독립투사라는 문동기의 주장도 논리적으로 맞지 않거니와 박창주 실제인물 김창룡이 조선인 공산주의자 손가락 하나 다치게 하는 일이 있었다는 것을 불가능하였다. 그는 단지 소련군의 남침을 막는 대공업무에 공을 세웠을 뿐이었다.

생각해 보라. 만약 김창룡이 일본군이었다면 일본군이 본국으로 귀국할 때 함께 귀국하지 않았겠는가? 일본군은 안전 귀국이 보장되어 있었는데 누가 소련군 치하에 남아있으려고 일본군 사령부를 탈영하겠는가? 그리고, 정말로 그의 신분이 일본군 신분이었다면 소련군이 체포하지 못한다. 이미 종전이 완료되었기 때문이고 미소연합군 합의에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소련군이 그를 체포하였을 때 그의 죄목은 그가 일본군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만주국군 신분으로 만소국경지대에서 소련의 한반도 침략 길목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이 이러할진대 도대체 KBS는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박창주가 혹은 그 실제인물이 무수한 독립투사들을 죽였다고 방영하여 그의 명예를 훼손하는가?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그분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며, 그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시청자들의 증오의 대상이 되게 하는 것인지 KBS는 어서 답하라!







우남 이승만의 생가, 최초로 출간하신 민족신문, 옥중생활, 프린스턴 정치학 박사학위 취득, 독립운동 등 그 시절의 희귀 사진 2집을 보시고 싶으신 분은 지금 사진으로 보는 이승만 박사의 독립운동사를 클릭하세요.

이승만 박사의 서울말과 KBS 드라마의 거짓말



광복군을 주적으로 삼던 마적단이 독립군이라는 K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