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tor Piazzolla

2024. 10. 23. 17:20팝아티스트

 
 

★ 아스토 판탈리온 피아졸라(Astor Pantaleon Piazzolla, 1921.3.11 - 1992.7.4)
: 반도네오니스트, 피아니스트, 지휘자, 작곡가 그리고 편곡가.



피아졸라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탱고 음악가일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알려진 콘서트 연주자, 실내악단, 교향악단이 즐겨 연주하는 곡의 작곡가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는 탱고를 그 한계이상으로 몰고 갔었다. 미학적으로 말해서 지금까지 그의 경향을 따라갔든 그것을 그저 이해했든지 간에 그 많은 탱고 연주자들은 피아졸라만큼의 수준은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과 후에 따랐던 사람들은 비록 부분적일지라도 그의 영향에서 벗어나 그의 작품 이후의 새로운 길을 찾는 것을 어떻게 풀 것인가 하는 무거운 짐에 직면했다. "피아졸리즘 이후"는 오늘날까지 그들의 대부분은 중요하나 충분하지 않는 노력의 수집이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탱고 환경에서 1938년에 시작된 그의 출현은 정확히 1930년 즈음에 시작된 탱고의 권태기에서 빠르게 깨어나기 시작한 바로 그때이다. 그런 환경과 피아졸라의 관계는 사랑과 경멸, 열정과 원한의 혼합으로 인해 매우 난해하다. 그렇게 평범과 보존에 대항한 실로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한 예술가의 혁신적인 분투는 탱고 안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어두운 교외 클럽이나 카페 무대 위에서 자신의 오케스트라나 혹은 다른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통해 그의 노력은 탱고 안에 깊게 뿌리 내렸다. 포스트 피아졸란은 이미 더 이상 이러한 진창에 발을 들여 놓는 각고의 노력을 하지 않는다.

50년대 중반 이래, 아스토가 했던 모든 것 안에 있는 이 뿌리내림과 심원한 탱고의 정수에도 불구하고, 심지어는 다른 종류의 음악을 연주할 때 조차도, 명예훼손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그 아끼는 구절이 퍼져 나갔다. 그 구절은 "피아졸라는 탱고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키에티즘(정적주의)와 완고함의 절대적 표현이다. 이런 저항할 수 없는 적대심을 가진 이들 중에 한 사람이었던 훌리오 드 카로(Julio De Caro)는 그의 존경심의 발로에서 다양한 탱고 곡들을 썼다. 이로 인해 모든 표준에 도전했던 홀리오는 그런 거칠고 호전적인 집단에서 발생한 찬양의 증거로서 중요한 인물이 된다.

아스토 판탈리온 피아졸로는 1921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서쪽으로 420km에 털어진 아틀란틱 해양에 있는 어장, 마르델플라타(Mar del Plata)에서 태어났다. 마르델플라타는 그 시절에는 귀족들의 바다 휴양지였지 아직 대중적이지 않았던 곳이였다. 1924년 그와 그의 부모는 뉴욕으로 이사한다. 1929년 그는 반도네온이 전시된 곳에서 반도네온과 조우한다. 1932년 그는 그의 첫번째 탱고 작품인 "La catinga"를 작곡하는데 전혀 주목받지는 못했고 "El dia que me quieras"에 소속된 초보 배우로서 카를로스 가르델(Carlos Gardel)이 주연한 영화에 출연한다.

고향인 마르델플라타에 돌아왔던 1936년에 그는 그 지역 그룹에 참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바르다로의 6인조 형식을 모방한 사람을 이끄는 것까지 시작한다. 이 바르다로의 6인조 형식은 1933년 이래 형식의 대담한 개선을 먼저 나서서 시도했으나 레코딩 회사들은 그것을 무시했었다. 그때 바이올리니스트 엘비노 바르다로(Elvino Vardaro)가 리더였는데 후에 수년을 피아졸라와 함께 연주하곤 했다.

1938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도착한 피아졸라는 다양한 오케스트라들에 단기간만 머문 후에 그는 1937년에 창단된 반도네오니스트 아니발 뜨로일로(Anibal Troilo)의 오케스트라에 들어간다. 그리고 탱고 붐이 일던 그후 20년 동안 메이져 단원으로 연주했다. 반도네온 섹션에서 연주하는 것을 제외하고도 아스토는 편곡도 했으며, 무책임하면서도 재능이 넘치는 음악인, 오르란도 곤니(혹은 고니)Orlando Gogni(Goni)의 신속한 대타를 위해 임시 피아니스트로도 활동했다.



Troilo는 피아졸라를 가르쳤지만 또한 그의 스타일이 사람들이 수용할 수 있는 청취력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그 한계 안에서 그가 유지할 수 있게끔 그의 (너무 대중을 앞서가곤 하는)날개를 잘라내기도 했다.

아스토의 혁식전인 전진은 1944년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시 그는 가수 프란시스코 피오렌티노(Francisco Fiorentino)의 음악 반주를 해주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되기 위해 Troilo의 곁을 떠났었다. 이것은 매우 인기있는 바이올리니스트와 독특한 재능을 지닌 음악가들과의 특별한 관계의 시작이었다. 이 파트너쉽은 걸출한 연주(특히 "Nos encontramos al pasar", "Viejo ciego", "Volvio una noche" 같은 탱고 곡들)가 있는 24장의 레코드를 제작하게 했다. 이 시리즈는 피아졸라가 녹음한 "La chiflada"와 "Color de rosa" 첫 두곡의 연주도 포함되어 있다.

이런 첫 경험 이후, 아스토는 1946년 자신만의 오케스트라를 만들었는데 장르의 전통적 스탠다드 넘버에 제한 받을 때까지 유지했다. 공들인 오케스트라들 사이에서 이렇게 시작을 한 이후로 오라시오 살간(Horacio Salgan), 프란씨니-폰티어(Francini-Pontier), 오스발도 푸글리에쎄(Osvaldo Pugliese), 알프레도 곱비(Alfredo Gobbi), 그리고 뜨로일로까지 함께하며 자신의 위치를 쌓아갔다. 그의 가수들 중에서는 알도 캄포아모르(Aldo Campoamor)가 걸출한 가수가 되었다. 1948년까지 그는 30개의 앨범을 녹음했으며 그 중에 "Taconeando", "Inspiracion", "Tierra querida", "La rayuela", 또는 "El recodo"와 같은 시적으로 뛰어난 탱고 연주가 있다. 이들 레코딩 중에서 우리는 피아졸라 본인이 만든 다섯 개의 작품을 집중 조명할 수 있다. 특히 "Pigmalion"와 "Villeguita"의 경우에는 그가 천재적인 작곡가라고 그의 존재를 알리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곧바로 그의 깊은 열심과 독창성과 함께 어디에도 유례가 없는 감동을 지닌 탱고곡인 "Para lucirse", "Preparense", "Contratiempo", "Triunfal", "Contratiempo", 그리고 "Lo que vendra" 등의 후속작이 무대에 올려졌다. 이 넘버들은 뜨로일로, 프란씨니-폰티어, 오스발도 푸글리에쎄, 그리고 조세 바쏘(Jose Basso)와 같은 일류 오케스트라들의 레파토리들을 포함하고 있는데 피아졸라 본인이 대부분의 시간을 들여 편곡한 곡들이다. 한편, 그의 오케스트라는 1950년과 51년 사이 4장의 앨범을 레코딩했다. 이들 중에 두개 - "Triste"와 "Chique" - 는 주목할 만한 78 r.p.m. 음반 녹음 방식이었다.

50년대 초반 피아졸라는 반도네온과 피아노사이에서 주저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클래식 음악에 충실하려는 생각으로 작곡가로서 작업하기 시작한다. 그가 파리 음악학교에서 수여하는 장학금을 타면서 마음에 두던 이 아이디어들을 가진 채 1954년에 프랑스로 옮기게 되는데, 음악학자 나디아 불랑제(Nadia Boulanger)는 더욱 더 그 자신 깊은 내면에서 오는 무언가로부터 그의 예술을 발전시키라고 그를 설득하게 된다. 그는 파리 오페라 오케스트라의 현악기 파트와 함께 1955년에 파리에서 16곡을 녹음하게 되는데, 피아노에는 마샬 소랄(Martial Solal)이 함께 했으며 피아졸라도 두 곡을 제외하고 전부 직접 반도네온을 연주한다. "Nonino"(그의 아버지의 죽음에 작별인사로 다시 손을 본 "Adios, Nonino"의 원곡), "Marron y azul", "Chau, Paris", "Bando", "Picasso", 그리고 그 외 여러 탱고 곡들 안에는 놀라운 멜로디 구조가 폭포처럼 쏟아진다.


아르헨티나로 돌아와서, 피아졸라는 두 가지 길을 걸으려 했다. 첫째는 "Tres minutos con la realidad", "Tango del angel", 그리고 "Melancolico Buenos Aires"와 같은 현악 오케스트라와 반도네온을 위한 악보와 관련있다. 이것은 그가 이미 예전의 마음가짐을 바꾸며 그 자신의 탱고 곡들에서 새로운 계통을 앞서 시도하려 할 때 함께 했던 그 악보들이다. 그때까지 다른 작곡가가 만든 현시대 경향에는 뒤떨어지는 전통적 탱고 곡과 그 외 곡들을 개작하여 그의 레파토리에 또한 포함시켰다. 오케스트라는 또한 가수 호르세 소브란(Jorge Sobral)을 영입했는데 아스토가 생각한 그의 혁신적인 계획들에는 가사를 입힌 탱고 곡도 포함시키길 원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하나는 피아졸라가 메이져급 회사를 키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때 높은 수준의 연주자들을 모아서 Octeto Buenos Aires를 결성한 그는 그때까지 잘 알려진 모든 탱고 곡들을 뒤엎는 작업을 했다. 몇몇 사람들은 그 8인조를 그의 모든 경력의 예술적 절정이라고 여긴다. 이 그룹은 2개의 10인치 LP만을 녹음했는데 무엇보다도 "El Marne", "Los mareados", "Mi refugio", 또는 "Arrabal"과 같은 위대한 전통 탱고를 재해석하는데 헌신했다.

1958년 피아졸라는 뉴욕에 정착하는데, 그는 뉴욕에서 힘들게 생활했다. 불행했던 그 시기로부터 그의 재즈-탱고 실험이 나왔는데 그는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상업적 허용때문에 극도로 심하게 스스로 비판했다. 그러나 1960년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돌아왔을 때 그는 그의 경험에서 필수불가결한 그 그룹의 다른 이들을 모았다. Quinteto Nuevo Tango(반도네온, 피아노, 바이올린, 전자기타 그리고 더블 베이스)는 대중의 어떤 타입 - 그들 중에는 대학생 청중들도 있었다. - 에도 따뜻한 열성을 받는다.

그 조합의 멤버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했는데, 피아졸라가 다양한 레파토리를 다루면서 새로운 탱고를 받아들여 갔기 때문이었다. 헥토르 드 로사스(Hector de Rosas)의 목소리와 함께 "Milonga triste"의 걸출한 연주곡들과 특히 "Cafetin de Buenos Aires", "Maquillaje", "Nostalgias", 그리고 "Cuesta abajo" 와 같은 탱고 곡들을 이루어 냈다.

1963년 그는 축소된 Nuevo Octeto로 돌아왔는데 이전 8인조만큼 높은 수준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러나 새로운 음색(플룻, 퍼커션, 보컬)을 소개하는 견인차는 되주었다. 그런 격렬했던 몇 년의 다양한 실현들 중에서, 1965년에 특출한 두 가지 이벤트가 일어났다. 하나는 뉴욕 필하모닉 홀에서 Quintet가 콘서트를 열였던 것인데, 여기서 "del Diablo" 시리즈와 완성된 "del Angel" 시리즈, 게다가 "La mufa" 시리즈가 소개됐다. 더 나아가 그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가 쓴 시와 가사(마을 변두리에서 전래된 검술가의 신화에 관한)에 따라서 예외적인 작품 시리즈를 가수 에드문도 리베로(Edmundo Rivero)와 배우 루이스 메디나 카스트로(Luis Medina Castro)와 함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녹음했다. 그 해는 Cuatro Estaciones(사계절)에 맞는 형식을 가져다 준 중요한 탱고 곡들 중 첫번째 곡인 "Verano porteno"를 소개한 해이기도 했다.


또 다른 하나는, 그가 시인 호라시오 페레르(Horacio Ferrer)와 함께 그의 프로덕션을 시작했다는 것인데, 그는 소규모의 오페라 Maria de Buenos Aires(아름다운 곡 "Fuga y misterio"가 들어 있는)를 호라시오 페레르와 함께 창작했으며, 다른 일련의 탱고 곡들도 함께 작업했다. 1969년 그들은 "Balada para un loco"와 "Chiquilin de Bachin"을 띄었다. 이 두 작품은 피아졸라에게 갑자스레 커다란 성공을 안겨주었는데, 이는 그가 경험해 본 바 없는 것이었다. 그 해는 그가 그 곡들을 여가수 아멜리타 알타르(Amelita altar)와 가수 로베르또 고제네체(Roberto Goyeneche)와 녹음했던 해이기도 했다.

놀랄만한 LP "Concierto para quinteto"를 녹음한 다음 해인, 1972년 피아졸라는 그를 위한 또 다른 좋은 환경에서 Conjunto 9을 결성한다. Conjunto 9과 함께 그는 "Musica contemporanea de la ciudad de Buenos Aires"(도시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동시대의 음악)를 녹음하는데, 마치 탱고의 정수(tanguidad)의 결과를 뛰어넘는 듯 했다. 이 nonet는 놀랄만한 곡들인 "Tristezas de un Doble A", "Vardarito", 그리고 onda nueve"가 포함된 앨범을 녹음했다. 아르헨티나를 다시 떠난 후에, 아스토는 많은 결실이 있었던 이탈리아 무대를 시작했다. 거기서 그는 다른 넘버들 중에서 특히 여가수 밀바(Milva)와 함께 한 "Balada para mi muerte"와 "Libertango", 그리고 뜨로일로의 죽음을 전해듣고 충격을 받았던 1975년에 작곡한 가슴 아픈 곡 "Suite troileana"를 소개했다.

3년 후에 그는 아르헨티나에서 열렸던 월드컵을 의미하는 시리즈 곡들을 작곡하고 오케스트라와 녹음했다. 이때가 1976년에 세워진 잔인한 군부 독재 시절 동안이었는데 정치적인 이유로 이 시합이 이용됐었다. 이 사건은 피아졸라의 한탄할 만한 뼈아픈 실수였다.


1979년에 그는 그의 5인조와 함께 다시 한번 다른 넘버들 중 특히 "Escualo"를 소개했다. 긴 세월 내내 아스토는 다른 분야 출신의 예술가들과 그의 재능을 결합시켰다. 예를 들면 조르쥬 무스타키(George Moustaki) (아스토는 그를 위해 아름다운 노래 "Hacer esta cancion"과 "La memoria"를 썼다.), 제리 멀리건 (Gerry Mulligan), 그리고 게리 버튼(Gary Burton)과 같은 예술가들과 말이다. 이런 다른 다양한 연주들 중에서, 1987년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열렸던 quntet의 성대한 리사이틀은 녹음이 되었다. 마지막 피아졸라의 조합은 6인조였다는데 두번째 반도네온이 5인조에 추가됐으며, 바이올린을 첼로로 대체하였다.

콘체르트(협주곡) 작품들과 40편의 영화의 사운드트랙을 제외하고도 아스토는 이 짧은 리뷰에서는 생략된 많은 소품(탱고이든 아니든)들을 생각해냈다. 그 중에는 "Juan Sebastian Arolas", "Contrabajeando" (뜨로일로와 함께 씀), "Tanguisimo", "La calle 92", "Oblivion", "Anos de soledad", "Los pajaros perdidos", "Lunfardo", "Bailongo", "Vuelvo al Sur", 그리고 "La camorra" 시리즈들이 있다.

피아졸라의 거대한 작품들 속으로 뛰어 드는 것, 그의 음악 한곡, 악보들, 편곡들을 찾는 것, 혹은 새로운 것들을 고안해 내는 것은 오늘날 세계 도처의 음악가들에겐 매혹적인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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