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alia Rodrigeus
2024. 10. 23. 17:15ㆍ팝아티스트
'파두(fado)'라는 말의 사전적 정의는 라틴어‘Fatum'에 어원을 둡니다. 즉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을 뜻합니다. 단순해 보이는 이 단어에는 풍부하면서도 깊고 복잡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파두는 적어도 리스본에서는 도시의 까페 스타일의 음악으로 정의될 수 있으며 그리스의 렘베티카나 블루스 그리고 오리지널 탱고와 상응하는 스타일의 음악입니다. 렘베티카와 마찬가지로 파두가 다루는 주요 소재는 ’삶의 거친 현실‘입니다. 또 반주악기 역시 렘베티카(부즈키)와 마찬가지로 기타(기따라-열두 줄로 멜로디를 담당한다)와 비올라(여섯 줄로 화음을 담당한다)가 쓰입니다. 하지만 렘베티카가 운명에 저항하는 절규라면 파두는 운명에 대해 순응합니다. 파두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힘에 의해서 인간의 욕망이나 계획이 좌절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는 것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숙연함과 품위를 잃지 않은 채 노래합니다. 이러한 파두가 전적으로 포루투갈을 대표하는 음악 형식으로 완성되기까지는 아프리카적 요소와 브라질적 요소 그리고 켈트적인 요소와 포르투갈적인 요소의 만남과 용해라는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19세기초쯤 브라질로부터 상당수의 포르투갈 사람과 흑인과 혼혈인(krioulo)들이 리스본의 알파마(Alfama)거리에 확고한 터전을 이루며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이 거주자들로부터 '포파(fofa)'와 ‘룬둠(lundum)'이라는 아프리카에 뿌리를 둔 노래와 춤이 전파되었는데, 대개 외설적이고 거친 욕망을 표현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마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보카지구에서 탱고가 탄생했을 때 탱고를 퇴폐적이고 음탕스러운 것으로 묘사했던 것처럼 리스본의 알파마 거리에서 꽃을 피운 이들의 음악에 대한 인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후에 ’룬둠‘과 ’포파‘의 요소들은 파두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파두의 기본적인 요소는 기원에 있어서 아프리카적인 것으로 처음엔 파두라는 말은 풍부한 정서적 호소력을 지닌 기타 반주에 의한 아프리카의 댄스가 응용된 것이었습니다. 다음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아카데믹하면서도 민속적인 특징을 지닌 포르투갈의 장구한 시와 문학의 전통입니다. 4행시와 모디나(modhina)혹은 발라드 전통은 19세기 초기 이전까지 포르투갈 문화의 중요한 일부였습니다. 대중적인 포크의 4행시는 대체로 농촌 공동체에서 민속을 전승하기 위해서 그리고 특별한 축일을 기념하기 위해 ,혹은 어린이들의 이야기를 담거나 소멸하지 않는 영원한 사랑을 기리기 위해서 많은 형태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러한 주제들은 순수한 형태의 포크와 파두의 서정성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아마도 ’룬둠‘과 같은 이전의 오래된 아프리카적 전통은 거의 걸러지고 더욱 구슬픈 요소로 대체됐으리라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댄스, 모디나, 4행시는 파두의 리듬과 형식, 그리고 내용을 이루는 파두의 3대 요소로 자리잡았습니다. 그리고, 역사의 안개 속으로 희미하게 사라진 어떤 시점에서 이러한 세 가지 요소들이 함께 융합되고 발전하면서 파두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알파마 파두와는 다른 파두의 또하나의 갈래가 있습니다. 꼬임브라 대학을 중심으로 형성된 이른바 '꼬임브라 파두(Coimbra Fado)'입니다. 꼬임브라 파두는 "고도로 숙달되고 양식화된(highly rehearsed and stylized)" 형식이라고 표현됩니다. 포르투갈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교, 그것도 의과대학 중심으로 목적의식적으로 보존하고 재해석한 음악이므로, 형식이 세련되었을 뿐만 아니라 가사도 지성적입니다. 꼬임브라 파두는 1920-30년 경 안또니우 메나누 박사(Dr. Antonio Menano)를 중심으로 '파디스따'와 '기따하리스따'를 낳았고 레코딩도 남겼습니다. 이들 그룹은 파두의 한 갈래를 형성했을 뿐만 아니라, 포르투갈의 농촌 지역 -- 자료를 뒤져보니 베이라 바이샤(Beirra Baixa)와 알란떼쥬(Alantejo)같은 지역 -- 의 전승 민요를 발굴하는 작업도 병행했습니다. 말하자면 꼬임브라 파두는 지식인들과 대학생들을 주축으로 파두가 현대적 대중음악으로 진행되는 것과는 다른 방향을 취하면서 '민중 예술'의 양식으로 다듬은 케이스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떤 갈래이든 파두는 고된 삶을 노래하면서도 자신의 운명에 대처해 나가기보다는 운명을 인정하는 음악입니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은 단조의 멜로디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정서는 싸우다지(saudade)라는 단어로 압축됩니다. '진정한 갈망'이라고 번역되는 이 단어는 가수나 연주자뿐만 아니라 청중의 태도까지도 결정하는 파두 특유의 정서입니다. 싸우다지가 "한국인의 '한(限)'의 정서와 유사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은 듯한데, 해석이야 각자의 입니다. 리스본의 알파마 거리 빈민촌의 파두가 거리의 매춘부와 일용직 노동자, 뱃사람들이 즐기는 노래에서 세계인들의 음악으로 사랑 받을 수 있기 위해서는 오직 한 사람, ‘파두의 여왕’ 아말리아 호드리게스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아말리아 호드리게스는 1920년 7월(정확한 탄생일은 가족들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리스본의 알파마 거리의 빈민촌에서 가난한 노동자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에디뜨 삐아프가 스무 살이 되기까지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며 행인들의 동정을 구했던 것처럼 아말리아도 십대시절에는 리스본 알칸타라 항구에서 어머니를 도와 행상을 하며 거리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노래하며 보내야 했습니다.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던 아말리아는 라디오에서 우연히 카를로스 가르델의 탱고를 듣게 되면서 가수로서의 꿈을 갖게 되었습니다. 가정 형편이 갈수록 기울면서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지만, 낮에는 행상을 하고, 밤에는 허름한 선술집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가수의 꿈을 키워 나갔습니다. 뛰어난 미모와 예술적 재능으로 아말리아는 일찍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에디뜨 삐아프가 거리에서 노래하다 카바레의 경영주에 눈이 띄어 발탁된 것처럼 아말리아 호드리게스도 역시 아말리아의 노래를 듣고 감명을 받은 레띠루 다 쎄베라(Retiro da Severa) 카바레의 지배인이 그녀를 자기 카바레에서 노래하게 함으로써 프로가수로서의 첫발을 디딜 수 있었습니다. 이때 아말리아의 나이가 열 아홉. 본격적인 가수생활을 하면서 아말리아는 파두의 역사를 새롭게 쓰기 시작했습니다. 1940년 스페인 공연으로 갈채를 받았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포르투갈 각지를 누비면서 노래했습니다. 그리고 1944년에는 브라질의 리우에서 성공적인 공연을 마쳤고, 1949년 처음으로 유럽문화의 중심 파리를 방문해 샹젤리제 극장 무대에 설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정작 포르투갈에서는 1951년까지 레코딩을 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매니저를 맡은 인물인 쥬제 드 멜루(Jose de Melo)가 '음반을 판매하면 청중들이 공연에 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말리아 호드리게스의 명성은 1954년에 비로소 세계적인 것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 해에 제작된 프랑스 영화 <따뀌 강변의 연인들(Les Amants du Takus)>의 무대공연 장면에서 아말리아는 검은 드레스에 검은 숄로 몸을 감싸고 나타나 깊은 감정을 자아내는 목소리로 ‘검은 돛배’(Barco Negro)를 노래했던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그녀가 ‘검은 돛배’를 부르는 장면은 관객들에게 새로운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가면서 전 유럽에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아말리아 호드리게스라는 이름은 ‘파두’와 더불어 세계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행운이라고 하기엔 엄청난 결과였습니다. 우리는 그녀의 위대한 성공의 원인을 그녀 자신에게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뛰어난 미모와 더불어 신이 선물한 강렬한 개성과 천부적인 목소리에서 말입니다. 그녀는 놀라우리 만치 넓은 음폭의 목소리와 미묘한 음색의 조절을 통해 음악의 아름다움과 정서적 깊이를 창출해내었습니다. 1939년부터 시작된 오랜 경력 속에서 아말리아의 스타일은 전통적인 파두계에 논란을 불러일으킬 만큼 혁신적인 것이었습니다. 아말리아의 파두는 전통적인 흐름에 닿아 있으면서도 전통과는 또다른 혁신적인 것이었기에 모두가 충격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아말리아 호드리게스라는 이름은 한마디로 파두로 정의되었으며 파두의 결정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1960년대 중반 비틀스와 로큰롤 선풍이 불어닥치면서 파두 역시 유럽의 다른 나라의 '국민적-민중적 대중음악'(예를 들어 샹송, 칸초네)과 비슷한 운명을 맞이했습니다. 파두는 청년들의 새로운 범세계적 취향과 점점 거리가 멀어져 가면서 인기도 시들어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말리아 호드리게스만은 비교적 건재했습니다. 무려 170종의 앨범을 레코딩했고, 영화에도 출연했고, 세계 각지를 돌며 순회공연을 계속 가졌습니다. 1990년대에 은퇴하여 조용한 삶을 살아간 파두의 여왕은 1998년 리스본 엑스포에서 잠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고, 그로부터 1년 뒤 '포르투갈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1999년 10월 6일 아말리아 호드리게스가 79살의 나이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을 때 포르투갈의 수상 안또니우 구떼레스(Antonio Guterres)는 3일간의 국장(國葬)을 선포했습니다. 한 나라의 통치자가 한 가수에 대해 '포르투갈의 목소리'라고 칭한 것은 단지 고인에 대한 예의 때문만은 아닌 듯합니다. 세상 어떤 나라에서도 '여가수'가 세상을 하직했을 때 '나라의 목소리'라는 칭호를 내린 경우는 없었으니까요. 그녀가 성공한 비결은 도회적 분위기의 알파마 파두와 농촌 분위기의 꼬임브라 파두를 결합하면서, 단지 실패한 사랑에 대한 비가를 넘어서 아메리칸 소울처럼 영혼으로부터의 절규를 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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