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iber And Stoller

2024. 9. 30. 11:51팝아티스트

데뷔/결성: 1950년대

활동/시기: 1950년대

멤 버: 제리 리이버, 마이크 스톨러

가수가 있다면 곡을 쓰고 음반으로 만드는 작업자들이 있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1950년대 흑인 블루스에서 발전해온 로큰롤을 대중화하면서 20세기 후반을 로큰롤 시대로 물들인 일등공신이다. 하지만 그는 곡을 쓰지 못했다.

그럼 그가 부른 로큰롤 <Hound dog> <Jailhouse rock> <She's not you> 등의 곡을 만든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막후의 전설이 바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 및 프로듀서 팀으로 일컬어지는 제리 리이버와 마이크 스톨러 콤비였다.

백인 엘비스 프레슬리가 흑인 블루스를 소화해 흑백통합을 일궈낸 것처럼 리어버와 스톨러도 백인으로서 50년대에 흑인 블루스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이 블루스에 리듬을 가미한 역동적인 음악인 로큰롤의 시대가 도래할 것을 확신했다.

하지만 백인 수요자들은 검둥이들의 이 조야한 음악을 좋아할 리 없었다. 리어버와 스톨러의 작업 방향은 바로 이 부분에서 시작되었다.

두 사람 모두 1933년 미국 동부출신으로 LA에서 만나 의기투합하여 비상을 꿈꾸던 때 그들은 아직 어린 틴에이저였다. 앙팡 테리블 또는 요즘 말로 하면 '튀는 10대'였다고 할까. 하지만 흑인문화에 주목하고 있었던 그들은 당돌하게 리듬 앤 블루스(R&B) 가수들을 상대로 곡을 쓰기 시작했고 마침내 나이 열 아홉이던 1952년에 첫 히트곡인 찰스 브라운의 <Hard Times>과 나중 비틀스도 부른 명작 <Kansas city>를 발표했다.

작곡을 한 스톨러의 의중은 이러했다. “블루스의 평범한 코드로 곡을 써선 곤란하다. 거기에 멜로디를 집어넣어야 한다.” 다시 말해 '그래야 백인을 포함한 다수대중이 블루스를 들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음반을 내는 과정에서 그때까지는 남에게 의존했던 그들은 빅 마마 쏜튼의 <Hound dog>을 계기로 스스로 음반을 프로듀스하기 시작했고 그러한 '독립'의 방편으로 직접 돈을 투자해 스파크(Spark)라는 레이블을 설립했다. 여기 소속된 R&B 그룹 로빈스(Robins)는 서부지역에서 제법 탄탄한 인기를 누렸다. <Smokey Joe's Cafe>는 바로 그들의 1955년 히트곡이다.
이 노래가 널리 알려진 이유는 전국 배급망을 가지지 못했던 그들이 굴지의 어틀랜틱(Attlantic) 레코드 산하의 애트코 레이블 도움으로 판을 전국에 판매할 수 있게 된 덕분이었다(소울과 초기 메탈의 산파역을 한 어틀랜틱은 이미 리이버와 스톨러의 출중한 감각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로빈스 매니지먼트측이 음악방향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자 두 사람은 자신들의 음악이데올로기를 실현하기 위해 직접 가수를 키우게 된다. 그들이 코스터스(Coasters)였다. 이 시점에서 리이버와 스톨러는 흑인음악인 R&B와 로큰롤에 대한 백인들의 거부감을 상쇄하려는 노력으로 '재미있고 말끔한' 곡을 써내기 시작했다.

코스터스(Coasters)는 천재들의 도움으로 찬란한 히트퍼레이드를 전개했다. <Young blood>, <Searchin'> 그리고 전미 차트 정상에 오른 <Yakety Yak>, <Charlie Brown>(국내 최초의 댄스가수 이금희가 부르기도 했다) 등 발표하는 곡마다 전국적 히트를 기록했다. 클로버스를 거쳐 영국 그룹 서처스에 의해 널리 알려졌으며 코스터스도 1972년에 레퍼토리로 삼은 추억의 명곡 <Love potion #9> 역시 리이버와 스톨러의 곡이었다.

놀라운 점은 이들 곡에 '청춘 만인들이 공감할 예리한 세대감각'을 담아냈다는 사실이었다. <Charlie Brown>만해도 고등학생이 교내 체육관에서 주사위 노름하고 강당에서 담배를 피우며 '왜 사람들이 나만 집적거리는 거야?'며 불평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백인이건 흑인이건 청소년들이라면 무조건 좋아했다. 부모들도 흥겨운 리듬에 신이 났고 재미있어 했다. 대중음악 학자 도널드 클락은 “이 무렵 리이버와 스톨러는 인종과 세대를 초월하는 모든 것을 해냈다”고 평가했다.

리이버와 스톨러는 코스터스의 곡을 가리켜 “사람들이 너무 웃어서 플로어에 쓰러져 배를 움켜잡고 방을 데굴데굴 구르게 할 노래들”이라고 자랑했다. 하지만 그 웃음 속에 저류하고 있는 세대감각으로 코스터스는 역사에서 '코미디그룹' 이상의 높은 위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제 로큰롤에 대한 기성세대의 저항감은 말끔히 가셨다. 그들이 엘비스 프레슬리 훨씬 이전에 '로큰롤 다림질'을 실천한 결과였다.

코스터스와 엘비스 이후 리이버와 스톨러는 어틀랜틱 레코드사에 독립 프로듀서로 고용되었다. 음반업계 초유의 일이었다. 얼마나 곡을 잘 만들었으면 그랬겠는가. 기대대로 여기서도 발군의 솜씨는 여전했다. 드리프터스(Drifters)에게 <There goes my baby> <On Broadway> 등의 불세출의 명곡을 써 주어 클라이드 맥패터 탈퇴 이후 휘청거린 그룹을 오히려 이전보다 더 유명하게 만들었다.

그들의 대표곡인 <Up on the roof> <Save the last dance for me> <Under the boardwalk>도 실은 리이버와 스톨러가 곡을 쓴 작곡가들에게 다시 고치기를 주문해서 세련미가 더해진 곡들이다.

가명으로 발표한 <There goes my baby>의 경우는 음악적으로 중요성을 인정받는다. R&B 레코드 가운데 과감하게 바이올린과 첼로가 사용되는 등 최초로 현(絃)이 등장하는 데다 더욱이 팀파니 연주는 드럼과 맞지 않게 연주되었고 보컬의 키도 연주와 다르게 구사되었기 때문이다.

잘못하면 뒤죽박죽. 그러나 리이버와 스톨러는 기막히게 매력적인 하모니를 연출해냈다. 그들의 혁신적인 편곡감각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이 방식은 훗날 그룹들이나 버트 바카라크와 같은 작.편곡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드리프터스에서 솔로 독립한 벤 E 킹도 절대적으로 리이버와 스톨러에게 신세를 진 인물이었다. 그들이 빚어낸 <Stand by me> <I(who have nothing)> <Spanish harlem> 등의 곡으로 그는 일세를 풍미했다.

어틀랜틱을 떠난 뒤 그들은 1960년대 초반 레드 버드, 블루 캐츠 등 자신들이 설립한 레이블을 통해 무수한 히트행진을 계속했다. 이 시기에도 그들은 곡을 쓰는 것 외에 딕시 컵스(Dixie Cups)나 샹그리라스(Shangri-las)와 같은 소녀그룹들에게 곡을 쓴 엘리 그리니치, 제프 베리, 캐롤 킹 그리고 필 스펙터 등 2세대 틴 팬 앨리 작곡가들의 곡을 프로듀스하며 '음악스승' 역할을 했다.

작곡가들의 모임이자 파워그룹인 ASCAP이 선정한 최고 작곡가에 그들이 올라있듯이 리이버와 스톨러는 '대중음악의 곡 쓰기'의 전범(典範)을 확립하며 팝의 질적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곡과 음반에 관한 한 그들이 현대 팝의 산증인임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작곡자들은 너도나도 곡을 쓸 때면 “나도 리이버와 스톨러처럼 즐거움이 가득한 단순하고 진솔한 곡을 써야 하는데...”하는 압박을 받아야 했다.

로큰롤의 보급에 탑을 세운 그들은 1969년 페기 리(Peggy Lee)의 <Is that all there is?>를 기점으로 한층 화성적인 스탠더드 팝을 만들어내 틴 팬 앨리 전통의 계승자임을 확인시키며 뮤지컬과 영화스코어 분야에서 맹활약했다. 이로써 그는 20세기 전반의 스탠더드 팝과 후반의 로큰롤을 동시에 정복하는데 성공했다.

물론 로큰롤 진영에서는 리이버와 스톨러가 이런 음악을 써내자 “이제 공식적으로 로큰롤의 순수시대는 끝났다”며 불만을 표시했지만, 아무도 그들의 음악인생에 점철된 '실험과 확장'의 미학에 시비를 걸 순 없었다.

그들이 음악역사에서 누리는 영광은 바로 '1950년대 로큰롤 순수성의 파수꾼'이었다는 사실에 있다. 나중 비틀스와 롤링 스톤스 등에 의해 로큰롤이 산업으로 뻗어나가기 전 '마지막 순수'를 상징하는 인물이 바로 리이버와 스톨러였다.

미국인들은 그들의 음악을 들으면서 50년대가 제공하는 추억과 낭만에 미소를 짓는다. 서툴었지만 자본과 과학의 오염에 벗어나 있는 그때의 '깨끗함과 순진함'은 이후 어느 시기에서도 다시 구할 수 없다는 점에 고개를 끄덕인다.

돈 맥클린은 <American pie>에서 버디 할리가 죽은 날을 음악의 순수성이 죽은 날로 묘사했지만 리이버와 스톨러의 전성기가 끝난 때를 상실의 시점으로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하고 온당하지 않을까.

그들은 50년대를 관통하며 그 시대의 사운드트랙을 주조했다. 지금 그들의 음악을 듣는 것은 곧 타임머신을 타고 '그 좋았던 시절'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브로드웨이 뮤지컬 <스모키 조스 카페>가 줄거리 없이 리이버와 스톨러의 음악 중심으로 펼쳐지는데도 미국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는 것은 이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비즈니스맨에 의한 음악이 아니라 어느새 멀어져버린 '인간에 의한 음악'을 그리워하는 마음이며 진실한 대중음악만이 전할 수 있는 인간미에 대한 향수이기도 하다. 미국인들은 리이버와 스톨러에게서 '음악적 인간'을 보는 게 아니라 '인간적 음악'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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