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ny Mathis
2024. 9. 24. 21:13ㆍ팝아티스트
60년대에 락이 전성기를 누리기 전에 출현한 트래디셔널한 남자 보컬리스트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가수들 중 하나인 Johnny Mathis는 60년대와 70년대에 쇠퇴해가는 어덜트 컨템퍼러리 음악 팬들을 위해 재즈와 팝 스탠다드의 로맨틱한 분위기를 추구했다. 초창기에 그의 싱글들과 차트 순위는 별 볼일 없었지만 마티스는 후에 앨범 시장에서 큰 성공을 이루었고 그의 수 십장의 LP음반들은 골드나 플래티넘이 되었고 60년에 걸쳐 차트에 머물렀다. 그는 60년대에는 트래디셔널한 곡들로 앨범을 만들었고 70년대에는 소프트 락을 접목했으며 90년대에는 대중 콘서트를 하면서 계속 활동을 했다. 1935년 9월 30일 텍사스의 Gilmer에서 John Royce Mathis란 본명으로 태어난 마티스는 10대 이전에 오페라를 배웠으며 또한 Nat King Cole, Billy Eckstine 그리고 Lena Horne등 1940년대의 부드러운 크로스오버 재즈 보컬리스트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 그의 음악 활동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마티스는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시절 필드와 트랙운동 부문에서 뛰어났고 1956년 올림픽에 출전하고자 노력하였으나 그에게 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그는 클럽오너인 Helen Noga와 메니지먼트 계약을 맺고 Helen Noga는 콜럼비아 레코드사의 재즈 프로듀서 George Avakian에게 마티스를 소개 시켜주었다. Avakian은 그와 계약을 체결하고 Teo Macero, Gil Evans 그리고 John Lewis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와 함께 마티스의 셀프 타이틀 데뷰 앨범을 1957년에 발표했다. 그러나 호화로운 스탭진에도 불구하고 그 앨범은 주목을 받지 못했다. 콜럼비아 레코드 회사의 미치 밀러는 마티스의 음악적 스타일을 팝 발라드로 전환하도록 유도했는데 그것은 바로 적중했다. LP 은 57년에 챠트20위 권에 올랐고 "It's Not for Me to Say"는 차트 5위 권에 진입했으며 "Chances Are" 첫번째 마티스의 넘버 원 곡이 되었다. 바로 그 때서부터 조니 마티스는 어덜트 컨템퍼러리 팬 층 들을 위해 발라드음악을 추구했다. 그가 차트에 끊임없이 진입했을 지라도 57년에의 탑 10위권 들의 곡들을 제외하면 50년대 후반과 60년대 동안에 히트 싱글들은 거의 나오지 못했다. 그는 점점 커져만 가는 앨범 시장에 포커스를 두기 보다 프랑크 시나트라 처럼 가장 인기 있는 트래디셔널한 남성 보컬리스트로서 리바이벌된 노래들을 많이 불렀다. 70년대에 그는 트래디셔널한 팝에서 벗어나 소프트 락을 시도 했는데 그의 두번째 넘버 원 싱글 "Too Much, Too Little, Too Late"는 1978년에 발표되었다. Deniece Williams와 듀엣으로 싱글 곡을 발표한 후 Dionne Warwick, Natalie Cole, Gladys Knight 그리고 Nana Mouskouri 같은 다양한 파트너들과 듀엣 곡을 불렀지만 그 중 어떠한 곡도 오리지날 곡보다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마티스는 90년도에도 앨범 발표와 판매를 계속하고 98년에는 싱글 "Because You Loved Me" : Songs of Diane Warren 그리고 "2000's Johnny Mathis on Broadway"를 발표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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