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letcher Henderson
2024. 9. 22. 11:52ㆍ팝아티스트
플레처 핸더슨은 초기 재즈 음악에 처음으로 빅 밴드(Big Band) 연주 형식을 도입한 사람이다. 미국 뉴욕을 무대로 활동하면서 1920년대 중반부터 명성을 얻은 그는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 돈 레드먼(Don Redman), 콜맨 홉킨스(Coleman Hopkins)등 1930년대 미국에서 폭발한 스윙 열풍의 주역들을 배출한 스윙의 산파 역할을 했다. 1930년대 중반 스윙이 명실상부 미국의 국민 음악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은 1920년대 플레처 핸더슨의 새로운 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1897년 12월 18일 랜돌프 직업학교의 교장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이자 음악선생인 어머니 오지 핸더슨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6살 때부터 피아노 연주를 시작, 애틀란타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한다. 석사학위를 위해 1920년 뉴욕에 진출한 플레처는 흑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대학 입학을 거절당한다. 생활을 해나가기 위해 돈이 필요했던 프레처는 페이시 핸디 음악회사에 취직, 피아노 연주자로 일한다. 블루스 보컬주자이기도 했던 사장 페이시 핸디는 평소 흑인음악 전문 레이블을 설립할 계획이 있었는데, 플레처 핸더슨이 적임자라 여겨 그에게 동업을 권유한다. 이에 핸디는 1921년 최초의 흑인 레이블 블랙 스완(Black Swan)을 설립, 플레처 핸더슨은 레이블 내의 전속 피아니스트로 활동하게 된다. 1924년 1월에는 빅 밴드 플레처 핸더슨 앤 히스 오케스트라(Fletcher Henderson & his Orchestra)를 조직한다. 밴드의 구성원이었던 알토 색스폰 주자 돈 레드먼과 콜맨 홉킨스는 당시까지 생소했던 서구 클래식 오케스트라 편곡을 재즈 연주에 도입, 플레처 핸더슨을 일약 재즈 계의 혁신자로 이름을 날리게 한다. 1924년에는 킹 올리버 밴드에서 활동했던 루이 암스트롱이 합류해 1년 간 플레처 핸더슨 밴드에서 활동하며 그의 번뜩이는 트럼펫 솔로를 통해 재즈에서 솔로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플레처에게 가르쳐준다. '재즈 연주의 신기원'으로 평가된 플레처 핸더슨 밴드는 1927년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이 등장 할 때까지는 가히 독보적이었다. 돈 레드먼이 1927년 탈퇴하고, 그 자리에 베니 카터와 호레이스 헨더슨이 들어와 밴드의 편곡을 담당한다. 1920년대 전성기를 거쳐 1930년대에도 활발한 연주활동을 벌였지만 스윙 붐을 타고 등장하는 여러 밴드들과의 경쟁에서 차츰 밀리게 된다. 특히 미국을 강타한 1929년 경제 대공황이 음악을 들을 여유를 빼앗아가면서 훌륭한 작품들을 많이 발표했지만 이미 대중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었다. 1934년 밴드의 핵심인 콜맨 홉킨스마저 탈퇴, 결국 밴드는 이듬해 해산하고 만다. 해산 직후 잠시 '스윙의 왕' 베니 굿맨(Benny Goodman)의 편곡자로 활동한 플레처는 그를 위해 많은 곡들을 편곡한다. 그가 편곡한 'King Porter somp', 'Sometimes I'm happy', 'Down south camp meeting'은 베니 굿맨에게 엄청난 성공을 가져다 주지만 정작 플레처 핸더슨의 공헌은 평가절하 된다. 1936년 다시 밴드를 조직해 'Christopher Columbus'를 발표해 좋은 반응을 얻지만 그것도 오래 못 가 1939년 와해된다. 1940년대 내내 여러 밴드를 전전하며 편곡가로 활동하며 기회가 오길 기다린 끝에 1950년 럭키 톰슨과 섹스텟(sextet)을 결성해 새로운 출발을 시도하지만 와신상담의 보람도 없이 그 해 뇌일혈로 쓰러져 2년 후인 1952년 세상을 떠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