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한 첼리스트

2024. 5. 25. 11:57음악창고

음악창고

2012-08-14 00:54:35


 
1. 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 1876 ~ 1973)

"음악이란 자연스럽고도 간소하게 연주해야 한다. 복잡한 것보다는 기본적인 것을 잘 알아야 한다. 이것은 음악뿐 아니라 모든일에서 그렇다. 생명을 지니고 태어난 모든 것은 처음부터 간소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지금 과학 세계에는 야릇한 일들이 나타나고 있으나 세계는 가장 기본적인 것을 잊고 있다. 간소하고 기본적인 것이 필요하다." 파블로 카잘스, 그는 바야흐로 "연주가의 시대" 라는 20세기에 우뚝 솟은 위대한 산맥이다. 그로 하여금 이전의 첼로 연주가 집대성 되었으며 그에 따라서 이후의 모든 첼로 연주의 흐름이 갈라져 나왔다. 카잘스는 첼로 연주사상 최대의 인물일뿐만 아니라 고향이 같은 피카소와 병칭되는 금세기 예술계 굴지의 거인이다. 카잘스는 1876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남쪽에 있는 카타로니아의 시골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시골 교회에서 오르간을 연주하는 음악가여서 카잘스는 열한 살까지 오르간과 피아노, 바이올린을 배웠으며 그 다음으로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첼로를 배웠다. 음악 공부를 하기 위하여 바르셀로나에 간 카잘스는 벌써 뛰어난 연주가였다. 아직 어렸던 그는 학비를 벌기 위하여 댄스며 음악 공연을 하는 카지노에서 연주를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카잘스의 연주가 뛰어나다는 소문을 들은 스페인의 마리아 크리스티나 여왕이 그를 왕궁에 초빙하여 연주를 하게 하였다. 그 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도 그를 초빙하였다. 그는 바르셀로나 시립 음악학교에서 호세 가르시아에게 사사 받았으며 마드리드 음악원을 나왔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200여년 간이나 잠들어있던 바흐의『무반주 첼로 모음곡』악보를 거리의 헌책방에서 발견한 것이었다. 첼로가 지니고 있는 깊은 표현력을 최대한으로 활용한 바로크 음악의 정수인 이 곡에 대한 카잘스의 열의는 대단한 것이었다. 13살이란 어린 나이로 이 곡을 발견한 카잘스가 공개적으로 연주한 것은 그로부터 12년이란 세월이 흐른 25세 때였다. 그는 그 동안 이 곡을 위해 심혈을 기울여 연구한 후에야 비로소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이 곡을 발굴한 지 47년, 공개로 연주한 지 35년이 지난 1936년, 그의 나이 60살 때에서야 비로소 녹음을 했다는 점이다.『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그래서 1936년부터 39년까지 3년 동안에 녹음되어 전 3매 전집으로 발매되었다.

가르시아의 지로로 첼로를 익히기 3년만에 그는 벌써 스승을 능가하는 첼리스트가 되었다. 그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1899년 프랑스의 지휘자 라무르의 독주자로 데뷔하면서부터였다. 그후 1919년 카잘스는 바르셀로나에서 오케스트라를 조직하고 약 10년 동안 활약하다가 1936년 스페인에 내란이 일어나자 자선 음악회를 유럽에서 개최하기도 하였다. 1939년 조국의 프랑코 독재정권에 항의하여 피레네의 외진 마을 프라도에 은둔했는데, 그 후 10년 동안 음악에는 아랑곳없이 프랑코가 다스리는 스페인에 피난해오는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온갖 힘을 기울였다. 이 때문에 10년 동안은 그의 첼로 연주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 1974년 어느 날, 프랑코가 스페인을 지배하는 한 절대로 첼로를 연주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것이다. 이 고장에서는 이윽고 그를 흠모하여 모여든 세계의 음악가들에 의한 음악제가 탄생했다. 1950년, 바흐 서거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바흐의 대가"인 카잘스를 위한 모임이 발족되어 프라도에서 축전을 열었다. 바이올린의 왕이라고 불리는 크라이슬러를 비롯하여 역시 바이올리니스트 아이작 스턴과 시게티, 그리고 피아니스트 제르킨과 같은 세계 일류 연주가가 이 자그만 도시 프라드를 찾아온 것이다. 이 프라드의 음악제는 카잘스가 어머니의 고향 푸에르토리코에서 일생을 마치기로 결심하여 옮겨 갈 때까지 매년 베풀어졌다. 카잘스가 푸에르토리코로 옮긴 뒤 푸에르토리코 정부에서느 푸에르토리코 대학의 협력으로 카잘스 음악제를 베풀기로 하였다. 수도 산판에서 열리는 음악제에 온 힘을 기울였다. 성황을 이룬 것 두말할 것 없다.

그는 독주자로서도 많은 연주회를 갖고 페코드도 녹음했지만 프랑스 사람인 피아니스트 코르토와 바이올리니스트 티보와 함께 트리오르 만들어 활약했다. 이 트리오는 세계에서 음뜸 가는 것이었으나 티보느 비행기 추락 사고로, 코르토는 병으로 죽었기 때문에 그 뒤에는 홀로 남아 활동해야 했다. 만년은 푸에르토리코의 산후안으로 이주, 100년에 가까운 생애를 그곳에서 마쳤다. 양심의 소리에 따르는 강하고 의연한 생활 자체가 그대로 더없이 훌륭한 예술의 경지와 결부된 보기 드문 인물이다.



2.피에르 푸르니에(Pierre Fournier, 1906 ~ 1986)

프랑스가 낳은 20세기의 손꼽히는 첼로 거장이다. 푸르니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육군 장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머니로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으나 9살 때 소아마비로 오른발이 부자유스러워지면서 피아노의 페달을 밟을 수가 없게 되자 첼로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는 첼로에서 아주 빠른 발전을 보였다. 그는 파리 음악학교에서 폴 바제라르에게 배웠으며 후에는 안톤 헤킹을 사사했다. 17살에 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1925년 에두아르 콜로네 오케스트라와의 연주에서 처음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그는 이를 계기로 유럽순회공연을 가졌다. 그는 푸르트뱅글러,카라얀, 쿠벨릭 등을 비롯한 많은 당대의 훌륭한 음악가들과 연주를 가졌다. 먼저 부이용, 페를뮈테르와의 트리오로 주목받은 후 1934년의 독일 연주여행의 대성공으로 솔리스트로서 부동의 명성을 쌓았다. 48년 미국에 데뷔하며, 그 후 슈나벨, 켐프, 박하우스, 루빈슈타인 , 굴다 등 명피아니스트와의 공연을 통해 예술 세계를 더욱 심화해 갔다. 56년부터는 제네바로 본거지를 옮겨 활약했다.

그의 첼로는 음악적인 멋들어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기술이나 음색은 물론이거니와 우아하고 세련된 표현은 그만의 독특한 것인데다 거기에 생생하고 기품이 높은 시정이 가득 담겨 있는 것이 말할 수 없는 매력이다. 참으로 '첼로의 왕자'라는 별명이 어울리는 첼리스트이다. 또한 토르틀리에의 친구였던 프리니에는 토리틀리에의 리사이틀의 일화로도 유명하다. 연주를 마친 토르틀리에가 무대 뒤쪽으로 오자 푸르니에는 '나는 자네의 왼손이 정말 부럽네'라고 말했다. 그러자 토르틀리에가 말하기를 '나는 자네의 오른 팔이 갖고 싶은걸...'이라고 말했다 한다.



3.다니엘 샤프란(Daniel Borisovich Shafran, 1923 ~ 1997)

"소련에는 아직 다니엘 샤프란이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소련인들은 로스트로포비치의 망명을 그다지 아쉬워하지 않을 것이다." 샤프란은 로스트로포비치보다 네 살 위이며 1923년 2월 13일생이다. 아버지 보리스 샤프란도 1963년까지 레닌그라드 필하모니의 수석 주자를 지낸 역량 있는 첼리스트였다.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난 다니엘이 여덟살 때부터 첼로를 배운 것은 그러한 가정 환경 탓이기도 했지만, 또 아버지가 그의 재능을 인정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샤프란은 10세 때에 레닌그라드 음악원에 들어가 슈트리메르 교수에게서 배우고 1937년 14세 때에 전 소련 콩쿠르에 나가 우승할 정도의 눈부신 솜씨를 과시했다. 1940년에 레닌그라드 음악원을 졸업한 샤프란은 다시 모스크바 음악원으로 옮겨가 1943년까지 계속 실력을 키워 나갔다. 그의 뒤를 이어 1943년에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한 것이 로스트로포비치였다. 이들보다 한 시대 앞의 소련을 대표하는 첼리스트였던 크누세비츠키(오이스트라흐, 오브린 등과의 트리오로 유명)의 스승인 명교사 코조루보프로부터 직접 배운 로스트로포비치는 그후 1946년까지 이 학교에 남아 있었다. 샤프란은 졸업한 이듬해(1944년)에 동유럽으로 연주 여행을 하여 그 재능을 인정받았다.

로스트로포비치와 샤프란이 세계적으로 주목을 끌게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일이다. 전후 한동안은 전쟁의 혼란이 가라앉지 않은 상태였으나 이윽고 차츰 안정되면서 1949년의 부다페스트 평화우호제 음악 콩쿠르와 1950년의 '프라하의 봄' 첼로 콩쿠르에서 2년 연속으로 샤프란과 로스트로포비치는 제1위를 나누어 가졌다. 샤프란은 1950년의 '프라하의 봄' 이후, 1954년에 다시 프라하에서 그리고 이듬해인 1955년에는 런던에서 리사이틀을 열어 절찬을 받아 동유럽으로부터 그의 명성은 차츰 서유럽까지 퍼져 나가게 되었다. 이어 1950년대 후반에는 미국에서도 슈만의 첼로 협주곡과 활랴의 소품, 카발레프스키의 첼로 협주곡 등의 레코드(Vanguard)로 주목을 끌었다. 특히 슈만의 협주곡은 높은 평가를 받으면서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이 무렵 샤프란 매년 유럽으로 연주 여행을 다녔으나 미국을 처음으로 방문한 것은 1960년이었다. 이 때 샤프란은 모스크바 국립 교향악단과 함께 카네기 홀에서 미국 데뷔 연주를 했다. 차이코프스키의 『로코코 주제에 의한 변주곡』은 열광적인 호응을 얻어 아낌없는 절찬을 받았다. 얼마 후 같은 카네기 홀에서 리디아 페체르스카야의 반주로 리사이틀을 열어 다시 압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카잘스, 포이어만 이래의 명첼리스트', '첼로의 프린스' 등의 칭호를 얻을 정도였다. 이 레코드는 그 카네기 홀 콘서트로부터 얼마 후 RCA 스튜디오에서 녹음된 것이며 두 곡(뒷면에 쇼스타코비치 첼로 소나타 작품 40수록)다 리사이틀 연주 그대로의 곡목이다. 또 이 두 곡은 샤프란이 소련이외의 나라에서 녹음한 최초의 레코드이며 이 LP로 샤프란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특히 이 샤프란은 로스트로포비치와는 매우 대조적인 연주를 펼치고 있다. 로스트로포비치가 다방면에 걸쳐 거장적인 역량을 과시하는데 비해 샤프란은 서정적인 자질이 돋보인다. 한마디로 그의 연주는 '첼로의 시인(詩人)'이라는 표현으로 대신할 수 있는 독특한 세계이다. 그의 대표적인 명반으로는 이 밖에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 전곡", 베토벤 "첼로 소나타 전집", 프로코피에프의 "첼로 소나타", 쇼스타코비치 비올라 소나타 등을 꼽을 수 있다.



4.야노스 슈타커(Janos Starker, 1924 ~ )

현역 독주자 중 최원로급에 속한다. 그의 부모는 원래 러시아 태생으로 헝가리에 이주했는데, 오랫동안 무국적자로 살아야 했다.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아들의 음악적 재능을 감지하고 7세 때부터 첼로를 가르쳤다. 슈타커는 리스트 음악원에서 다비드 포퍼의 제자였던 아돌프 쉬퍼의 문하에서 첼로를 공부했다. 부다페스트 리스트 음악원 학생 시절, 자신의 스승 캐러비에게 코다이가 헌정한 무반주 첼로 소나타를 초연하였다. 이를 계기로 슈타커와 코다이의 <무반주 첼로 소나타>는 세계 음악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졸업한 후, 부다페스트 국립 오페라 극장 오케스트라의 수석 주자로 취임하면서 연주가로서의 길을 열었다.

또한 피아니스트인 조르지, 세베크 등과 트리오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1946년 헝가리에서의 활동을 멈추고 48년 루마니아, 오스트리아, 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댈러스 교향악단의 수석주자가 되었다. 그 후 지휘자 프리츠 라이너의 요청으로 49년부터 53년까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했다. 다시 53년부터 58년까지 시카고 교향악단에서 수석주자를 맡은 다음 솔리스트가 되었다. 58년부터는 인디애나 대학에서 교육 활동도 하면서 뛰어난 첼리스트를 차례로 배출하였다. 슈타커는 50년 무렵 레코딩한 코다이 무반주 첼로의 생생하고 생명감 넘치는 녹음으로 유명하며, 이후 금세기를 대표하는 첼리스트로 꼽히고 있다. 그는 초인적인 기교의 소유자이지만 쇼맨십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기교가 뛰어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연주에서 차갑다는 인상을 받기 쉽다. 하지만 그는 깊이 성찰하는 첼리스트이며, 작품이 지닌 묘미와 뉘앙스를 섬세하게 살려낸, 그리고 외모에서 풍기는 인상과는 달리 따스함을 훈훈하게 풍겨낸 첼리스트이다.

1972년 뉴욕 필과 하이든 첼로 협주곡을 연주했을 때 쇤베르크는 이런 평을 했다. "슈타커는 귀족적인 엄격함을 갖고 연주했고, 고도의 논리로 음악적 소재를 구도화했다. 그의 완벽한 아티큘레이션은 달인의 경지에 올라 있으며, 첼로 소리는 크고 아름답게 울렸다. 그의 하이든 협주곡은 분명함과 균형감에 있어 극치였다." 그는 비브라토를 비롯한 많은 테크닉들을 바이올린 주법에서 착안해낸 장본인으로, 첼로 테크닉 교칙본을 위시해 그가 편집한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첼로를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중요한 지침서가 되고 있다. 또한 왼손의 독립성과 강화를 꾀하는 『첼 로 메소드』의 저자로도 이름이 높다.



5.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Mstislav Rostropovich, 1927 ~ )

첼로만이 아니라 지휘계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이다. 구소련에 속해 있던 아제르바이잔의 바쿠 출생으로 모스크바의 그녜신 음악원에서 첼로를 가르치던 아버지로부터 처음으로 첼로를 배웠다. 그후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해 코졸루포프에게 첼로를, 쇼스타코비치에게 작곡을 각각 배웠다. 졸업과 동시에 모교의 교원으로 채용된 그는 1956년 교수로 승진했으며 그 이전인 1950년 '프라하의 봄' 국제콩쿠르를 비롯한 여러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1950년대 중반 이후로는 구미 각국을 순회공연 하면서 명성을 높이는 한편 소련 국내에서도 정력적인 연주활동을 전개, 국가로부터 상도 받았다. 1968년 모스크바 볼리쇼 극장에서 차이코프스키의 가극『에브레기 오네긴』을 지휘해 지휘자로도 데뷔했고, 외국 교향악단의 객원 지휘도 시작했다.

그의 존재는 단지 금세기 최고의 첼리스트에 머무르지 않고 1968년의 솔제니친 옹호에서 발단한 인권 문제의 상징으로 기억된다. 1970년 반체제 작가 솔제니친을 옹호하면서 로스트로포비치는 소련 정부와 대립하기 시작해, 1974년 가족과 함께 2년 간 해외 체재 허가를 얻은 것을 계기로,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워싱턴에 살면서 1977년 그 곳 내셔널 교향악단의 음악감독이 되었다. 로스트로포비치는 현존하는 첼로 주자 중에서 최고급의 기술을 가지고 호쾌한 연주를 한다. 아무리 어려운 페시지라 해도 균일한 음색으로 막힘이 없이 연주해 낸다. 볼륨도 지금까지의 연주자로서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더구나 피아니시모의 섬세함도 비길 데가 없어서 놀라울 정도의 최약음까지도 회장의 구석구석까지 들리게 한다. 첼리스트로서의 로스트로비치는 카잘스가 '종래의 첼로 연주의 관념을 뒤엎은 명인'이라고 절찬한 것처럼 우선 비길 데 없는 기교의 소유자이다. 지휘자로서는 슬라브 음악에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했으며 부인인 소프라노 가수 비시네프스카야의 리사이틀에서는 피아노 반주자로서도 활약한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직전 그는 서베를린 쪽 장벽 밑에 혼자 버티고 앉아 무반주 첼로곡을 연주해 세계적인 찬사를 받기도 했다. 각 방면의 CD가 나와 있는데 거의가 명연주이다. 슈만의 『첼로 협주곡』도 그 중의 하나이다.



6.자클린 뒤 프레(Jacqueline Du Pre, 1945 ~ 1987)

16세에 런던에서 데뷔했다. 남성 연주자들 못지 않는 힘찬 연주와 확실한 테크닉과 풍부한 음악성, 왕성한 창조력을 지닌 천재 첼로 주자다. 1965년 BBC 교향악단과의 미국 연주 여행 때 엘가의 첼로 협주곡을 연주하여 선풍을 일으킨 후부터 엘가의 협주곡을 장기로 하게 되며, '뒤 프레의 엘가'라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67년에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인 바렌 보임과 결혼하여 두 사람의 듀오에 의한 명반도 많이 만들어졌으나 71년 다발성 뇌척수 경화증의 증상이 나타나 73년부터 연주활동을 중단했다. 그 후는 교육활동을 하여 78년에 맨체스터의 솔포드 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를 받았다. 요요 마와 린하렐의 스트라디바리 는 그녀의 것이었다.



7.미샤 마이스키(Mischa Maisky, 1948 ~ )

발트 3국의 하나인 라트비아 공화국의 수도 리가에서 태어났다. 첼로는 리가의 음악원에서 배웠다. 레닌그라드 음악원의 부속 음악학교, 모스크바 음악원을 마치고 B. G. 피슈만과 로스트로포비치, 그레고르 피아티고르스키를 사사했다. 1965년 러시아 전국 음악 콩쿠르 1위를 하였고 1973년 가스파르카사도 국제 첼로 콩쿠르 1위를 수상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현대 최고의 무용수로 일컬어지는 미하일 바리시니코프, '금세기의 파가니니'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바이올린의 귀재 기돈 크레메르 등과 동향이자 죽마고우 사이이기도 하다.

그의 재능은 인정하면서도 유태인이라는 것만으로 반체제운동에 관계된 것으로 간주되어 2년간의 옥중생활을 해야 했다. 그사이 물론 연주는 할 수 없었으며 마침내 1972년, 24세 때 출국허가가 내려 이스라엘로 이주하면서부터 마이스키의 본령은 발휘된다. 이듬해 73년에 카사도 콩쿠르에 우승하여 샛별로 떠올랐고 로스트로포비치의 문하생으로서 음악성이나 기량도 확실하다. 곧 R. 세르킨으로부터 말보로 음악제에 초빙 받았으며, 피츠버그 교향악단,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또는 이스라엘 필하모닉 등에 객연하여 마이스키의 음악은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같은 리가 태생의 크레메르, 아르헤리치와도 때때로 듀오를 결성하였다. 현재 이스라엘 국적을 갖고 있는 마이스키는 내한 연주도 몇 번 한 바 있다. 그의 연주는 약간 빠른 템포의 현대적인 스타일이 특색이다. 바흐의『무반주 첼로 모음곡 전6곡』이 명반으로 꼽힌다. 실연할 때는 그리스도 같은 용모에 헐렁한 셔츠를 입고, 넘 버가 바뀔 때마다 셔츠를 갈아입으면서 무대 효과를 노리기도 한다. 현재 독일의 그라모폰과 계약해 디스크도 왕성하게 내놓고 있다.



8.정 명 화(Chung, Myung-Hwa)

줄리어드 음악원을 졸업했다. 주빈 메타 지휘의 L. A. 필하모닉 협연으로 데뷔했다. 카징거 독일 수상을 위한 백악관 환영 음악회에서 연주했으며 L. A. 필과 찰스 듀토이트의 지휘로 차이코프스키 로코코 변주곡, 1992년에는 정트리오(정경화, 정명훈)와 10곡의 피아노 트리오를 취입했다. 세계 국회의원 및 종교지도자 기구의 예술위원회 창립회원 및 이사로 피선되기도 하였다. 한불 수교 백주년 특별 사절 연주를 하였으며 뉴욕 메네스 음악대학 첼로 및 실내악 교수로 취임하였다. 유엔마약퇴치기구 초대 친선대사로도 임명되었다. 현재 한국 예술종합학교 첼로 교수로 재직중에 있다.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재단 콩쿠르 1등, 제네바 국제콩쿠르 1등, 이탈리아 시칠리 교향악단이 정하는 [금년 최고의 연주자]로 선정, 미국 Asian Pacific Council에서 "Mainstream America Award for Excellence in Music"수상, U. S. Pan-Asian American Chamber of Commerce로부터 "Excellence 2000"수상 등 화려한 수상 경력을 가지고 있다.



9.요요 마(Yo-yo Ma, 1955 ~ )

현재 마이스키와 첼로계의 자웅을 겨루는 존재이다. 파리 출생으로 아버지는 중국 상해 출신으로 파리 대학을 나온 음악학자이며 어머니는 홍콩 출신의 메조소프라노 가수이다. 누이동생 유첸은 바이올린을 배웠다고 하니 가히 음악 일가라고 할 만하다. 4세 때 아버지의 지도로 첼로를 시작, 6세에 파리대학 고고학 연구소에서 리사이틀을 열었다. 리사이틀로 데뷔한 6세 이후 뉴욕으로 이주하여 7세부터 미국 줄리어드 음악원에서 슈타커, 레너드 로즈 등을 사사했다. 이어 8세 때 카잘스의 인정을 받을 정도로 요요마는 일찍부터 재능을 나타냈다. 같은 해 번스타인과 공연해 TV에 출연, 그 후 미국 각지에서 연주 활동을 전개했다. 1978년 하버드 대학 졸업. 아벨리 피셔 상도 수상했다.

1978년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 카라얀과 공연한 후 요요 마는 세계적인 연주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 다음 세대를 담당할 신예로만 일컬어졌지만, 이제는 톱 클래스의 첼리스트이자 40대 젊은 거장이다. 10대부터 지니고 있던 높은 기교와 음악성이 한층 닦여 실로 아름다운 시원한 음색을 들려준다. 게다가 동양인 특유의 서정성과 섬세한 감정 표현이 있고, 음색이나 프레이징의 미묘한 뉘앙스는 동양의 전통 음악과도 통한다. 그는 탁월한 연주실력뿐만 아니라 따스한 심성과 인류애로도 전세계 음악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는 2년전 열린 내한 독주회에서 당시 교전 중이던 유고 내전을 소재로 한 무반주 첼로곡 '사라예보의 첼리스트'를 연주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CD로는 바하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피아니스트 엠마누엘 액스와 공연한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집』등이 있다. 첼로가 그렇게 노래하고 우는 악기임을 새로이 일깨워 주는 명연주이다. 크로스오버에도 관심이 많은 그는 영화 칵테일의 삽입곡 로 유명한 흑인 가수 바비 맥퍼린과 함께『HUSH』음반도 발표했다. 소니 클래시컬에서 기존의 첼로곡들을 거의 다 녹음한 요요 마는 최근 들어 현대곡의 연주와 녹음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현대 음악의 탄생에 참여하는 일은 연주자가 할 수 있는 가장 흥미로운 일중의 하나이지요. 나는 현대음악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대한 일종의 반영이라고 믿습니다. " 그는 현재 중국 출신 작곡가인 탄 둔이 97년의 홍콩 반환 기념으로 작곡한 교향곡의 녹음 작업을 진행 중이다. 이곡은 중국 전통종과 홍콩 소년합창단, 그리고 아시아 유스 오케스트라와 독주 첼로로 이루어져있다.



10.양 성 원(Yang, Sung-Won)

프랑스 파리 고등 국립음악원을 졸업하고 인디애나대 Artist Diploma 과정을 수료했다. 인디애나 대학에서 야노스 슈타커를 사사했다. 몬트리올 콩쿠르에서 1위, 부조니콩쿠르에서 우승한 유태계 피아니스트 알버트 로토와 연주 여행을 함께 하였으며, 뉴욕의 링컨 센터(Alice Tully Hall), 파리의 Salle Gabeau, 워싱턴 D.C의 케네디 센터(Terrace Theater), 동경의 NHK Hall 등 유명 연주홀에서 독주 및 협연을 가진 바 있다. 뉴욕의 Barge 뮤직 시리즈, 보뎅 여름 음악 캠프, 캐나다의 밴프 음악캠프 등 뮤직 페스티발에 정기적으로 초빙 강의 했으며, Victor Trejakov, Youri Bashmet, Cho-Liang Lin, Leonard Hokanson 등과 협연했다. 일본의 7개 도시 순회 연주 및 NHK 생방송을 한 바 있으며 현 보댕 음악 캠프 교수이다.



11.안너 빌스마(Anner Bylsma, 1934 ~ )

네덜란드 헤이그 출생으로 그는 일찍이 그 자신이 열성적인 음악가였던 아버지로부터 음악교육을 받았다. 후에 그는 헤이그 왕립 음악원에서 카렐 붐캠프에게 배웠다. 그는 1959년에 이미 네덜란드 오케스트라의 수석 주자가 되었으며 같은 해에 멕시코에서 열린 파블로 카잘스 경연대회에서 우승했다. 1962~68년까지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보우 오케스트라의 수석 주자를 지냈으며, 60년대 초부터 슈뢰더, 브뤼헨, 레온하르트 등과 함께 콰드로 암스테르담에서 활약했다.

70년대 후반부터 오리지널 악기로 바흐의『무반주 첼로 모음곡』의 전곡을 각지에서 연주하여 명성을 높였다. 근대음악의 『론돔 Q』를 비롯하여 고전파에서 낭만파까지의 작품을 연주하는『달키브델리』등 여러 실내악단에 참가하고 있다. 바로크 첼로의 제 1인자에 머무르지 않고 항상 거트현(絃)을 건너 맨 악기를 사용하여 첼로 독주, 협주곡 및 실내악을 레퍼토리로 현대 음악까지 폭넓게 연주하고 있다.



12.피터 비스펠베이(Pieter Wispelwey, 1963 ~ )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출생이다. "제2의 안너 빌스마"로 알려져 왔다. 암스테르담 음악원에서 고(古)음악 전문 첼리스트 안너 빌스마를 사사 했다. 암스테르담 음악원를 졸업한 후 그는 영국으로 건너가 자클린 뒤 프레의 스승인 윌리엄 프리스를, 또 미국 로체스터 음대에서 파울 카츠를 사사했다. 이런 도제의 과정을 거쳐 비스펠베이는 1985년 네덜란드의 유망주에게 수상하는 엘리자베스 에버츠상을 받으며 본격적인 솔리스트로 나섰다. 1989년에 채널 클래식스 레이블의 첫 작품으로 탄생한 바흐의『무반주 첼로 모음곡』전곡 음반을 통해 그의 이름은 네덜란드 국경을 넘어 전 유럽에 알려졌다. 그는 이 곡에서 거트현 (絃)과 바로크 첼로를 사용해서 비브라토를 거의 쓰지않는 연주를 보였다. 이후 바로크 음악 특유의 생명력과 따스함이 넘치는 비발디『첼로 소나타』음반이 디아파종상을 수상하고, 네덜란드 스키폴 공항이 그를 공식 후원하면서 비스펠베이는 서서히 빌스마의 그늘에서 빠져 나와 자신의 입지를 굳혀갔다. 95년에는 로열 콘서트헤보오케스트라와 드보르작『첼로 협주곡』을 실녹음했다.



13.오프라 하노이(Ofra Harnoy, 1965 ∼ )

여류 첼리스트. 재색겸비라고 할까. 첼리스트로서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용모 또한 아름답기로 평판이 자자하다. 이스라엘의 하데라 출생으로아버지는 엔지니어이지만 프로급의 바이올린 주자이며 열성 적인 레코드 수집가이고, 어머니는 피아노 교수이니 역시 음악가 집안이다. 6세부터 아버지의 지도로 첼로를 시작했다. 9세 때 캐나다로 이주, 토론토의 로얄 음악원에 진학해 블라디미르 오로프 사사했고, 1975년 10세에 보이드 닐이 지휘하는 실내악단과 협연했다. 그 후 장학금을 얻어 런던으로 유학, 듀 프레의 스승이기도 했던 윌리엄 프리스의 지도를 받았다. 1978년 몬트리올 교향악단 콩쿠르, 이듬해 캐나다 음악 콩쿠르에서 각각 우승해 주목을 끌었다. 1980년 영국에 데뷔, 1982년 카네기 홀에서 미국 데뷔를 했고 '콘서트 아티스트 길드상'을 최연소로 수상했다. 1985년 최초로 극동 공연을 했을 때는 몸의 상태가 나빠 연주회를 취소하기도 했으나, 그 후 빈번한 해외 연주 여행을 통해 인기가 높아졌다. CD는 16세 때의『아리오소』가 데뷔반이며 그 뒤로도 많은 곡을 발표했다. 향수 어린 분위기 를 담은 독특한 서정미가 특색이다. 아름다운 음과 풍부한 음악성을 지닌 연주가다. 연주 양식은 직선적이 아니라 아고긱 (agogics 속도법)을 많이 사용하는 분위기 있는 것이어서 독특한 색채가 감돈다. 문필 활동도 하여 에세이집을 발표한 바 있다.



14.지안 왕(Jian Wang, 1968 ~ )

지안왕은 상하이 출신으로 음악가 집안에 태어났다. 그는 네살 때부터 아버지에게 첼로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9살 때 상하이 음악학교에 들어갔다.그는 그곳에서 아주 빠른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그가 10살때 중국에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던 아이작 스턴에게 발탁되었다. 스턴은 이 천재 소년을 금새 알아보았고 그를 다큐멘터리에 출연시켰다. 지안 왕은 스턴의 앞에서 모짜르트의 바이올린곡을 연주해 보였는데, 연주가 시작되자 스턴은 금방 이 소년이 첼로에 비상한 재능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지안 왕은 정확한 음정으로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강렬하게 그 음악이 지닌 감흥을 유감없이 표현해 냈다. 그 후 10년 동안 미국 예일과 줄리어드에서 공부했다. 그는 알도 페리소트를 사사했고 여전히 아이작 스턴의 도움을 받았다. 그는 서구에서 만큼이나 중국에서도 인기가 있었다. 11살 때 그는 상하이 교향악단과 함께 생상 첼로 협주곡을 연주 했다. 14살 때는 백악관 지미 카터 대통령을 위한 중국인 엄선 음악가로 뽑혔다. 왕은 보스턴 심포니와 중국 투어를 가진바 있고, 세이지 오자와가 '세계적인 첼로리스트'라 찬사했다. 피아니스트 마리아 조앙 피레스와 바이올리니스트 오귀스탱 뒤메이와 함께 '브람스 피아노 트리오'를 함께 연주하여 96년에 한국음반평론가 협회에서 제정한 제 1회 음반평론가상 수상작으로 대상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15.마트 하이모비츠(Matt Haimovitz, 1970 ~ )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루마니아에서 온 이민이다. 어려서부터 음악에 강한 관심을 보였고 3세부터 음악회에 출입했다고 한다. 4세 때 일가는 미국 캘리포니아로 이주. 로스트로포비치의 연주에 감격해 7세부터 헝가리계 첼리스트 가보르 레이트의 지도를 받게 된다. 9세 때 최초의 리사이틀을 가질 정도로 성장한 하이모비츠는, 12세 때 바이올리니스트 펄만의 추천으로 줄리어드 음악원에 진학해 레너드 로즈를 사사했다. 1984년 로즈가 사망한 후에는 동문인 요요 마의 지도를 받았다. 17세 때 시카고 교향악단의 라비냐 음악제에 데뷔해 화제를 모았다. 하이모비츠는 이미 베를린 필, 뉴욕 필, 이스라엘 필 등과 협연하는 등 신인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비중 있는 존재가 되었다. 데뷔 CD는 레바인이 지휘하는 시카고 교향악단과 1988년 녹음한 생상의『첼로 협주곡』. 힘찬 노래가 넘치는 연주에 압도당할 정도이다. 지휘자인 메타 및 레바인, 바이올리니스트인 슈테른 및 주커만, 첼리스트인 요요 마 등에게 인정을 받아 현재 현저하게 재능을 키우고 있다. 음악성은 약간 개성이 강한 편이지만 최근에는 자연스러움이 늘고 있으며, 큰 스케일로 크고 들을 만한 연주를 한다. 테크닉도 탁월하여 청중에게 불안감을 주지 않는다. 애용하는 악기는 마테오 고프리라다.


16.장 한 나(Chang, Han-Na, 1982 ~ )

한국의 첼로 신동 장한나는 94년 파리 로스트로포비치에서 우승하여 화려하게 클래식계에 데뷔하였다. 이후 세계적인 지휘자 주세페 시노폴리의 드레스덴 국립교향악단과 협연, 런던 심포니와 차이코프스키의 로코코의 레코딩 등 왕성한 활동을 통해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첼리스트로 자리잡았다. 레닌 필 지휘자인 유리 테미르카노프, 아이작 스턴 등 세계적인 음악가들이 "경이적인 천재"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장한나는 95년에 내한 공연을 가진 바 있다. 그녀는 현재 뉴욕 근교에 살고 있으며 줄리어드 음악원에 통학하고 있다. 올해 나이 12세로 그녀는 3살 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해 6살 때 첼로로 바꾸었다. 1994년 로스트로포비치 국제 첼로 경연 대회에서 우승하기까지 그녀는 여전히 7/8사이즈의 첼로를 켜고 있었다. 이 대회에서 우승을 한 후 한국의 후원자들이 9억원대를 호가하는 1757년 Guadagnini를 선물함으로써 그녀는 풀 사이즈의 첼로를 갖게 되었다. 1995년에 욜 레비와 장한나는 이스라엘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 협연하였다. 레비는 그녀에게 아주 만족해했다. 그녀는 그 콘서트에서 하이든 첼로 협주곡을 연주하였다. 레비는 "그녀는 예술가이고 이미 많은 것을 해냈어요. 그녀는 새로운 것을 하는 데에 두려움이 없고 변화하고 색을 더하고 있어요. 그녀는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천진난만함을 가져다주어요. 그녀는 신선하고 화사하고 아주 훌륭해요."라며 찬사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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