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NGO

2024. 5. 23. 09:42음악창고

음악창고

2012-08-14 21:15:40


 
 
최근 들어 아르헨틴 탱고는 세계적으로 주목받으며 생각지도 않던 지역에서도 탱고클럽들을 볼 수 있다. 런던에서는 매일밤 탱고를 즐길 수 있으며 네덜란드나 독일 혹은 핀란드의 작은 도시에서도 탱고 애호가들은 밤마다 모여들고 있다. 일본에서는 자체적인 탱고문화가 형성되어 있으며 브로드웨이, 파리, 런던, 베를린 그리고 도꾜에서는 탱고쇼를 볼 수 있다. 왜일까?

사교춤은 사람들 사이 언어 이외의 소통수단을 찾으려는 절실한 시도에서 나왔으나 60년대 이후, 서구사회 대부분의 사교춤들은 홀로 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요구나 규칙 혹은 관습에서 벗어나 홀로 즐겼다. 그러나 최근 들어 커플댄스에 대한 관심이 크게 되살아나고 있는데 왈츠, 퀵스텝, 살사와 룸바 등의 라틴댄스 그리고 다양한 자이브 형식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아르헨틴 탱고는 이들 커플댄스 중에서도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다른 어떤 댄스 형식보다도 친밀한 자세와 함께 두 다리는 굉장한 정확성을 가지고 빨리 움직인다. 탱고는 감각적, 명상적, 그리고 다소 이완된 관계를 유지하는 상체와, 마치 무술을 연상시킬 만큼 신속한 움직임을 가진 하체의 조화이다. 특히 하체의 움직임은 탱고의 독특함을 잘 보여준다.

우울하고 황홀하면서도 서로 으르렁대며 갉아먹을 듯 하다가는, 이내 뭔가 원대한 것을 갈구하는 듯, 혹은 가슴이 미어질 듯 아름다운, 다양한 인간의 감정을 표현해내는 탱고는, 대부분의 볼룸댄스 음악이 지닌 무미건조한 키치적 요소와 비교해 볼 때 단순한 유행이상이라 할 수 있다. 즉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에 대해, 서로에 대해 그리고 존재 그 자체에 대해 가장 심오하고 복합적인 갈망을 표현할 수 있는 진정한 참여형식의 예술이다.

"탱고는 시인들이 언어로 기술하려고 하는 것들 그리고 투쟁이 축제의 한 형식이기도 하다는 믿음의 직접적인 표현이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Jorge Luis Borges

탱고의 기원은 논란 속에 있으나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최초의 탱고는 1800년대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거리에서, 주점에서 혹은 사창가에서 나타났다는 데에 동의한다. 춤과 관련된 단어들과 음악의 리듬은 바로 그 구성원들의 정서를 반영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초기 '탱고'라는 단어에는 흑인들이 춤추던 장소라는 의미가 담겨 있기도 하다.

아르헨티나에 온 아프리카 노예들은 칸돔베의 리듬을, 그리고 이후 흑인 쿠바인들은 아바네라를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가져왔다. 폴카/마주르카와 함께 칸돔베와 아바네라의 바탕 위에 새로운 댄스가 생겨났으며 당시에는 밀롱가로 알려지게 되었다. (밀롱가는 현재 탱고의 변형된 형식이나 댄스홀을 가리킨다.)

이 새로운 댄스는 오래지 않아 유럽계 이민들 사이에 성행하였고,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탱고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아프리카 댄스의 발동작과 비슷한 kick(발차기)과 flick(발끝으로 가볍게 튀기기)을 유럽 민속무용의 단순한 스텝과 턴에, 그리고 사창가에서 유래했을 embrace(두 사람의 상체가 끌어안은 자세)에 더하면 바로 탱고의 기본 요소들이 갖추어 지는 것이다. 보통 기타. 바이올린 그리고 플롯으로 이루어진 소규모 즉흥밴드가 초기 탱고와 함께 했다. 1910년 경 반도네온(아코디온보다 크고 표현이 더 자유로우며 초기 독일계 이민들이 아르헨티나로 가져온 듯한 악기.)은 탱고를 특징지어 주는 주요악기가 되었다.

20세기 초 부유한 유럽계 이민 2세들은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주점과 사창가에 자주 드나들며 춤을 배웠으며, 이들이 유럽과 북아메리카를 여행하며 탱고를 아르헨티나 바깥으로 소개하였고 곧 탱고 열풍은 세계로 번져 나가게 되었다.

1920년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는 6인 합주라는 초기 탱고형식 중의 하나를 만들기도 한 훌리오 데 카로 Julio de Caro와 같이 클래식 정규교육을 받은 연주자들이 탱고를 정밀성과 복합성의 새로운 영역으로 이끌어갔다. 연주자 각각의 즉흥성은 이제 음악적 형식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럼에도 탱고 노래는 그 자체만으로 탱고의 세계에서 독립적인 위치를 잡아, 최고의 가수라고 일컬어지는 카를로스 가르델 Carlos Gardel의 경우 사랑받는 가수일뿐만 아니라, 열렬한 팬들을 확보한 하나의 우상이 되었다.

탱고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1930년대에는 처음으로 대규모 밴드가 조직되었다. Juan D'Arienzo와 Anibal Troilo는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라 쿰파르시타'와 같은 정식 오케스트라 버전의 곡을 만들었다.

2차세계대전 이후 페론주의 정권 하에서 아르헨티나는 정치적으로 고립되어 국내에서도 혼란이 이어지는 가운데 탱고는 근근이 그 끈을 이어가게 되었다. 뛰어난 밴드리더 중의 한 사람이었던 Osvaldo Pugliese는 블랙리스트에 오르거나 수감되는 등 탄압을 받기도 했다.

60년대에는 록큰롤이 세계를 장악하고 아르헨티나는 군사독재의 그늘로 접어들어, 세 사람 이상이 모이는 것을 금지하는 법에도 불구하고 탱고는 사그러들지 않았다. Antonio Todaro와 Pepito Avellaneda라는 훌륭한 댄스지도자 덕분에 80년대 탱고는 무대 형식으로 되살아나게 되었다. Tango Argentino와 같은 공연을 통해 세상은 탱고라는 음악과 공연을 위한 탱고댄스에 익숙해져갔다. 무대 위의 탱고는 더 큰 움직임으로 활기와 함께 발레적 요소를 가미한 극적인 구성을 취했다. 갓 탱고를 익힌 풋내기들에 의해 서툴게 모방되는 무대스타일과 탱고를 삶의 한 방식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클럽에서 추는 탱고의 간극은 커져 갔다.

무엇이 '진정' 탱고인가라는 건강한 논의가 탱고세계에서 제기되기 시작했다. 다른 한편으론, 탱고연주곡을 세계의 유수한 콘서트홀로 이끌었던 아스토르 피아졸라 Astor Piazzola에 의한 모던탱고의 출현으로 '진정한' 탱고 음악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다.

새 천년이 다가옴에 따라, 탱고는 부에노스 아이레스라는 문화적 진앙지에서 살아있는 예술로 거듭나고 있다. 아름다운 곡조와 서정성을 부드럽게 흐르는 리듬과 조화시키며, 탱고는 또한 자연스런 댄스에 기반을 둔 대중적인 음악형식을 유지한다. 열정과 감성 그리고 구슬프면서도 활기를 잃지 않는 것은 아르헨티나를 특징짓는 것들이며 또한 세계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탱고는 그 뿌리만큼이나 복잡하면서도 두 사람이 하나가 되어 움직이려는 자연스런 충동만큼이나 단순하다.

"두 사람의 사지와 그 몸의 기운이 함께 하지 않는 한, 영혼 또한 함께 할 수 없다." - 마르틴 부베르 Martin Buber
★♪까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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