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개월.그찬란한 인생 풀스토리 A

2024. 8. 9. 11:46내마음의창

★♪까꿍♪★
                                                                                 마음의산책

2012-08-08 23:57:46


세상에 계시는 모든 여러분
안녕하시옵니까
동양철학에 조예가 깊으신 우리친할머니께서
지어주신 <건우>라는 이름
그이전에는 외할머니께서 저를 곰돌이라고 불르셨읍니다.
아네. 왜 곰돌이냐고요?
우리 외할머니께서 체격이 튼튼하고 키가큰 사위인 우리아버지를
곰이라고 불르시기 때문에 저는 그냥 곰돌이가 되었습니다.
그럼 우리 어머니는 무어냐고요?
하하하 <곰순이>요.
우리 외할머니 마음속으로 불르시는 우리 어머니 별명이
곰순이랍니다.ㅋㅋ 여러분 우리어머니께는 절대로 비밀이라고
합니다. 그래 주실꺼지요? ㅋㅋㅋ

우리어머니 중2때
성당신문동아리반에서 대선배(6년차)인 우리아버지를 만나시고
6년세월이 흐른후 결혼하시고요<고슴도치와 곰이의 결혼식...ㅋㅋ>
3년만에 첫작품인 이곰돌이가 태어났습니다.

울어머니께서는요
자궁근종이 있는 사실을 친정어머니이신 우리외할머님께 숨기시고요
저를 잉태하셨고 이곰돌이가 잘못될까봐 의사선생님의 약처방을 거부하신채
고통속에 지내시다가 그만 혼절할 지경에 으르자 병원에 입원하셔서...
그때서야 아시고 달려오신 외할머니께서는 물한모금도 마실수없는 충격속에
고통의 시간을 보내시었다고 합니다.
최신의학의 발달은 무사히 아무탈없이 저를 세상밖으로 나올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때의 헌신적인 우리막내 이모님의 간호로 우리어머니와 저는 가슴속이
따뜻해지는 감동의 시간으로 기억할수있게 되었습니다.
2003년 9월14일은 제가 처음 세상구경을 나온날입니다.
친할머니와 친할아버지 작은 아버지들이 달려오시고 한달전에 아들을 출산하신
작은 어머님께서도 우리 이모님들 보다 먼저 병원으로 달려오셔서
자궁근종으로 고통속에 아들을 순산한 어머님을 축하해 주시며 기쁨과 안도의
눈물을 흘리셨읍니다.
외할머님의 기쁨 또한 말로는 할수없을 만큼 크시었나봅니다.
딸셋의 어머니이신 외할머니의 비명같은 환대는 예쁜것을 달고나온
기쁨을 저도 느낄수 있을만큼 커다란것이었답니다.
그리고 세아들중 장남인 우리아버지께 시집오신 우리어머니께서는
맡며느리로서 한집안의 장손을 생산하였음으로 체면을 세우게 되셨읍니다.
장손이기는 하지만 저는 셋째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요. 같은해에 결혼하신 둘째인 작은 아버지께서 딸을 먼저 낳으시고
저보다 한달전에 아들을 낳으셨으니 저는 셋째가 되는것입니다.
잘생기고 튼튼한 아들셋을 거느리신 친할머니께서는 양팔에 고물거리는 두손자와
어여쁜 손녀를 안으시고 마냥 기뻐하셨읍니다.
근데요. 우리어머니 왼쪽뺨에 붙어있는 보조개가 이곰돌이의 오른쪽뺨으로
옮겨와서 입술을 오물거릴때마다 선명하게 그선이 들어나서 제가 우리어머니
닮았다고 야단이셨읍니다.
보조개만 빼면 작은눈과 얼굴윤곽을 우리아버지를 닮았다고 외할머니께서
생각하고 계셨읍니다. 또 자세히 보면은 영락없는 우리친할아버지 얼굴모습이
보인다고도 하셨읍니다.
그런데 우리친할머니께서는 제가요. 우리막내 이모님을 닮았다고 하시었습니다.
우리친할머니께서 다정하고 샹냥한 우리 꼬맹이 이모님을 좋아하셔서 하신말씀이지만요.

우리외할머니께서는 충격적인 표현으로 받아들이셨답니다.
왜냐하면요. 우리외할머니는 맨날 우리 꼬맹이 이모님보고
<새우젖눈이><Y셔츠단추구멍눈이>하시면서 우리이모님을 놀리시곤 하시었으니깐요.

다시말해서 제가 꼬맹이 이모님을 닮았다는 말은 제가 못생겼다는 뜻이됩니다.<아그그....>
잘생긴 손자를 낳아야만 어깨를 펴고 으쓱댈수 있는 외할머니 입장을 생각할때 너무
미안해서요.<외할머니 죄송합니다> <못생겨서 죄송합니다>하고 말씀을 드렸지만
외할머니께서는 제말을 못알아 들으시는듯하여 더욱 죄송했답니다.ㅋㅋ
그리고. 우리어머니 출생때는 3.4kg이셨는데요.
저는 겨우2.98kg이었답니다
미달을 모면한 연약한 체중이라 면서요(사실은 미달이 아닌데요)
불면 날아갈까 만지면 바스라 질까
외할머님의 마음은 노심초사였었답니다.
또 약간의 황달끼 때문에 엄마랑 함께 퇴원을 거부당한채
3일씩이나 혼자서 병원에 붙잡혀서 간호 언니들이랑 지내게 되어서 그만
외할머니의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갔었답니다.
모유수유을 간절히 바라시는 우리어머니와 외할머니의바램이 무산될까봐
안절부절하던 시간이 지나고 외할머님 집으로 오게된 저는 처음엔 젖도 힘차게
빨아들이지 못하는 미약함 때문에 외할머니의 속을 또 태웠습니다
보조개 하나만 빼고 모두 아빠를 닮은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신경이 예민하여
깊은 잠을 못자는것까지 엄마를 닮았다고 야단이났습니다.
땅바닥에서 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깊이 잠든것 같아서 가만히 바닥에 내려놓을라치면 소스라치게 깨어나서
울기 때문에 젖먹는 시간빼고는 거의 삼칠일을 외할머니의 손끝에서 보냈습니다.
외할머니의 품안을 작은 침대로 여기고 꿀맛나게 자기때문에 내려놓을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우리어머니께서 백일이 지나도록 그리하셔서 외할머니의 팔이
지금도 아프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제가 똑같이 울어머님 흉내를 내고 있으니 정말 죄송한 일입니다
그리고 울보쟁이 우리어머님의 일화는 지금도 유명하시답니다.
우리막내 이모님이 태어나서 한달쯤 되었을때
우리어머니는 갓두돌이 지났다고합니다
그런데 어느날밤 10시쯤 잠에서 깨어나서 울기 시작해서 신을 신겨주고 이쁘다
착하다 달래시며 밖으로 나가자고 하니까
신발을 벗어서 던지고는 막무가내로 울었다고 합니다
더이상 달래봐야 역효과만 나니까 지켜보면서 무관심 한척 그치기를 기달리면서
그밤이 지나고 새벽이 왔다고합니다.
초여름 새벽6시경 자신이 던져 버린 신발을 가지고와서 신겨달라하고
이쁘다고 쓰다듬어 달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외할머니께서 싫다고 하시면서
<계속 울어>하고 했더니 새파랗게 질리시더랍니다.
<그럼 이제는 울지 않겠느냐>고 하시니까 절대로 울지 않는다고 고개를
엄청나게 열심히 끄덕이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업어주시니까
이번에는 노래를 불러 달라고 했더랍니다.
78년 그당시 유행하던 <호수에 잠긴달>이라는 노래를요.
말을 또박또박 할수는 없었으나 의사전달은 분명하셨다고 합니다.
우리어머님께서는 그이후로는 어떤경우에도 울지 않으셨고요
무언가 잘못했을때 <울어 할꺼야!> 하는 말을 가장 질색하셨다고 합니다.

젖이 풍풍쏱아져서 넘쳐야 된다고 생각하시는 외할머니의 풍성한 식단에따라
식사를 드셔야하는 우리어머님의 수고로움은 눈물스러웠다고합니다.
잠은 쏱아지고 아이는 보채이고 젖이 외할머니의 소망처럼 풍성치 않아서
울어머님의 고생은 말도 못했다고 하십니다.
산후 후유증도 심한데다가 평소보다 몇배로 먹어야 하는 고역때문에 어느순간
<돼지>가 된것같다 시면서 울어머님께서 <앙~>하고 울음을 터트렸다고합니다.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가 그렇게 안타까울수가 있을까요?
누가 아이인지 제가 보아도 분간이 어려운 순간이 었다니깐요. ㅋㅋ
외할아버지께서 <아이가 아이를 낳았구만>하시던 첫소감의 말씀이 과연
맞지 않습니까? 그래도 울음이 그치기만을 간절히 숨죽이고 기달리시는 외할머니...
산모가 울면은 젖줄이 말라서 젖이 나오지 않는다고요.
엄마가 슬픈마음을 가지면 독이 깃든 젖을 수유하게되어 아기에게 절대로 유익하지
않다고 경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순간의 할머니마음은 마치도 칼날위에 서있는듯 하였답니다.
그래도 한발짝 뒤로 물러설수없는 할머니의 마음 때문에 먹기 싫은 족발도 먹고
배고프지 않아도 또 먹는 정성끝에 곰돌이 냠냠통이 풍성해졌답니다
외할머니께서는 우리어머니를 <냠냠통>이라고 하셔서 우리어머니께서는 울다가
웃다가하셨습니다. <냠냠통이냐..엄마냐.. ㅋㅋ>
이제 날이 갈수록 힘이 솟아나서 하룻밤 자고나면 쑥쑥자라난 저는 운동을 좋아하게
되었답니다.틈만 나면요. 엉뎅이를 삐뚤빼뚤. 요리삐뚤 조리삐뚤 운동이요.
그바람에 배꼽이 떨어진 자리가 몇날이 지난후에도 아물지를 않아서 기저귀를 갈때마다

조금씩 피가 묻어 나와서 할머니의 마음을 알수없는 공포감에 휩쌓이게 하였답니다.
<아고고.....> 그리고요. 그배꼽이 글쎄 다른사람보다 동그랗고 오목하고 커다란 그배꼽이
우리어머니의 배꼽을 닮아서 그와중에도 우리할머니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답니다.<아구구... 저 잘했지요? ㅋㅋㅋ>
겉모습은 별로 닮지 않았지만 점점 어머니를 닮아가는 저는

외할머니의 각별한사랑을 받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답니다.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께서 태몽을 꾸셨는데요.
황금색 비늘이 번쩍이는 용이 커다란 날개를 치면서 달려드는 꿈을 꾸셨다고합니다
우리할머니께서도 저에 대한 꿈을 꾸시었는데요.
마냥 행복한 미소를 지으시며 한동안 아무말없이 다니셨다고 합니다.
귀한 꿈은 절대로 함부로 말해서는 않되기 때문이셨다고 하십니다.
넓은 호수같은 늪을 지날때 돌다리를 건너는데 앞서가던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뱀이 사는데 물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된다고......그래서 물리지 않기 위하여
힘껏 뛰어 올랐는데 어느새 발을 덥썩 물었답니다.
얼마나 놀랐는지 까무라칠뻔 했는데 물린 발가락이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너무나 신비스런 기쁨을 느낄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넓고 아늑한 늪은 생명의 보고 이며 생의 풍요로움을.....

할머니의 손길이 필요한 귀한 인연의손자라는 것입니다.
너무 신기하셔서 혼자만 간직하신채 싱글벙글이셨습니다.
외할머님은 과연 명꿈쟁이 시거든요....
미약하여 보는이의 마음을 졸이게 하던 저도요
날마다 조금씩 자라나서 한가지씩 기특한점이 엿보였다고 합니다
목욕을 즐기는 것이지요. 눈. 코. 입을 닦고 머리를 감기우고
그래도 울지 않을뿐 아니라 따뜻한 물속에 몸을 담글라치면 그윽해 하기까지 하는
저를 보고요. 온집안 식구들이 <아고고..저것봐...요것봐...>하시면서 야단이 셨습니다.

사실은 제가 너무나 예뻐서 잠도 안주무시고 이곰돌이를 쳐다보시다가
눈이 시리고 아프신 외할머니셨습니다.
꿈결같은 삼칠일이 지나고 한달이 지나서 잔뜩 겁을 집어먹은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께서 홀로 집을 지키시는 삼성동 우리집으로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옮기었습니다. 이제부터 아버지의 사랑을 쟁취해야 합니다.
아빠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아야 합니다.
저의 잠버릇이 아빠께 짜증이 되면 절대로 않되기 때문입니다
다행히도 아빠께서는 저의 탯줄을 자르신 장본인이 되셨습니다.
출산과육아에 대하여 전혀 문외한이신 아빠의 손을 잡고서

대부분 남성들이 입문하기 꺼리는 라마즈분만 프로그램에 가신것은
미래의 자랑스런 부자관계를 염두에 두신 어머니의 깊은 배려였던것입니다.

한달동안 어려운 시간을 내어서 아버지께서 어머니와함께 참석하신 라마즈분만

프로그램은 열린마음으로 살게하는 감동과 사랑이 넘치는 아주 유익한 것이었습니다.
잡은고기에 절대로 미끼를 주지 않는다는 농담아닌 농담을 생산해내는 무관심한
남편과 아버지들의 세상......
모르기 때문에 격어야하는 불행이 얼마나 많은지요.
수줍고 무뚝뚝한 아버지. 전형적인 경상도기질은 좋은 프로그램을 통하여 딱딱한
껍질을 벗고 나와서 자신의 분신인 아들의 탯줄을 자름으로서 뜨거운 사랑의 체험
으로 감동받게 되었답니다. 제가 삼성동으로 떠난 그날밤
외할머니께서는 그동안 쌓이신 피로감에 단잠을 주무시고 왠일로 새벽3시에
눈을 뜨셨답니다. 그래서 제가 어머니랑 머물던 방문을 열어보니 아무도 없고
텅비어 있어서 갑자기 가슴이 내려앉는 충격에 휩쌓여서 그밤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셨다고 합니다.
그이후로는 한잠도 못주무신 할머니는 할아버지 아침식사를 차려드리고
식사를 하시다가말고 차를 몰고 우리집으로 향하셨답니다.
한순간도 지체할수없는 마음에 길을 나선것입니다.
천호동에서 삼성동은 올림픽대로를 타면 평소에는 15분만에 갈수가 있는곳입니다.
그러나 아침출근길이어서 한시간동안이나 차안에 갖혀 있다가 우리집에 도착하니까
아직 출근하지않은 우리아버지께서 눈이 휘둥그래지며 깜짝놀라시었다고 합니다.
한번도 그시간에 오신적이 없으신 장모님이셨으니까요.
그래서 좀은 민망하셨다는 우리외할머니께서는
다만 저를 보시고는 그제야 마음이 놓이셨다고 합니다.
올림픽대로에 갖혀있던 그시간은 영원히 잊지도 못하신다고 하시면서요.
그날이후 매일 오전에 출근하시는것 처럼 저를 보러 오시는 외할머님이셨고
목욕도 시켜주시고 엄마노릇 잘못하실까봐 우리어머니에게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으시는 외할머니가 이곰돌이는 무쟈게 좋을수밖에 없었다니깐요.ㅋㅋ
이제 어머니랑 함께 지내는 시간도 서서히 흘러서 출근휴가가 바닥이 나가고 있었습니다.

얼마후면 어머니께서 직장에 출근하셔야 합니다.
한보름 근무하시면 또 휴식할수있는 기회가 오기 때문에 외할머니께 저를 봐달라고
부탁드렸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하셨답니다.
외할머니께서 아주 중요한 일이 생겨서 해줄수 없다구요.


금호동에 사시는 친할머니께서는 약사님이 시기때문에 결혼전에도
<아이는 절대로 안봐준다>고 선언해 오신터라 승락을 받아 내기는 결코 쉬운일이
아닌것입니다 그래도 외할머니께서는 우리어머니께 금호동 시어머니께 부탁해야
된다고 귀뜀하셨습니다. 사실 어머님께서 결혼하시고 일년동안 금호동에서 시부모님
과 함께 사시며 주부수업을 단단히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시어머님을 잘이해 하시고 계시는 어머니셨습니다만
금호동 친할머니께서는 전문직인 약사일 때문에 갓난아기를 길러보신적이

없으신거나 마찬가지여서 어머니께서 망서리지 않을수 없었을것입니다
아들셋을 거의 유모님과 여동생이 길러주셨다고 하십니다.
그래도 외할머님께서는 줄곧 시어머님께 부탁해야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담장밖으로 떨어진 씨앗은 담장안의 씨앗과는 다른풍토에서 자라서

다른색깔을 낼수도 있으며
담장안의 씨앗과 융화될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함 때문이셨답니다.
가족이란 함께 부대끼고 함께 호흡하지 않으면 진정한 가족의 정을 쌓기가 힘들고
한가족으로 살아가기 힘들거라는 외할머니의 깊은 염려의 마음과 함께....
이처럼 예쁜 손자를 안아보시고 진정한 기쁨을 누려보시라는 마음이셨고...
끔찍히 사랑하는 외손자가 친할머니와 친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받게 할려는
묘책중의 묘책이셨다고 합니다.

아무렴 평생동안 <정직>을 일생일대의 좌우명으로 여기시며 살아오신 외할머니께서
나쁜생각을 하신것은 절대로 아니라고 하십니다.
결과적으로 일이 있어서 외손주를 봐줄수 없다고 하신것은 거짓이었지만서두요...

나이가 들면 누구나 육아상식은 더욱 까맣게 잊혀지는데 경험조차 없는분으로서
아이를 맡는일이 공포스러웠을것입니다.
그래도 어렵게 부탁하는 맡며느리의 청을 거절할수가 없으셨던 금호동 할머니께서는
모든일을 남에게 맡기시거나 취소하신후 아이를 맡으신다고 승락을 하셔서
이제 겨우 엄마를 알아보는 .... 눈의 촛점이 맞춰진 저는 보따리를 싸들고 금호동
친할머님댁으로 들어가게됩니다. 어머니께서는 3일전에 먼저 가셔서 적응하는 시간을
가졌으며 드디어 출근하는 날 아침이 왔습니다.
어머님이 출근을 하시고 젖먹을 시간이 되었습니다.
유축기로 짜낸 엄마젖을 우유병에 넣을때 혹시 넘어지면 쏱아지기 때문에 언제나
뚜껑속에 엷은막을 끼워 넣어서 두는데 그것을 꺼내고 데운후 수유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막을 제거하지 않은채 젖을 먹임으로서 하루종일 먹여도 반병을 채 먹지를
못했답니다. 3병은 먹어야 할것을.... 그얇은 막 때문에 어쩌다가 조금씩 흘러나오는
젖을 눈물만큼 먹고는 하루종일 굶은거나 마찬가지가 되었답니다
엄마젖이 아닌 우유병을 싫어해서 뒤로 넘어지며 울다가 배가 고파서 할수없이
먹을려고 해도 세상에......젖이 나와야 먹지요.
아이 달래느라 정신이 없으셔서 전화연락도 오후에나 하셔서 이참저참에
곰돌이는 배고픔의 고통을 실감나게 체험한 끔찍한 시간의 연속이었습니다.
우리외할머니께서 이사실을 전혀 모르시고
저녁늦은 시간에 우리어머니의 전화를 받으셨답니다
개미목소리같은 ..위기에 처한 ..울음섞인 딸의 목소리가 수화기속에서
들려왔다고 합니다.
<엄마 낼 나좀 봐 봐><응.? 너 왜 그러니? 응?><아니야 엄마. 낼 나좀 봐 봐.>
더이상의 설명도 없이 전화는 끊어졌답니다.

할머니는 머리끝이 곤두서는 불안한 생각 때문에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 이튼날 아침은 마침 공휴일이어서 직장도 쉬고 시어머님께서는 모든 식구들을
대동하시고 멀리 친척집 결혼식에 가셔서 집에는 저와 어머니 단둘이만 있었습니다.
그래서 외할머니 오시기만을 눈이 빠지게 기달리고 있었답니다.
<엄마 나좀 봐 봐.> < → 풀스토리 B 에서 계속....>



2004년 5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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