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ngwie Malmsteen
2024. 10. 22. 13:18ㆍ팝아티스트
팝 음악을 지탱하는 두 가지 커다란 줄기인 뮤지션십(Musicianship, 음악적 숙련도와 완성도)과 애티튜드(Attitude, 음악을 하는 태도)는 항시 반목과 암묵적 화해를 거듭하며 대중 음악의 역사를 쌍끌이 해왔다.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가 대변자였던 프로그레시브 록과 섹스 피스톨즈(Sex Pistols)로 대표되었던 펑크(Punk)간의 대립이 절정에 이르렀던 1970년대만 생각해봐도 이는 명백하다. 이런 상황은 펑크가 지하 세계에서 숨죽이며 기회를 엿봤던 1980년대를 거쳐 얼터너티브라는 얼터 에고(alter-ego)로 재림(再臨)했던 1990년대에도 그대로 재현되었다. 그런지와 함께 주류 록 네트워크를 잠식한 다수의 모던 러버들은 테크닉 위주의 헤비 메탈에 맹공을 가하며 세력을 위축시켰던 것. 재빨리 시류를 탔던 메탈리카(Metallica) 정도만이 예외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속주 기타의 대명사 잉베이 맘스틴은 이런 위급한 사태 속에서도 느긋하기 그지없었다. 하기야 원체 자신감을 넘어 천상천하 유아독존 사상으로 똘똘 뭉친 그였으니, 눈 하나 깜짝할 리가 만무했다. 인터뷰에서도 탐구 정신이 실종된 당시 록 신을 비난하며 그의 외고집이 정도(正道)임을 수 차례 설파했다. 자신의 음악이 비주류 중의 비주류로 전락했고 오직 마니아들의 충성 속에 유지된다는 사실에도 불구, 꾸준히 닦아놓은 길의 항로를 바꾸려 하지 않으며 마이 웨이를 부르짖었다. 그것은 바로 클래식으로부터 차용해온 대위법과 하모닉 마이너 스케일을 중심으로 쉴새없이 쏟아내는 음표의 향연, 속주 기타 제왕으로서의 길이다. From Guitar Kid to Guitar Zeus 잉베이 맘스틴은 1963년에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태어났다. 오페라 명가 출신인 어머니의 우산 아래 3살부터 피아노를 수학했던 그는 7살 때, 지미 헨드릭스의 공연을 보고 크게 감명 받아 기타리스트를 인생의 방향 지표로 삼았다. 이후 10대 초반 시절에 3년 동안 하루 8시간씩이라는 고된 수행을 거치며 내공을 축적했고, 영향 받은 아티스트들인 지미 헨드릭스와 리치 블랙모어를 뛰어넘어 독자적인 스타일을 개발해냈다. 오페라 단원이었던 누나로부터 독보력과 스케일 이론을 사사 받아 이론과 실제를 겸비한 것도 이 즈음이었다. 이 기타 키드는 16살 때 밴드 라이징 포스(Rising Force)를 결성해 4트랙 짜리 데모 테이프를 완성, 이것을 슈라프넬의 대표이자 그 당시 많은 속주 기타리스트를 발굴했던 혜안(慧眼)의 소유자 마이크 바니에게 보냈다. 이를 듣고 단번에 반한 마이크 바니가 구애의 손길을 뻗친 것은 자연스런 수순이었다. 그는 당시 자신의 정기 기고매체였던 기타 플레이어(Guitar Player)지에 잉베이 맘스틴을 소개해주었다. 킬(Keel)의 보컬리스트였던 론 킬(Ron Keel)이 이끌었던 스틸러(Steeler)에 가입시켜준 것 역시 마이크 바니였다. 1983년 단 한 장의 앨범에 참여하고 스틸러를 떠난 잉베이 맘스틴은 그레이엄 보넷(Graham Bonnet)을 만나 알카트라즈(Alcatraz)에 새 보금자리를 틀었다. 1984년의 데뷔작 <No Parol From Rock'n'Roll>과 라이브 앨범 <Live Sentence>에서 출중한 연주력을 선보이며 세계를 상대로 잉베이 맘스틴식 기타 브랜드를 널리 알렸다. 그리고 1984년, 부활한 라이징 포스와 함께 처녀작 <Yngwie Malmsteen's Rising Force>를 내놓으며 바로크 메탈의 전성 시대를 활짝 열었다. 'Far beyond the sun', 'Black star', 'Evil eye', 'Icarus dream suite Op. 4'등, 전곡이 보석이었다. 1980년대에 등장했던 1985년의 소포모어 앨범 <Marching Out>과 1986년의 3집 <Trilogy>, 1988년의 4집 <Odyssey>등에 대한 반응도 폭발적이어서 잉베이 맘스틴은 이 시기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명성을 쌓아나갔다. 1960년대의 지미 헨드릭스, 1970년대의 에디 밴 헤일런에 뒤를 잇는 기타사의 히어로로 그가 지목된 것도 이 때부터였다. 허나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헤비메탈 신 전체의 하락세와 함께 그의 음악도 구시대의 유물 취급을 받기 시작했고 수많은 애호가들이 그에게 비난의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음악이 항상 똑같고 새로운 맛이 없다.', '왼손의 서커스에만 몰입하는 한심한 연주자'라는 등의 혹평이 잇달았다. 그러나 기타를 쳐본 사람이라면 느끼겠지만, 속주 기타는 왼손만으로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핑거링과 피킹이 합일(合一)되지 않고서는 제대로 구사할 수 없기에 그러하다. 주위의 입방아와는 무관하게 잉베이 맘스틴은 연달아 음반을 발매했지만 피드백 효과는 미미하기 그지없었다. 1990년의 <Eclipse>, 1992년의 <Fire and Ice>. 1995년에 출시된 <Magnum Opus>, 1996년의 리메이크 음반 <Inspiration>, 1998년의 <Facing the Animal>, 1999년의 <Alchemy> 등, 대부분의 작품이 이에 해당된다. 베스트 콜렉션으로 구매 동기를 유발시킨 <The Yngwie Malmsteen Collection>(1992), 'Never die'와 아름다운 발라드 'Mean to be' 등이 히트하며 기타 인스트루멘탈 팬들의 환호성을 이끌어냈던 1994년의 수작 <Seventh Sign>,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한 <Concerto Suite for Electric Guitar and Orchestra in E Flat Minor Op. 1>(1998) 정도가 예외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특히 후자는 그가 오랜 기간 갈망했던 소원을 성취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깊은 본격적인 클래식과의 만남이었다. 2000년 들어 그는 <War to End All Wars>(2000)와 <Live With The New Japan Philharmonic>(2002)으로 다시금 기타 명장(名匠)의 풍모를 뽐냈고 2002년 현재, <Attack!!>]으로 팬들의 곁을 다시 찾아올 예정에 있다. 마지막으로 잉베이 맘스틴의 음악 철학을 파악할 수 있는 뱀발 하나. “테크닉에 미치는 것은 불필요하고 바보짓일 뿐이다. 내가 언제나 주장하고 싶은 바는 그루브감을 지닌 뮤지션이 되라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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