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tti Smith
2024. 10. 10. 06:50ㆍ팝아티스트
히피들의 혁명적인 자유의 외침이 시들해질 무렵, 미국 뉴욕의 언더그라운드 클럽에서는 이전의 록과는 다른 음악적 실험들이 행해지고 있었다. 텔레비전(Television)과 레이먼즈(Ramones) 등의 CBGB 클럽을 중심으로 한 펑크 록이었다. 패티 스미스(Patti Smith)는 그러한 남자들의 홍수 가운데서도 당당히 어깨를 나란히 하며 '펑크의 대모' 라는 칭호와 함께 70년대의 유니크한 아이콘으로 떠오르게 된다. 펑크와 여성 뮤지션의 역사에 있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커다란 줄기라고 할 그녀는 문학과 음악의 경계를 넘나드는 시적인 언어의 사용과 중성적이고 강인한 이미지를 결합한 독특한 음악세계를 전개하면서 '언어의 힘을 융합한 3 코드 록(Three Chord Rock Merged the Power of Words)'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2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수많은 여성 로커들의 역할모델이 되어왔다. 어릴 적부터 랭보와 짐 모리슨, 롤링 스톤tm의 음악에 빠져있던 그녀는 학교 교육이라는 울타리에 갇혀있기를 거부하고 좀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기 위해 뉴욕으로 향하게 된다. 그곳에서 연극 공동집필과 시를 쓰며 지내던 그녀는 기타리스트 레니 케이(Lenny Kaye)를 만나게 되는데, 케이의 기타 리듬에 맞추어 자신의 시를 낭송하는 것을 계기로 음악역정에 첫 씨를 뿌리게 된다. 이후 몇 년 동안 록 전문지 크림(Creem)에 정기 기고하는 록 평론가로 활동했으며 뉴욕 돌스(New York Dolls)의 오프닝 무대에 서기도 했다. 뉴욕 타임 스퀘어 광장에서 벌어진 '록과 랭보(Rock'n Rimbaud)' 공연을 계기로 레니 케이와 다시 손잡게 되고 피아노 리차드 솔(Richard Sohl)이 가세하면서 본격적인 밴드활동을 시작한다. 1974년 그룹은 곡목부터 신랄한 'Piss Factory' 라는 첫 싱글(리드 기타에 텔레비전의 톰 벌레인이 참여)을 발표하였고, 이후 블론디 출신의 기타리스트 이반 크랠(Ivan Kral)을 영입하여 4인조로 거듭나 텔레비전 등과 함께 CBGB 클럽의 고정 출연진으로 활약하며 왕성한 라이브 활동을 펼친다. 한때 모던 러버스(Modern Lovers)를 이끌었던 조나단 리치맨(Jonathan Richman)이 드럼 파트를 맡아준 적도 있었지만, 곧 제이 디 도허티(Jay Dee Daugherty)가 들어오고 밴드가 점차 자신의 색깔을 굳힐 때쯤인 1975년 그룹은 아리스타(Arista) 레이블에 픽업되어 역사적인 첫 앨범 <Horses>를 발표한다. 전 벨벳 언더그라운드 멤버였던 존 케일(John Cale)이 프로듀싱을 맡고, 톰 벌레인이 참여하기도 했던 이 앨범은 화려한 그들의 지원 못지 않게 밴드의 주축인 패티 스미스와 레니 케이의 음악적인 역량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펑크 록은 물론 록 전체의 역사에 길이 남을 명반으로 평가받는다. '상징주의'로 표현되는 애매 모호하고 즉흥적인 노랫말, 강렬하지만 세련된 짜임새를 가진 사운드는 당시의 펑크 초창기 앨범들의 '날것'이나 '껄렁껄렁'한 것들과는 차별된, 아트형 펑크의 새 길을 열었다. '예수는 남의 죄를 위해 죽었지만 나를 위해선 아냐...'하는 가사로 시작되는 록 역사의 명곡 'Gloria'와 'Land of 1,000 dances'(메들리 곡 'Land')가 여기 들어있다. 이후 두 번째 앨범 <Radio Ethiopia>로 돌아온 그녀는 투어 도중 무대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하여, 잠시의 공백기를 가진 후에 1978년 마침내 패티 스미스란 이름을 대중에게 익히게 한 세 번 째 앨범 <Easter>를 발표한다. 브루스 스프링스틴(Bruce Springsteen)과 함께 곡을 쓴 'Because the night'는 빌보드 팝 싱글차트 13위를 기록했고 이어 전미와 유럽 투어에 나서는 등 세계적 성공을 만끽했다. 이 곡은 나중 나탈리 머천트가 이끈 뉴욕의 포크 밴드 텐 싸우선드 매니악스(10.000 Maniacs)의 MTV 언플러그드 공연에서 리메이크되어, 그때까지 차트실적이 미미했던 그들에게 고대하던 성공을 안기면서(차트 11위) 명곡의 위력을 되새김질했다. 한편 <Easter> 앨범에는 영화 <올리버 스톤의 킬러>에 삽입되어 패티 스미스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Rock N roll nigger'가 수록되어있기도 하다. 하지만 록 스타덤에 대한 깊은 회의감과 프로토 펑크 그룹 엠씨 파이브(MC5) 출신의 기타리스트 프레드 스미스(Fred 'Sonic' Smith)와의 사랑으로 그녀는 새로운 삶을 갈구하면서 활동중단을 결심하게 된다. 결국 토드 런그런(Todd Rundgren)이 프로듀스한 네 번째 앨범 <Wave>를 발표한 얼마 뒤인 1979년 가을, 수많은 예술적 이상적 목표를 묻어버린 채 이탈리아 축구 스타디움에 운집한 7만명의 관중 앞에서 'Bye, Bye, Hey, Hey'를 외치며 은퇴하였다. 1980년 프레드와 결혼한 스미스는 디트로이트에 정착하였고, 그 후 몇 년 동안은 두 아이의 양육과 음악적인 영감에만 온 힘을 쏟으며 조용하고 행복한 삶을 누렸다. 그러한 행복은 1988년 두 부부의 합작 앨범 'Dream Of Life'에 그대로 반영되어 사람들 속에 내재된 무한한 긍정적 가능성에 대해 노래하는 한편, 어린이들에 대한 평화적인 메시지를 담기도 했다. 국가 간의 평화를 기원하는 'People have the power'가 수록된 이 앨범은 당시 국내에 라이선스 음반으로 출시되기도 했다. 그러나 삶의 행복 속에서 그녀의 주위에는 짙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게 된다. 1994년 남편 프레드가 심장병으로 사망했고 한달 뒤에는 동생인 토드(Todd)마저 심장 마비로 죽었으며, 오랜 친구 메이플소프와 옛 동료인 리처드 솔마저 이승을 떠났다. 너무나 짧은 시간에 많은 소중한 친구들을 잃어버린 스미스는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작은 것인지 뼛속깊이 느낀 나머지 프레드와 함께 준비중이던 앨범 작업을 중단한 채, 슬픔과 비탄의 생활에 빠지게 된다. 그러한 절망 속에서 스미스는 무대 위에서의 청중, 팬들과의 교감을 더욱 간절히 원하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뿐 아니라 자신의 음악을 사랑했던 이들을 위해서라도 다시 무대 위에 서야겠다고 결심하고, 이전의 멤버들을 모아 라이브 공연 활동을 시작한다. 이후 롤라팔루자 무대에 서고 영화 <데드 맨 워킹>의 사운드트랙에 참여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당시 모던 록계에서의 자신의 존재와 가능성에 대해 실험한 그녀는 1996년 통산 여섯 번째 앨범인 <Gone Again>과 함께 돌아왔다. <롤링스톤>지는 무려 8년 만에 신작을 낸 그녀를 '올해의 컴백'으로 포상했다. 이전부터 그녀와 음악적인 활동을 교류하던 톰 벌레인과 존 케일은 비롯하여 지금은 고인이 된 포크 싱어송라이터 제프(Jeff Buckley) 그리고 만돌린을 연주해준 친동생 킴벌리 스미스(Kimberly Smith)가 참여한 이 앨범은, 주변인들 죽음에 대한 비탄에서 벗어나 그것을 긍정적인 마인드로 극복하려는 치유의 메시지를 담으면서 초창기 때보다 더욱 성숙한 사운드를 과시함으로써, 수많은 후배 뮤지션들의 존경과 갈채를 받기도 했다. 이후 1997년 <Peace And Noise>과 2000년 <Gung Ho>, 두 앨범을 더 발표하여 활력을 되찾은 패티 스미스는 4반세기의 열정적 음악인생을 간직한 채 올해로 56세를 맞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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