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zzy Osbourne

2024. 10. 7. 11:28팝아티스트

 
 

데뷔/결성: 1970년대

활동/시기: 1980년대~

멤 버: 오지 오스본(Ozzy Osbourne, 보컬), 랜디 로즈(Randy Rhoads, 기타), 브래드 길리스(Brad Gillis, 기타), 제이크 E 리(Jake E Lee, 기타), 잭 와일드(Zakk Wylde, 기타), 밥 데이즐리(Bob Daisley, 베이스), 루디 사르조(Rudy Sarzo, 베이스), 리 커슬레이크(Lee Kerslake, 드럼), 토미 알드리지(Tommy Aldridge, 드럼), 랜디 카스틸로(Randy Castillo, 드럼), 돈 에어리(Don Airey, 키보드), 존 싱클레어(Jon Sinclair, 키보드)

오지 오스본만큼 갖가지 구설수에 오르내린 록 뮤지션도 드물 것이다. 그는 여러 기행으로 숱한 가십거리를 만들어 냈는데, 오랜 세월 동안 따라다닌 지독한 알콜 중독은 차치하더라도 그를 둘러싼 얘깃거리는 무수하다.

착란 상태에서 부인이자 매니저인 샤론 아든(Sharon Arden)을 살해하려한 것, 알라모 기념비에 방뇨, 공연 중 박쥐의 머리를 물어뜯음. 이런 상상하기 힘든 에피소드들로 그는 메탈이 '악마의 음악'이라는 오명을 쓰게 하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그는 부모들이 혐오하는 록 스타의 전형이었다. 특히 한 소년의 죽음에 그의 노래 'Suicide solution'이 연관되어 있다는 주장을 토대로 그의 부모에게 오지가 기소당한 사건은 너무나도 유명한 일화다.

하지만 이 모든 괴벽과 사건에도 불구하고 오지 오스본은 헤비메탈 씬에 자신의 존재를 뚜렷이 각인하며 정상의 록 보컬리스로 군림해 왔다. 사실 그의 가창력은 경탄할 만한 수준의 것은 아니었고, 이미지도 깔끔함, 말쑥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대중을 휘어잡는 그의 강력한 카리스마는 그러한 것들을 덮어 버리고도 남았다. 아드레날린의 분비를 촉진하는 그의 열정적인 스테이지 매너는 그 자체로 헤비메탈의 규범을 제시했다.

30년에 달하는 긴 시간 동안 20여장에 이르는 음반을 공개하며 탄탄한 경력을 쌓아 온 오지 오스본의 유년기는 그러나 순탄하지 못했다. 1948년 영국 버밍햄에서 빈곤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린 나이에 학교를 중퇴하고, 도살장과 같은 허름한 일터에서 생계를 벌어야 했다. 집은 언제나 가난에 쪼들렸고, 오지는 상점을 터는 등 비행을 저지르며 힘겨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어깨를 짓누르는 무겁던 현실을 록 음악을 통해 날려 버렸다. 로컬 밴드의 일원으로 활동하던 오지는 토니 아이오미(Toni Iommi)등과 블랙 사바스(Black Sabbath)를 결성해 공상에서나 가능할 듯했던 범세계적인 스타가 되었고, <Paranoid>, <Black Sabbath Vol.4>등의 마스터피스를 터뜨렸다. 그렇지만 술과 마약에 빠진 오지와 멤버 사이에는 곧 반목이 발생했고, 그는 <Never Say Die>를 마지막으로 그룹 활동을 접었다.

곧 그는 솔로로서의 데뷔를 추진하는데, 오지는 오히려 그 시절 더 큰 명성을 획득하게 된다. 그의 솔로 활동 기간은 함께 했던 기타리스트의 변화와 함께 몇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랜디 로즈(Randy Rhoads)와 팀웍을 맞췄던 1980년부터 1982년까지는 클래식 기타강사 출신인 랜디의 영향이 작품을 깊게 지배해 장엄하면서 스케일이 큰 음악을 추구했던 시기였다. 뛰어난 기타 플레이어이자 작곡가이기도 했던 랜디의 도움으로 오지는 이 시기 상업적으로 괄목할 만한 결과를 얻어내었고, 음악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들을 수 있었다.

허나 이 콤비네이션은 랜디 로즈가 불의의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면서 오래 가지 못하게 되고, 그에게 많은 부분을 의탁하고 있었던 오지는 실의에 빠졌다. 그에게 랜디 로즈란 단순한 동료이자 연주 파트너가 아니라 정신적인 부분까지 교감하고 공유하는 소울 메이트였기 때문이다.

간신히 몸을 추스린 오지는 브래드 길리스(Brad Gillis)를 영입해 라이브 음반 <Speak Of The Devil>을 발표한다. 브래드는 곧 자신의 밴드 나이트 레인저(Night Ranger)로 건너가게 되고 오스본 그룹에는 일본인 피가 흐르는 기타 연주자 제이크 E 리(Jake E Lee)가 가세한다. 제이크는 랜디와는 달리 공격적인 프레이즈를 즐겨 사용했는데, 이쯤해서 밴드의 음악도 랜디 시절의 어두움과 음울함을 어느 정도 벗어나 메탈 특유의 드라이브(Drive)감을 살리는 방향으로 맞춰지게 됐다.

제이크가 연주한 'Bark at the moon'이나 'Shot in the dark'를 들어보면 초창기 음악과 스타일 면에서 얼만큼의 차이가 생겼는지를 직감할 수 있다. 하지만 랜디 로즈에 대한 그의 집착은 밴드에 치명상을 입혔는데, 그는 랜디의 추모음반 <Tribute>를 제이크의 동의 없이 공개함으로서 강한 반발을 샀다. 결국 오지의 돌출 행동으로 그룹은 커다란 전력 손실을 겪게 된다. 자존심에 상처를 받은 제이크가 팀을 떠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오지 오스본은 다시 기타리스트를 영입하기 위해 오디션을 실시했고, 채 소년 티를 벗지 못한 잭 와일드(Zakk Wylde)가 새 멤버로 낙점되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 잭 와일드는 그 이름만큼이나 힘있고 거친(Wild) 플레이를 자랑하는 천재였고, 그의 가세로 밴드의 사운드는 'Miracle man', 'Mr. Tinkertrain' 등에서 잘 나타나듯 결성이래 가장 헤비하게 변한다. 새 피의 수혈은 활기가 부족했던 밴드에 힘을 불어넣었고, 알코올의 해악을 깨달은 오스본의 성숙한 자세와 어우러져 비평가들과 대중들로부터 모두 긍정적인 반응을 획득했다.

<No More Tears>의 성공을 뒤로 한 채 팬들에게 은퇴를 표명했던 오스본은 1995년 귀환을 알렸다. 헤비메탈과는 관련없는 자신의 밴드 프라이드 앤드 글로리(Pride & Glory)를 운영중인 잭 와일드에 대한 미련을 지우지 못한 오지는 대신 조 홈즈(Joe Holmes)를 새 기타리스트로 대동하고 신작 <Ozzmosis>를 내놓았다. 그러나 아트 록계의 일급 키보디스트 릭 웨이크만(Rick Wakeman), 오랜 친우 기저 버틀러(Geezer Butler)가 도움을 준 컴백 작품은 그다지 신통치 못했다. 긴 시간 동안 그의 복귀를 기다려 온 사람들은 순간 실망했지만 얼마 후 흐뭇한 미소를 짓게 되었다. 오지가 신세대 록, 메탈 그룹들이 대거 출연하는 페스티벌 <오즈페스트(Ozz-Fest)>를 창시한 것. 그의 기획력 덕택에 팬들은 더 많은 록의 축제를 향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오지 오스본은 아직까지도 함성과 환호가 넘쳐나는 무대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언제나 끓어오르는 동력으로 가득한 앨범들을 발표해 왔던 오지에게 육체적인 나이란 사실 부차적인 사항에 불과한 것이다. 그는 영원히 고갈되지 않는 록의 원천과도 같은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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