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mp Bizkit

2024. 9. 28. 12:15팝아티스트

데뷔/결성: 1994년

활동/시기: 1990, 2000년대

멤 버: DJ Lethal(디제이), John Otto(드럼), Fred Durst(보컬), Sam Rivers(베이스), Wes Borland(기타)

핌프 록으로 각광받는 백인 쓰레기들

림프 비즈킷은 지난 2000년 가을 서태지의 컴백과 함께 국내에서 가장 주목받았던 하드코어 그룹 중 하나이다. '울트라 맨' 서태지가 기자 회견에서 핌프 록(Pimp Rock)이라는 생소한 음악 용어를 언급하면서 림프 비즈킷의 이름을 거론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각 언론에서는 핌프 록의 정의 내리기와 병행하여 앞다투어 그 선구자로 림프 비즈킷을 뽑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또한 같은 시기에 공교롭게도 그들의 3집 앨범 <Chocolate Starfish And Hot Dog Flavored Water>이 출시되면서 서태지에 의해 점화된 핌프 록 열풍은 절정에 달했고, 림프 비즈킷은 레이지 어겐스트 더 머신(Rage Against The Machine)과 콘(Korn)을 제치고 단숨에 하드코어 시장의 황제주로 등극했다. 국내 마이너리그에서 매니아와 동고동락하던 그들이 주류에서 탄탄한 음악 블록을 형성한 것이다.

사실 서태지와 림프 비즈킷에 의해 우리 나라 음악팬들에게 널리 알려진 장르 핌프 록은 평론가들이나 아티스트들에게 빈번하게 통용되는 명칭이라고는 할 수 없다. 서태지에 의해 처음 소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전까지 핌프 록은 소수의 울트라 매니아들에게서만 하드코어의 서브 장르로 공유되고 있을 뿐이었다. 포주, 뚜쟁이, 악당, 한량 등의 핌프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백인 청년들의 쓰레기 삶을 랩 메탈 사운드에 실어 적나라하게 터트린 것이기에 두르러지지 않은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때문에 코어 팬들이 아니라면 장르의 세분화에 불편해할 필요 없이, 그저 하드코어, 랩 메탈 등으로 포커스를 맞추는 것이 더욱 타당할 듯 싶다.

여기에 림프 비즈킷은 한 발 더 나아가 자신들의 음악을 핌프 록도 하드코어가 아닌 '록'이라는 큰 카테고리에서 규정짓는다. 그들은 당시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핌프 록이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겠다. 우리 음악은 힙합 록도 랩 메탈도 아니고 크게 봐서 록이다. 세분하자면 멜로디를 가진 랩의 새로운 타입이 아닐까. 리듬감이 강한 로큰롤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라며 특정한 장르에 얽매이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나 그들이 사운드와 노랫말에 랩 메탈은 물론이고, 핌프의 요소들까지 구비해놓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프레드 더스트의 자극적인 보컬, 웨스 볼랜드(Wes Borland)의 강력한 기타, 샘 리버스(Sam Rivers)의 그루브 베이스, 존 오토(John Otto)의 메탈 드럼, 그리고 디제이 러설(DJ Lethal)의 힙합은 하이브리드의 최신 트렌드를 갖추며, 온 몸의 감각 세포를 마비시키는 듯한 중독성을 내포하고 있다. 1999년 소포모어 음반 <Significant Other>에서 솟아난 히트 싱글 'Nookie', 1년 뒤에 내놓은 3집의 대표곡 'My generation'에서 잘 드러난다.

휘몰아치는 사운드 광풍에 걸맞게 메시지도 걸쭉하다. 바른 생활 소시민이라면 눈이 휘둥그레질 육두문자의 전시장이다. 'Fuck'은 기본이고, 영어론 된 온갖 욕설은 모두 접할 수 있는 배려(?)를 해놓고 있다. 3집의 수록곡 'Hot dog'에서는 'Fuck'이란 말이 무려 50번 가까이 나온다. 이에 대해 프레드 더스트는 “습관이다. Fuck이 없으면 말이 되지 않는다. God Damn은 유행이 지났기 때문에 쓰지 않는다.”며 욕의 생활화를 예찬했다. 바로 백인 하위 계층, 즉 핌프 세대(Pimp Generation)의 문화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 단적인 예이다.

미디어 시대에 살아남는 전략

현재는 미디어 시대이다. 누가 더 많이 매체에 모습을 많이 드러내느냐에 따라 성공의 성패가 좌우되는 현실이다. 때문에 대부분의 가수들은 콘서트 무대뿐만 아니라, TV, 라디오, 뮤직 비디오 등을 통해 다양한 방법으로 대중들과 소통하려 고군분투한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긴장감이 감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살아남기란 적자생존의 정글논리처럼 치열하다 못해 처절하다. 얼굴 없는 가수의 마케팅도 그 점을 교묘히 노린 상술이라는 것을 이제 알만 한 사람은 누구나 다 안다.

림프 비즈킷 역시 예외일순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의식 있는 뮤지션들이 거부하는 미디어와의 제휴에 적극적으로 돌진하여 생존의 돌파구를 마련했다. 그것이 의도됐던, 의도되지 않았던 그들은 항상 이슈를 부각시키며 대중들의 이목을 환기시켰고, 사로잡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 서바이벌 전쟁터에서 당당히 살아남아 지금까지 쾌속항진하고 있다.

처음 그들의 데뷔부터 그랬다. 1994년 미국 플로리다에서 결성된 림프 비즈킷은 문신 아티스트로도 활동을 하던 프레드 더스트가 콘의 베이시스트 필디에게 문신을 새겨준 것을 계기로 친해져 음악계에 입문했다. 이후 콘의 도움으로 그들은 하우스 오브 페인(House Of Pain), 데프톤스(Deftones), 페이스 노 모어(Faith No More) 등의 공연 무대에 서며 공력을 다져나갔고, 1997년 데뷔작 <Three Dollar Bill Y' All>을 발표했다. 그들의 1집은 콘이라는 든든한 백그라운드와 조지 마이클의 명곡 'Faith'의 저돌적 리메이크 버전을 앞세워 안전하게 메이저에 안착했다.

그리고 1999년 2집을 발표할 무렵에는 프레드 더스트가 소속 레이블인 유니버설 산하 <인터스코프(Interscope)>의 부사장으로 발탁되면서 또 한 차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당연하게도 음반은 스매시 히트곡 'Nookie'의 돌풍과 함께 600만장이상 팔리는 기염을 토했다. 또한 1년 뒤인 2000년에는 냅스터 문제에 적극 개입하며 네티즌과 동료 뮤지션들 사이에서 치열한 공방을 불러일으켰다. 인터넷 음악 무료 다운 서비스 파일인 <냅스터(Napster)>의 당위성을 주장하여 지지입장을 밝힌 것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그들은 냅스터측으로부터 180만 달러의 지원을 받아 길거리 무료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그들은 “냅스터는 부인할 수 없는 첨단 기술이다. 어쩌면 빅 스타를 만드는 또 다른 힘일 수 도 있다”며 냅스터 폐지론자들에게 인터넷의 긍정적인 면을 받아들일 것을 권고했다. 그 해 공개된 세 번째 음반은 전작들에 비해 그다지 두드러진 음악적 성취를 이루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발매 첫 날 미국에서만 40만장이 팔려나가는 등 림프 비즈킷의 견고한 명성을 재확인 시켰다.

최근에도 그들의 노련한 비즈니스 능력은 빛을 발하고 있다. 지난해 갑작스레 팀을 탈퇴한 기타리스트 웨스 볼랜드의 공석을 메우기 위해 그들은 요즘 기타리스트를 찾기 위한 전미 투어 겸 파티를 벌이며 팬들에게 자신들의 존재를 계속 부각시키고 있다. 그리고 얼마 전 그들은 리믹스 앨범 <New Old Song>을 들고 나왔다.

이런 사실들은 그냥 짤막한 그들의 바이오그래피중 일부분으로 받아넘길 수도 있다. 하지만 단순하게 여겨질 수 있는 '재료'를 상업적 마인드와 결부시켜 '진수성찬'으로 탈바꿈시켜내는 그들의 능력, 특히 사업가, 뮤직 비디오 감독 등으로도 맹활약하고 있는 프레드 더스트의 감각은 가히 동물적이라 할 만 하다. 내용면에서는 틀리지만, 서태지의 노선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림프 비즈킷이 펼쳐내는 일정 수준 이상의 음악, 핌프 록 사운드가 뒷받침을 해주기에 가능하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총성 없는 전쟁이다. 이제는 오직 미는 노래 한 두 곡, 뛰어난 음악성으로만 승부를 거는 시대는 지났다. CD 한 장에는 아티스트의 피와 땀뿐만 아니라 여러 복합적인 마케팅과 전략들이 물샐틈없이 꼼꼼하게 진행되어야 한다. 성장의 다이너미즘(Dynamism)을 위한 통과의례다. 핌프 록과 림프 비즈킷이 말해주고 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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