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nie Francis
2024. 9. 15. 10:05ㆍ팝아티스트
-Connie Francis는 1938년 12월 12일 뉴저지주의 Newark에서 ‘Concetta Rosa Maria Franconero’라는 본명으로 태어났다. 그녀는 네 살 때부터 아코디언을 연주하기 시작하였으며 11세 때에는 프로로서의 노래를 하게 된다. 또한 Arthur Godfrey Talent Show에서 우승을 한 후에 Godfrey의 제안으로 이름을 Connie Francis로 바꿨다. 1955년에 MGM Record사와 계약을 하며 처음으로 앨범 “Freddy”이 Eartha Kitt와 Stan Kenton에 의해 녹음되었다. 그녀의 열번째 곡인 “Majesty Of Love”는 Marvin Rainwater와의 듀엣으로 발매되어 미국 챠트에 진입을 한다. 1957년에는 아버지의 권유로 오래된 곡들을 모아 발매를 하고 그 중 1923년 곡인 “Who's Sorry Now”가 미국 챠트에서 4위를 기록하며 영국에서는 정상에 오르는 한편 이 곡을 포함해서 “My Happiness”, “Among My Souvenirs” 그리고 “Together” 등이 지속적인 히트를 기록한다. 1958년 Neil Sedaka와 Howard Greenfield에 의해 만들어진 쾌활하면서도 비트감 있는 “Stupid Cupid”(“Carolina Moon"과 함께 같이 정상에 오름)와 “Where The Boys Are”등이 챠트 정상에 오르며, 그녀의 또 다른 곡들이 계속해서 챠트의 10권에 머물러 있었다. <“Lipstick on Your Collar”, “Frankie”, “Mama”, “Everybody’s Somebody’s Fool”(미국 챠트 첫번째 넘버 원), “My Mind Has A Heart Of Its Own”(US No.1), “Many Tears Ago”, “Breakin’ In A Brand New Broken Heart”, “When The Boy In Your Arms (Is The Boy In Your Heart)”, “Don’t Break The Heart That Loves You”(US No.1), “Second Hand Love” 그리고 “Vacation”> 1960년에는 “Where The Boys Are”로 영화에 데뷔를 하게 되며 그 뒤로 여러 편의 뮤지컬에도 출연을 하기도 하였으며 이후 1960년대의 후반에는 새로운 비트에 밀려 침체기를 걷는다. 그녀는 UNICEF 뿐만 아니라 비슷한 기관에서 일하면서 몇 개의 언어(French, Spanish 그리고 Japanese)로 녹음도 하는데 또 한나 주목할 만한 것은 ‘Connie Francis Sings Great Jewish Favorites’라는 타이틀을 갖게 된 것이다. 1974년에 뉴욕 외곽의 Westbury Theatre에서 공연을 마치고 자신의 숙소에서 불량배들에게 추행을 당한 그녀는 그 모텔을 상대로 고소를 하여 3백만 달러 이상을 배상받았다는 후문도 있지만 긴 시간 동안 그로 인한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만 하였고 그녀에게 많은 조언을 해주던 아버지는 암으로, 그리고 남동생은 총격으로 사망하는 불운이 뒤따랐다. 게다가 축농증 수술의 잘못으로 예전의 목소리를 되찾을 수 없게 된 것이다. 1981년 열렬한 리셉션과 함께 Westbury에 돌아온 그녀는 미국과 해외에서의 연주도 하게 되지만 예전의 그녀의 모습을 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50년대와 60년대까지 아름다운 목소리와 풍부한 음악성으로 전 세계 팝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던 그녀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우리가 접하고 있는 올드팝의 매력을 그녀에게서 찾아볼 수가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상업적인 면보다는 순수한 예술성에 기인한 아름다운 모습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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