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협정의 산 증인 백선엽 대장(예)에게 듣는다

2024. 5. 19. 14:54역사와문화산책

휴전협정의 산 증인 백선엽 대장(예)에게 듣는다

아직 총성없는 전쟁 계속.. 한미연합방위태세 더욱 굳건히 해야
Written by. konas 입력 : 2008-07-27 오전 5: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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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협정 55주년을 맞아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대한민국을 지킨 한국전쟁의 영웅이자 현재 국방부 군사편찬자문위원회 위원장으로 있는 백선엽 장군을 증언을 특집으로 게재한다. 대담진행은 성우회 이정린 사무총장이 맡았으며 김지욱 정책홍보실장이 정리했다.*

- 백대장님께서는 6·25 전쟁 기간 동안 제1사단을 지휘하시면서 국가가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했을 때 성공적인 낙동강 방어를 통해 청사에 빛날 전공을 남기셨고 휴전회담 때는 첫 한국대표이셨습니다. 금년은 휴전협정이 체결된 지 55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 당시의 전황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벌써 휴전협정이 체결된 지 55년이 되었습니다. 김일성이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불법기습 남침, 3일만에 서울이 함락 당한 후 낙동강에서 '부산 교두보'를 선정하여 최후 방어를 했습니다. 맥아더 원수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하여 우리가 서울을 수복하고 북한으로 진격했을 때 우리는 곧 조국통일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 해 10월에 중공군 100만이 압록강을 건너 왔습니다. 부득이 UN군과 한국군이 다시 37도선까지 후퇴했다가 다시 반격하여 38선을 돌파, 현 휴전선 부근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한 상태에 있을 때인 1951년 6월 23일 유엔 주재 소련 대표 말리크(Malik)가 방송을 통해 휴전협상을 제의했고 이에 따라 7월 10일에 개성에서 회담이 시작됐습니다.

당시 나는 동해안에서 1군단장을 하고 있을 때였는데 회담 시작 전인 7월 7일에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시작되는데 당신이 한국군 대표로 가게 되었으니 내일 이승만 대통령에게 신고를 하라"는 이종찬 육군참모총장의 전화가 왔었습니다. 그 이튿날 이승만 대통령을 뵈니 이 대통령은 휴전을 완강히 반대했습니다. "통일은 하지 않고 휴전을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곳에 뭣 하러 가느냐"고 하시기에 "대통령께서 원하시지 않으면 참가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니까 "미국 사람들하고 협조를 해야 하기 때문에 참석토록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7월 10일 오전 11시 개성의 내봉장(來鳳莊)이라는 한옥집에서 회담이 시작됐습니다. 이때 유엔군 측 휴전회담 대표로 미극동해군 총사령관인 조이 제독을 수석으로 하여 미국 육·해·공군 대표 각 1명과 한국군 대표인 나를 포함한 다섯 사람이 대표로 참석했습니다. 출발하기 전에 손거울 하나씩을 받았는데 이것은 위급한 상황일 때 이 거울로 구조 항공기에 신호를 보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공산군 측은 북한군의 남일, 중공군의 띵화 등 5명이 대표로 참석했습니다. 첫 회담에서는 5개의 의제를 쌍방 간에 논의했는데 군사분계선 설정 문제, 휴전 감시방법 및 그 기구의 설치 문제, 비무장지대 설정 문제, 포로 교환에 관한 협정 문제, 쌍방 당사국 정부에 대한 건의 등 5개 안건이었습니다.

 

- 백 대장님께서는 휴전협정이 맺어지기 전에 미국 워싱턴을 방문,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만나서 휴전협정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반대 입장을 전달하였다는데 그 배경과 대담하신 내용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내가 육군 참모총장 때인 1953년 5월, 카린스 미 육군참모총장의 초청으로 워싱턴을 방문했습니다. 이때 평소 절친한 친분관계에 있던 미 해군성 전략국장 아니버크 해군소장이 밤에 호텔로 찾아와서 "미 행정부는 이미 휴전을 하기로 굳히고 있다. 휴전협정이 조인되기 전에 아이젠하워 행정부로부터 어떤 보장을 받지 않으면 당신네가 실기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내가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직접 만나서 한국의 입장을 설명하고 미국으로부터 휴전 후의 안전보장을 받아내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보장은 한미동맹을 맺는 것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 이튿날 오전 10시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만났는데 그는 "우리는 휴전을 하기로 작정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아무리 반대해도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나는 "이승만 대통령이 혼자서 휴전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휴전을 반대하는 것은 한국 국민의 뜻이니 이승만 대통령의 휴전반대를 과소평가하지 말아달라. 한국 국민으로서는 통일 없는 휴전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답변했습니다.

 

-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6·25와 같은 전쟁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미국이 한국과 동맹을 맺어줄 것을 최초로 요구하셨다는데 이것은 역사적인 의의가 매우 큽니다. 그 경위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이때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지요.

내가 "대통령 각하, 왜 우리에게는 확고한 보장을 해 주지 않는가"라고 하자 그는 "어떻게 해주면 좋겠느냐?"라고 물었습니다. 내가 "예를 들어 상호방위조약같은 거...."라고 말하자 "그것은 구라파에서는 많이 해봤지만 아시아에서는 유일한 케이스다"라고 하면서 처음에는 난색을 표했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꼭 그렇게 원한다면 해주겠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내가 "우리는 전쟁으로 아무 것도 남은 게 없다"라고 하자 그는 "경제문제는 위원회가 구성됐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라. 비들 스미스 대장(국무성 차관)을 찾아가 보자"고 말했습니다.

그 다음날 스미스 대장을 만나 세부 이야기를 하고 돌아왔습니다.

6월 18일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과 상의 없이 거제도 등 8개 수용소에서 유엔군 측이 관리하던 반공포로 2만 7천여 명을 일방적으로 석방하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가 깜짝 놀랐습니다. 이때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에 가 있는 유학생들을 한국으로 모두 돌아오라고 해서 급하게 내가 돌아오게 되었으며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대담한 내용을 이 대통령께 보고했습니다.

- 한국군 20개 사단 증강과 경제지원에 관한 의견을 제시하셨다는데?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는 1952년 12월 4일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이때 밴플리트 장군은 서울 동숭동 서울대학교 본관 건물을 미 8군사령부로 쓰고 있었는데 몇 주 전 밴플리트 장군과 우리가 회합을 해서 한국군 20개 사단 증강계획에 대한 브리핑 준비를 했습니다. 라이언 군사고문단장과 내가 차트를 만들어서 12월 5일 오전 9시에 아이젠하워와 회의를 시작했습니다. 내가 15분 가량 이 계획에 대해 설명을 했는데 그는 이것을 추진해도 좋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한국군이 20개 사단을 갖추게 된 시초가 되었습니다.

- 미국 국무성과 국방성 대표들이 한국에 와서 이승만 대통령과 회담하면서 전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과 한국의 재건문제에 대해서 합의를 했습니다. 그에 관한 내용을 말씀해 주십시오.

6월 18일의 반공포로 석방이 국제적으로 상당히 문제가 되어 여러 가지 한미관계가 어렵게 됐지만 이것은 우리의 협상력을 크게 강화시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6월 25일 로버트슨 국무성 극동 차관보와 카린스 대장을 한국에 보냈는데 이들은 이승만 대통령과 18일 동안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까지 회담을 했습니다.

그 결과 첫째 휴전 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둘째 한국에 10억불의 경제원조를 하고 셋째 한국군 정규 20개 전투사단과 10개 예비사단 포함하여 여기에 상응한 해·공군을 계속 지원한다. 넷째 앞으로 제네바에서 정치회담을 하는데 90일 동안 요구사항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으면 한미 양국은 여기서 자동적으로 철수한다는 조건에 합의한 후 휴전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미국 측에 전달했습니다.

- 한미동맹이 맺어지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의 안전이 보장됨으로써 우리는 세계가 부러워하는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뤘다고 봅니다. 이에 대해서 말씀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6·25 남침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통일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미국으로부터 안전보장과 전력증강, 경제원조를 얻어낸 것은 오늘날 우리나라 발전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북진통일을 주장하던 이승만 대통령이 휴전에 동의하는 대가로 미국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북한의 계속되는 안보 위협 속에서도 우리나라가 미국의 후원 아래 생존할 수 있는 길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은 한국군의 전력증강을 위해 1952년부터 만 2년 동안 10개 사단을 20개 사단으로 증편하였고 한국군 장교 2000여명을 미국 17개 병과학교로 보내서 교육을 받게 하면서 제주도에 보충 훈련소를 개설해서 10만여 명을 집중 훈련하여 한국군의 발전을 도왔습니다.

우리나라는 세계 최빈국에서 국민소득 2만불 시대가 되었으며,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결국 건국이래 60년 동안 미국의 지원으로 국가안보와 경제를 튼튼하게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 지난 정부에서 한미관계를 소홀히 함으로써 한미연합방위 태세가 위태로워지자 2004년 6월 24일 미국 워싱턴을 방문하신 바 있습니다. 이때 미국 럼스펠드 국방장관과 대담하신 내용을 말씀해 주십시오.

당시 럼스펠드 장관은 매우 바쁜 상황임에도 나를 만나주어 고맙게 생각했습니다. 나는 이야기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지만 다음 세 가지 사항에 대해서 간곡하게 당부했습니다.

첫째, 앞으로 유엔군 사령관으로 꼭 4성 장군을 한국에 보내달라.
둘째, 다시는 주한민군을 감축한다는 말은 하지 않도록 해 달라.
셋째, 앞으로 한미동맹을 더욱 강화하도록 해 달라.
미 국방장관은 내가 말한 것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를 했습니다.

- 끝으로 우리 생존에 필수적인 한미동맹을 어떻게 미래지향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휴전이 된지 5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한반도에는 비무장지대를 사이에 두고 총성없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한데도 지난 정권들이 국가안보를 도외시하고 소홀히 했던 것은 안타깝습니다.

금년은 건국 60주년인 동시에 건군 6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를 기해서 6·25를 경험하지 못한 전후세대들에게 우리의 안보현실을 올바르게 교육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리고 우리 안보의 핵심축인 한미동맹의 중요성에 대해서 기회 있을 때마다 끊임없는 교육을 하고 설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미동맹은 과거 반세기가 넘게 우리나라 안보체제의 핵심이었으며 경제발전의 튼튼한 버팀목이었습니다. 앞으로도 한미동맹을 미래지향적으로 발전시키면서 한미연합방위 태세를 더욱 굳건히 하는 것이 우리의 안전을 보장해 주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自由誌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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