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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과 청일전쟁
2019-01-17 20:48:11
청나라 시대
동학 혁명과 청일 전쟁
아편 전쟁 이후 서양의 힘이 동양을 압도했다는 사실은 여실히 증명되었다. 그것은 단순히 기술면에서뿐만 아니라 사상·정신면에서도 앞서고 있다는 인식이 점차 높아졌다. 이 같은 인식은 단순히 서양의 선진기술만을 받아들이려는 양무 운동보다 훨씬 차원이 높은 것이라 하겠다.
서양의 뛰어난 사상·정신은 그리스도교에 연원을 두고 있다고 판단한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崔濟愚)는 이를 서학(西學)이라 칭하였으며 서양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서학보다 강인한 사상, 즉 정신 무장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최제우는 동양 전래의 유교·불교·도교의 3교를 종합한 동학(東學)을 창립하였다. 이 동학은 ‘서학’에 대립하는 ‘동학’이라는 자립적인 이데올로기와 교단 조직이 확립되면서 차츰 종교적 색채를 띠고 민중 속에 깊이 파고들게 되었다.
종교로서의 동학의 특징은 ‘인내천(人乃天)’ 사상이었다. 신을 초월적인 존재로 보지 않고 인간 속에 존재함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조선 조정은 종교를 기반으로 대중의 힘이 반체제적으로 뭉쳐지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동학을 탄압하였다. 1863년 교조 최제우에게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를 뒤집어씌워 처형하였으나 이 같은 탄압책은 도리어 동학의 힘을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교조 최제우의 처형에도 불구하고 동학 신도의 수는 나날이 증가했고 제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은 교조 신원 운동(敎祖伸寃運動)각주1) 을 전개했다. 조선 조정에 대하여 교조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다는 사실을 호소하는 항의 운동을 벌인 것이다.
1892년 11월의 삼례 시위를 비롯하여 1893년 2월에는 동학의 간부 40여 명이 광화문 앞에 엎드려 국왕에게 직접 탄원문을 바쳐 교조의 억울한 죄를 풀어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어 1893년 3월에는 전국 각지에서 2만여 명의 동학교도가 접주(接主)각주2) 의 인솔 아래 충북 보은(報恩) 장내로 모여들어 교조 신원을 요구하는 한편 척양(斥洋)·척왜(斥倭)를 외쳤다. 이에 놀란 조선 조정은 선무사 어윤중(魚允中)을 파견하여 설득 끝에 해산시켰으나 동학당의 기세는 부패무능한 정부와 관헌의 힘을 능가하고 있었다.
동학교도들의 궐기를 촉구한 사발통문. 주모자를 알 수 없도록 참가자들이 둥글게 서명한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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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황에서 동학 접주 전봉준(全琫準)이 거느리는 1천여 명의 농민과 동학교도들이 맨 먼저 횃불을 든 것은 1894년 2월 전라도 고부(古阜)에서였다. 고부 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학정에 못 이긴 이들 봉기군은 2월 15일 고부 읍내를 습격하였다. 이 사실이 관아에 알려지자 탐관오리의 표본인 군수 조병갑은 알몸으로 도망쳤다. 격분한 봉기군은 무기고를 때려부수고 무장한 다음 군청사를 파괴하고 관리들을 내쫓았다.
3월 25일 전봉준이 거느린 봉기군은 백산(白山)으로 이동, 포진하고 조정의 동태를 예의주시했다. 조정에서는 이 사태를 민요(民擾)로 규정하고 장흥 부사 이용태(李容泰)를 안무사로 삼아 고부 사변을 다스리게 하였다. 안무사 이용태는 사건의 진상이나 민심의 동향은 전혀 고려치 않고 역졸들을 풀어 무고한 백성을 함부로 구타하고 재산을 약탈하며 부녀자를 능욕하니 백성들의 원성이 다시 들끓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봉기에 가담했던 동학교도들을 색출하여 역도(逆徒)로 몰아 옥에 가두기까지 하였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한발 물러서서 조정의 처사를 주시하고 있던 전봉준은 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사방에서 모여든 8천 명의 봉기군을 거느리고 파죽지세로 도처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초토사 홍계훈(洪啓薰)이 거느린 정부군을 따돌리고 4월 27일 태인을 떠나 전주성 밖 삼천에 도달하였다. 다음날 28일에는 전주성을 무혈 함락하니 호남 천지가 완전히 동학군의 수중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조선 조정에서는 부득이 청국에 원병을 요청했다. 조선 조정의 원병 요청을 받은 청국의 직례총독 이홍장은 누구보다도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앞서 일본과 체결한 천진 조약에 따라 청국이 조선에 출병할 때는 일본에 통지하도록 되어 있었으며 일본도 또한 출병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일본과 충돌하면 그가 가장 아끼는 북양군이 큰 손해를 보게 될 것이다. 이홍장은 일본의 반응이 무척 궁금하였다.
동학군이 백산에 집결한 것이 5월 초였고 전주 함락은 5월 31일이었다. 당시 일본 공사 오토리(大鳥)는 휴가 중이어서 일본에 가 있었고 대리공사 스키무라(杉村)는 청국의 원세개에게 청국이 조선에 출병할 것을 재촉하는 눈치를 보였다.
원세개는 출병에 신중을 기하는 이홍장에게 일본은 거류민의 안전에 관심이 있을 뿐이므로 청국이 출병하면 조선의 질서가 안정될 것이고 일본의 거류민도 안전할 것이므로 출병하는 것이 좋겠다는 내용을 타전(打電)하였다. 가령 일본이 천진 조약에 따라 조선에 출병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거류민의 보호를 위하여 소수 병력만을 파견할 것이라는 의사도 첨가하였다. 출병을 망설이던 이홍장은 현지에 있는 원세개의 보고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원세개의 이 같은 예측은 크게 빗나갔다는 사실이 얼마 후 증명되었다.
일본은 조선 조정이 청국에게 공식적인 원병 요청을 하기 하루 전인 6월 2일 일본 각의에서 조선 출병을 결정하고 임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6월 4일 이홍장은 마침내 조선 출병을 명하였다. 청국의 출병 소식은 일본의 대리공사를 통해 즉시 동경에 타전되었다.
일본 정부의 고민은 인천까지의 거리가 청국에서 가깝고 일본에서는 멀다는 사실이었다. 그리하여 6월 7일 청국의 출병 통고를 받기 이틀 전에, 오토리 공사와 3백 명의 해병 및 1개 대대의 병력이 이미 출발하였다. 일본은 정보전에서 확실히 청국을 앞질렀기 때문에 실제 출병은 일본 쪽이 더 빨랐던 것이다.
청국은 태원총병 섭사성(聶士成)이 거느린 선봉 부대 8백 명이 6월 6일 천진을 출발하여 6월 8일 아산만에 도착하였고, 6월 5일에 출발한 일본의 선발 부대는 6윌 9일 인천에 도착하였다. 먼저 도착한 청군은 후속 부대가 오기를 기다려 그대로 머물러 12일에 이르러서야 아산만에서 합류하였으나 일본의 선발부대는 도착 즉시 비를 무릅쓰고 서울에 진입하였다.
일본군이 서울에 나타나자 조선 조정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정식으로 파병을 요청한 청군보다 앞서 일본군이 서울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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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6월 11일 조선 조정과 동학 봉기군 사이에 이른바 전주 화약(全州和約)이 성립되어 동학 봉기군이 전주성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전주 화약이 성립하기까지 초토사 홍계훈과 동학 봉기군과의 왕복 문서를 보면 당시 동학군 측의 예기가 다소 꺾인 듯하나 전체적으로 보아 동학군 측은 폐정 개혁을 끝까지 요구하여 본래의 봉기 목적에서 조금도 후퇴하지 않고 민주 개혁의 의지를 실현하려 했음이 분명하다.
동학군 측에서 제시하여 초토사 홍계훈이 양해, 수락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전운사(轉運使, 조세와 교통을 관장하는 관리)를 폐지할 것.
2. 국결(國結)을 가(加)하지 말 것.
3. 보부상의 행패를 금할 것.
4. 구감사(舊監司)가 거두어간 환전은 민간에 다시 징수하지 말 것.
5. 대동미를 상납하기 전 각 포구의 미곡 무역을 금할 것.
6. 동포전(洞布錢)은 매호당 춘추에 두 냥씩 정할 것.
7. 탐관 오리는 파면할 것.
8. 위로 임금을 속이고 매관 매직하여 국권을 농간하는 자를 아울러 축출할 것.
9. 관장이 된 자는 그 경내에 입장(入葬)할 수 없으며 또 논을 만들지 말 것.
10. 전세(田稅)는 전례에 따를 것.
11. 연호(煙戶,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 집) 잡역을 감할 것.
12. 포구의 어염세(魚鹽稅)를 파할 것.
13. 보세(洑稅) 및 궁답(宮畓)은 시행하지 말 것.
14. 각 고을 원이 내려와 민인산지(民人山地)에 치표(置標, 묘자리를 미리 잡아 표적을 해둠)하거나 암장하지 말 것.
전주 화약의 성립으로 내란이 종식되고 청일 양국의 출병 명분이 퇴색해지자 난처해진 것은 일본의 오토리 공사였다. 그는 조선 조정의 공식적인 출병 요청을 받은 것이 아니고 다만 천진 조약에 의거 청국 측의 통고만 받고 조선에 출병한 것이기 때문에 조선 조정이 철수를 요청할 경우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토리 공사는 이 같은 사실을 동경에 타전하여 일본 정부의 훈령을 기다렸다. 일본 정부는 다음과 같은 명을 내렸다.
“당초 계획을 변경시킬 수 없다. 상륙 계획을 추진하라.”
당시 일본의 수뇌들은 이미 전쟁을 계획한 것이다. 동경으로부터는 극비 지령이 속속 하달되었다.
“어떠한 수단을 써서라도 개전(開戰)의 구실을 만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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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개전의 구실로서 청국과 일본이 대등한 입장에서 조선의 내정 개혁을 수행할 것을 청국 측에 제의하기로 하였다. 만일 청국이 이 제의를 거부할 경우 일본 단독으로 수행한다는 것을 아울러 제안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청국 정부에 통고하였다.
청국측은 6월 21일 다음과 같은 회답을 보냈다.
“조선의 반란은 이미 진압되었으므로 청국 군대도 필요하지 않다. 내정 개혁 문제는 조선이 스스로 수행해야 할 문제이므로 천진 조약에 따라 상호 철군해야 하며 따로 협상할 필요가 없다.”
6월 21일 일본 정부는 어전회의를 열어 청국과 개전할 것을 공식으로 확인하고 일본 외상 무쓰(陸奧)는 주일 청국 공사에게 절교서를 전달하였다. 이것이 제1차 절교 통지이고 7월 20일에는 북경 주재 일본 대리 공사 고무라(小村壽太郎)가 청국 정부에 정식으로 제2차 절교서를 전달함으로써 청일 양국은 국교 단절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양국이 선전포고를 한 것이 8월 1일이었다.
선전포고를 이틀 앞둔 7월 29일 이홍장은 상주문에서 청일 양국의 해군력을 비교하여 청국이 열세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었다. 그에 의하면 일본 해군이 보유한 군함은 모두 21척으로 이 가운데 광서 15년(1779) 이후에 구입한 것이 9척인 데 비하여 청국은 광서 14년 이후에는 단 한 척의 군함도 구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가 구형이고 시속도 일본 군함에 월등히 뒤지므로 해상에서 교전할 경우 승산이 없다고 전제했다. 따라서 가능하면 정규전을 피하고 발해만 내외를 경계하면서 맹호가 산중에 숨어 있는 것처럼 위장하여 적에게 공포감을 주는 방법밖에 없다고 극히 비관적인 견해를 밝혔다.
청일 양국의 분위기가 험악해지고 전쟁의 분위기가 고조되자 영국의 임시 대리공사가 최후 중재에 나섰다. 그러나 전쟁을 결심한 일본 측은 중재를 의례적인 것으로만 받아들일 뿐 청국 측이 받아들일 수 없는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회답 시한을 7월 24일까지로 못 박았다.
다음은 일본 측이 청국 측에 제시한 조건이다.
1. 서울, 부산간 군용 전선(電線) 가설권을 일본 정부에 위임할 것
2. 조선 조정은 제물포 조약에 따라 조속히 일본 군대를 위한 병영을 건설할 것.
3. 아산에 있는 청국군은 정당한 명분 없이 파견되었으므로 즉시 철퇴할 것.
4. 청한수륙무역장정(淸韓水陸貿易章程) 등을 위시하여 기타 여러 가지 조선의 독립에 저촉되는 청한 간의 모든 조약을 일체 폐기할 것.
일본은 사실 이 4개항의 조건을 조선에게도 통고했다. 그 회답 기한을 조선에는 7월 22일, 청국에는 7월 24일로 못 박은 것은 그들의 작전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조선 측에서 아무런 회답이 없자 일본군은 7월 23일 새벽 조선 궁중에 난입하여 왕궁을 점령하였다. 곧이어 청군이 주둔하는 아산을 공격하기 위하여 진군 속도를 고려한 끝에 48시간의 시차를 둔 것이었다.
7월 23일 일본군은 조선 왕궁 난입과 때를 같이하여 서울 주재 청국총리 공관도 공격하였으나 이를 사전에 알아차린 원세개는 야반 도주하다시피 도망쳐 귀국한 후였고, 공관을 지키던 당소의(唐紹儀)는 재빠르게 영국 총영사관으로 몸을 피했다.
7월 24일 조선 국왕은 그동안 올바른 정치를 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민씨 일파를 몰아내고 대원군에게 정치를 위임한다는 조칙을 내렸다. 그동안 대원군은 천진의 유폐 생활에서 귀국한 후 계속해서 유폐 생활과 다름 없는 실의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가 집권하자 맨 먼저 단행한 일은 정적이었던 민씨 일파에게 보복을 가하는 일이었다. 그는 요직에 있던 민영준(閔永駿) 등에게 각각 유배형을 내렸다. 그런데 오토리 공사가 요구한 공문은 갖가지 구실을 내세워 좀처럼 응할 태세를 보이지 않았다.
오토리가 요구한 공문이란 “조선 정부를 대신하여 아산에 있는 청군을 격퇴해 달라.”는 내용을 뜻하는 것이었다.
일본은 아산에 있는 청군의 공격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대원군에게 그 같은 공문을 내리도록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사전 계획에 의해 일본군은 이미 아산으로 향하고 있는데 대원군으로부터는 공문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아산으로 일본군이 떠난 뒤에야 가까스로 공문을 받은 오토리 공사는 공문을 받은 그 날짜를 진군한 날짜로 바꾸었다는 설이 있다.
일본군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던 이홍장은 할 수 없이 일본과의 일전을 각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작전은 병력을 평양에 집중시키는 것이었다. 이때 일본군은 이미 8천 명의 병력을 서울에 진주시켰다. 이와 대항하기 위해서는 평양에 대병력을 집결시켜 남북으로 대치하는 방법이 최선책이라 판단하였다. 이렇게 하면 청군은 요동으로부터의 보급이 편리하므로 장기전에 돌입할 경우 보급선이 긴 일본보다 유리하다고 생각하였다.
서울과 가까운 아산에 섭지초가 거느리는 2천 명의 청군이 있었다. 이홍장은 이 군대마저 해로를 통하여 평양으로 이동시킬 것을 고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섭지초는 이홍장의 계획과는 달랐다. 그는 평양에 대군을 집결시키고 아산에도 증원군을 집결시켜 남북에서 일본군을 협공하는 것이 상책이라 판단하여 이홍장의 평양 집결을 거부하였다.
결국 작전계획이 변경되어 아산에 1천300명의 증원군이 무사히 상륙하였다. 뒤이어 약 1천 명의 증원군이 아산에 집결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 증원군을 호위하기 위하여 순양함 제원(濟遠)과 광을(廣乙) 두 척의 함정이 아산을 향해 항진했다. 일본 함정의 제일 유격대 소속 3척의 함정은 7월 24일 풍도 앞바다를 정찰하던 중 두 척의 청국 군함을 발견하였으나 포격은 가하지 않았다. 7월 24일은 일본이 청국에 대하여 제시한 최후 통첩의 회답 만기일이었기 때문에 일본 군함은 7월 25일 이전의 공격은 유보했던 것이다.
청국 군함도 일본 군함을 발견하였으나 일본 군함이 공격을 가할 움직임이 없었기 때문에 약간 긴장했을 뿐 전투 배치도 않은 채 항진을 계속하였다. 그런데 다음날인 25일 일본 군함이 갑자기 포문을 열고 공격을 개시하였다. 제원호는 백기를 내걸고 포격을 가하면서 도망쳐 여순으로 돌아왔으며 광을호는 화약고가 폭발하는 피해를 입었다.
그곳에 바로 약 1천 명의 증원군을 태운 고승호(高陞號)가 목조 포함의 호위를 받으면서 나타났다. 고승호는 외관상 영국 함정으로 보였기 때문에 일본 해군은 정선을 명하고 수색한 결과 청국군이 탑승하였음을 확인하고 고승호를 격침시켰다. 그리고 영국 승무원만을 구조하고 청국군은 바닷속에 방치하여 전원 익사 지경에 이르렀다가 다행히 다음날 그곳을 지나던 프랑스 함정에 의해 겨우 2백여 명이 구조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풍도 앞바다의 해전으로 일본군이 대승을 거둔 해전이었다. 1천 명의 증원군을 태운 고승호의 격침 소식은 아산에 있는 청군의 사기를 크게 저하시켰다. 병력 보충 문제보다도 심리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셈이었다.
아산에 있던 섭지초는 3천5백 명의 병력을 두 갈래로 나누어 그중 2천 명을 아산 동북방 20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성환에 배치하고 나머지 1천5백 명은 공주에 배치하였다. 성환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인 다음 그 병력을 공주에 집결시켜 우회해서 평양에 갈 작정이었다. 풍도에서의 패전으로 해로가 차단되어 육로를 택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런 작전을 구상하게 되었다. 성환에서의 전투 또한 일본군의 대승으로 끝났다.
성환에서 대패한 청군은 평양에 있는 우군과 합류하기 위하여 산과 들을 넘어 비참한 북행을 계속한 끝에 어렵게 합류하였다. 평양으로 집결한 청군의 수뇌들은 서로 의견이 엇갈려 불화가 계속되었다. 이 같은 보고를 받은 이홍장은 평양에 있는 장수들을 지휘 통솔할 책임자로 섭지초를 임명하였다. 그러나 섭지초는 성환에서의 패전을 승전으로 허위 보고한 사실이 있었기 때문에 장수들은 섭지초를 통솔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허위 보고를 그대로 믿은 이홍장의 큰 실수였다.
평양에 집결한 청군의 장수들이 서로 옥신각신하고 있을 즈음 일본군이 평양을 공격하기 위해 북상하고 있었다. 평양에서의 전투는 9월 5일부터 16일까지 벌어졌다. 청군의 병력은 1만 2천 명, 일본군은 노쓰(野津) 중장이 거느리는 제5사단의 병력 1만 7천 명이었다. 일본군이 공격을 퍼붓는데도 청국 진영에서는 여전히 의견이 엇갈려 통일된 작전을 펴지 못하였다. 섭지초는 패배 의식이 앞서 싸우지 말고 퇴각하자는 주장이었고 좌보귀(左寶貴)는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대동강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일본군이 압승을 거두었으나 일본군은 보급이 원활하지 못하여 총탄이 바닥이 나 있었다. 노쓰 중장은 할 수 없이 포위를 풀고 철수할 수밖에 없는 긴박한 상황에 도달해 있었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평양성 머리에 백기가 나부끼기 시작하였다. 패배주의적 지휘자 섭지초의 명에 따라 청군은 백기를 내건 후 앞을 다투어 도망치기에 바빴다. 대동강에서의 치열한 공방전에서 청군의 전사자는 장수 좌보귀를 포함하여 2천 명을 넘었고, 일본군의 전사자는 180여 명에 불과하였다. 일본군의 압승이었다.
노쓰 중장 휘하의 제5사단 병력이 한창 평양을 공격할 무렵의 어느 날 밤 청국의 북양 함대 소속 함정들이 엄청난 숫자의 육군을 싣고 여순항을 출발하여 압록강 하구의 대동구(大東溝)로 향했다. 평양에서의 패전 소식이 아직 전해지기 이전이었으므로 이 군대는 평양을 구하기 위한 증원군이었다. 증원군의 총사령관은 유성휴(劉盛休)로 이 부대는 북양군 가운데서 가장 용맹을 떨치던 부대였다. 북양 함대가 증원군을 대동구에 무사히 상륙시킨 것이 9월 17일 새벽이었다. 북양 함대 제독 정여창(丁汝昌)은 이날 정오를 기하여 출발할 것을 명하였다. 각 함정이 출발 준비에 분주하고 있을 때 일본의 연합 함대가 나타났다.
이렇게 해서 청일 양국의 주력 함대 사이에 해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일본 함대가 이곳에 나타난 것은 일본의 수색 작전에 의해 청국 함대가 포착됐기 때문이다. 전력으로 볼 때 앞서 이홍장의 분석대로 청국이 열세에 놓였다.
양국 사이의 해전은 5시간에 걸쳐 계속되었다. 청국의 북양 함대는 초용(超勇)·치원(致遠)·경원(經遠)의 세 함정을 잃었다. 일본 함대가 집요하게 공격한 것은 진원과 정원의 두 거함이었으나 이 두 철함(鐵艦)은 2백여 발의 포탄을 맞았는데도 과연 거함답게 침몰하지는 않았다. 이 싸움에서 북양 함대가 불운했던 것은 전투 개시 직후에 기함 정원호의 신호 돛대가 포탄에 맞아 부러진 일이었다. 당시에 해전은 기함의 지시 신호에 따라 작전이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신호 돛대의 기능 상실은 북양 함대의 눈과 귀를 잃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일본의 기함 마쓰시마(松島)도 정원호의 포탄에 맞아 1백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마쓰시마에 탑승하고 있었던 한 수병이 부함장에게,
“정원호는 아직 침몰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물으며 죽어갔다고 하니 정원호의 위력이 대단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정오에 시작된 해전은 오후 5시쯤 일본 함대가 방향을 바꾸어 철수함으로써 끝났다. 북양 함대의 탄약고도 바닥이 났지만 일본 함대도 포탄을 다 쏟아놓는 치열한 일전이었다. 만신창이가 된 북양 함대도 대련만으로 돌아왔다.
제물포 앞바다에 집결한 일본 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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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따른 패전으로 청국 조정에서는 이홍장을 비난하는 소리가 높아졌고 청나라 조정은 75세의 노장 송경(宋慶)을 기용하였다. 송경은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역전의 노장이었다. 그는 여순에 주둔해 있는 의군(毅軍)을 거느리고 요동에서 전선으로 직행하여 전군을 통할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송경이 의군을 거느리고 출발한 후에 11월 일본의 제2군이 요동에 상륙하여 여순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북양 함대는 이미 산동 반도의 위해위(威海衛)로 이동한 후였다. 여순을 점령한 일본군은 일반 백성과 부녀자에 대하여 학살의 만행을 저질렀다. 제2군이 여순을 함락한 것은 11월 21일이었고 제1군은 압록강을 건너 10월 29일에 봉황성에 입성함으로써 전쟁의 무대는 바야흐로 조선에서 청국 영내로 옮겨지게 되었다. 청국 영내에 들어선 일본군은 게릴라화한 청국 병사와 이에 협력하는 농민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히게 되었다.
이에 이르러 일본도 능력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하여 전선의 확대를 희망하지 않는 쪽으로 기울기 시작하였다. 일부에서는 북경 진격론이 대두되기도 하였으나 당시 일본의 국력으로는 과중한 부담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였다. 일본은 시기 상조라 생각하면서 차츰 사태를 종결시킬 기회를 모색했고 이 같은 생각은 청국도 마찬가지였다.
청국 조정은 공친왕 혁흔을 다시 총서대신(總署大臣)으로 기용하였다. 이것은 당시 청국의 실권자 서태후의 의사가 강화 쪽으로 기울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의 임무는 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하여 각국 공사에게 조정을 의뢰하는 것이었다. 11월 6일 미 국무장관 그레샴이 청·일 양국에 조정할 의사가 있음을 표시하자 일본이 열강의 움직임을 검토한 뒤 이를 수락하기로 함으로써 각국 공사에 의한 조정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열강의 움직임을 주시한 끝에 강화의 분위기가 무르익어가고 있음을 확인한 일본 수상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강화에 보다 유리한 작전을 구상하였다.
함풍제의 동생으로 함풍제 즉위 후 공친왕으로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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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양 함대의 주력함인 정원·진원호가 아직도 위해위에 남아 있는 이상 북양 함대를 완전히 섬멸시켰다고 할 수는 없다. 북양 함대를 완전히 섬멸시켜 청나라를 더욱 궁지에 몰아넣는다면 강화를 더욱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다.”
이것이 이토를 비롯한 일본군 수뇌들의 속셈이었다. 그러나 송경이 이끄는 청국군은 해역으로 진출한 일본군을 맹렬히 공격하였고 봉황성 방면에서도 청국군의 역습으로 일본군이 자주 패하여 위기에 몰렸다. 일본은 1895년 2월, 제1사단의 주력을 투입한 끝에 어렵게 승리하였다. 이보다 조금 앞선 1월 23일 일본의 연합 함대 사령관 이토(伊東祐亨) 중장은 영국 군함을 통하여 위해위의 북양 함대 사령관 정여창에게 항복 권고문을 보냈다. 이것은 일종의 도전장이었다. 1월 30일 일본 함대는 마침내 위해위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남방 포대에 포격을 가하여 함락하자 그 다음날에는 북포대를 수비하던 청군이 도주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청군의 북포대에는 다량의 탄약이 저장되어 있어 그대로 두면 고스란히 일본군의 전리품이 될 판이었다. 청군은 부득이 아군의 포대에 포격을 가하여 탄약을 폭파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은 야습에 능하였다. 일본군은 수뢰정(水雷艇)으로 야습을 감행하여 북양 함대의 주력함인 정원호를 공격하였다. 수뢰정의 공격을 받은 정원호는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채 거대한 모습만 떠 있을 뿐이었다. 청군의 수뇌들은 이를 폭파하기 위하여 250파운드의 폭약을 장치한 다음 침몰시켰다. 다음날에는 또 내원·위원의 두 함정이 격침되니 북양 함대의 기능은 마비될 위기에 이르렀다. 북양 함대 사령관 정여창은 기함 진원호에서 독전하다가 정원호를 잃은 후 유공도(劉公島)에 상륙하였다. 영국인 고문이 정여창을 설득하였다.
“승패는 이미 결정이 났습니다. 더 항전해 봤댔자 귀중한 인명을 살상시킬 뿐이니 항복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정여창은 고개를 가로저은 다음 자신의 관인을 영국인 고문에게 넘겨주면서 말하였다.
“내가 죽은 다음 항복 문서에 이 관인을 찍어 이토에게 넘겨 주시오.”
북양 함대의 자랑이었던 진원호는 일본 해군에 항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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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창이 음독자살한 것은 시모노세키(下關)에 갔던 청국 사절이 귀국한 날과 같은 2월 12일이었고 총병 장문선(張文宣)·부장 양용림(楊用霖)도 동시에 자결하였다. 부사령관 유보섬(劉步蟾)은 그 전에 이미 자결하였다. 정여창이 죽은 후 백기를 내건 진원호로부터 이토 중장에게 항복 문서가 전달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본 제독의 결심은 최후까지 결전을 벌여 함정이 침몰하고 인명이 다한 후에야 그칠 작정이었으나 이제 장병들의 생명을 보전하기 위하여 부득이 휴전을 원하는 바이오. 위해위에 있는 현재의 함대와 유공도 및 포대의 무기를 귀국에 바치는 조건으로서 육해군·내외국인의 관원·병사·인민 등의 생명을 상해하는 일 없이 각자 귀향을 허락할 것을 간절히 바라는 바이오. 만약 이 조건을 수락한다면 영국 함대 사령관을 증인으로 삼을 것이오. 살피어 즉일 회답이 있기를 바라는 바이오.”
이토 중장은 물론 정여창이 자결했다는 사실을 알 턱이 없었다. 그는 즉시 일본 문자의 원문에 영역을 첨가하여 회답을 보냈다. 그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영국 함대 사령관을 증인으로 한다는 귀하의 태도에 대하여 소관은 전혀 그것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오. 소관이 믿는 바는 오직 귀하의 무인으로서의 명예 한 가지 뿐이오.”
이렇게 해서 위해위는 함락되고 북양 함대는 일본군에 인도되었다. 일본 해군이 집요하게 노렸던 진원호가 일본 해군의 전리품이 되었다는 소식은 일본 국민을 열광시키고도 남았다. 진원·정원의 두 거함은 일본이 오랫동안 두려워하고 경계했던 존재였다. 이 사이 청국측 전권대표 장음환(張蔭桓)과 소우렴(邵友濂)은 히로시마 회담을 추진하기 위하여 일본에 갔으나 일본 측이 전권 위임장이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교섭을 거절하는 바람에 1월 31일 귀국하였다.
청국 전권대표의 추방과 위해위의 전투는 일본에 대한 열강의 경계심을 극도로 고조시켰다. 열강은 강화 조건을 둘러싸고 일본에 간섭할 움직임을 보였다. 러시아는 부동항(不凍港)을 얻기 위해 영국·프랑스와 협력하여 여순항과 대련항의 할양을 저지하려 하였고, 독일은 영국·러시아 사이의 접근을 견제하고 동아시아에 진출하려는 러시아·프랑스의 세력과 대항하기 위하여 영국과 협력하려 하였다.
위해위에서 북양 함대가 궤멸한 다음날인 2월 13일 청국 조정은 이홍장을 전권대신으로 일본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홍장은 광서제·서태후와 장시간 논의한 끝에 일본 측이 강화 조건으로 조선의 독립과 전비의 배상 문제 외에 영토 할양을 요구할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청국 사절 일행은 3월 20일 시모노세키에 도착하여 춘범루(春帆樓)에서 양국 전권대표 교섭에 들어갔다. 청국측은 이홍장·이경방(李經方)·오정방(伍廷芳)이 참석하였고 일본 측에서는 이토 히로부미와 무쓰 외상(陸奧外相)이 참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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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장은 회의 벽두에서 즉시 휴전할 것을 제의하였으나 이토 히로부미가 가혹한 조건을 제시했기 때문에 이홍장은 휴전 제의를 철회하였다. 이날 청국 대표가 숙소로 돌아가던 중 이홍장이 불의의 총격을 받았다. 이홍장 일행이 춘범루에서 나와 숙소인 인접사(引接寺)로 향하고 있을 때였다. 이홍장은 가마에 타고 다른 수행원은 인력거를 타고 돌아오는데 갑자기 한 괴한이 나타나 이홍장이 탄 가마에 권총을 발사하였다.
이홍장이 탄 가마는 중국에서 가져간 것으로 4인이 어깨에 메고 사방에 유리창이 달려 있었다. 이홍장은 이때 유리창을 열어 놓고 있었다. 괴한이 쏜 총탄은 이홍장의 왼쪽 눈언저리에 박혔다. 뒤에 밝혀진 일이지만 총탄은 일단 이홍장이 쓴 금테 안경에 명중하여 렌즈가 부서졌는데도 다행히 이홍장이 눈을 감고 있었기 때문에 안구는 무사하였다. 괴한은 현장에서 체포되고 이홍장은 인접사로 실려가 응급 치료를 받았다. 이 소식을 들은 이토 히로부미 등 일본 대표 일행이 급히 인접사로 달려가 문병하자 이홍장은 말했다.
“이 같은 일은 나도 진작부터 각오하고 있었던 바요.”
권총을 발사한 범인을 심문한 일본 경찰은 그가 신도관(神刀館)이라는 우익 단체 소속의 일원으로 지금 강화를 맺으면 청국에게 재기의 기회를 주어 또 다시 일본과 전쟁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강화를 방해하기 위함이었다고 경위를 밝혔다.
일본 측은 교섭이 결렬될 경우 열강의 간섭이 노골화될 것을 염려하여 휴전 조약을 성립시키고 이어 4월 1일 정식으로 조약안을 제시하였다. 다음은 일본 측이 제시한 조약안의 골자이다.
1. 조선국이 완전 무결한 독립국임을 확인할 것.
2. 다음 토지를 일본에 할양할 것.
(갑) 봉천성 이남의 땅.
(을) 대만과 그 부속 도서 및 팽호 열도(澎湖列島).
3. 전비 배상금으로 은 3억 냥을 5년 할부로 지불할 것.
4. 열강의 통상 조약과 같은 청일 통상조약을 개정하여 일본에 특권적인 최혜국 대우를 할 것.
5. 사시(沙市)·중경·소주·오주·항주를 개항할 것.
6. 의창(宜昌) - 중경간, 상해 - 소주 - 항주의 기선 항로를 승인 할 것.
7. 개항장에서의 각종 제조업에 종사할 권리, 내국 운수세, 내륙 부과세 등에 특전을 인정할 것.
8. 위해위에서의 일본군 점령을 인정할 것.
북경 조정에서는 특히 일본 측 제시안의 영토 할양 문제를 둘러싸고 격론이 벌어져 할양을 거부하는 수정안을 제출하였다. 청국 측의 수정안에 대하여 일본 측은 ① 요동 반도의 할양 지역을 축소하고 ② 전비 배상금을 3억에서 2억으로 감액하고 ③ 중재 재판 조항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등 절충안을 제출하였다. 이렇게 수정 단계를 거쳐 마침내 4월 17일 춘범루에서 전문 11조로 된 청일 강화 조약(시모노세키 조약)이 조인되었다. 조약의 골자는 다음과 같았다.
1. 조선국이 완전한 독립국임을 승인한다.(이 조항에 대하여 이홍장은 청일 양국은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조문을 추가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일본 대표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거부되었다.)
2. 요동 반도·대만·팽호 열도를 할양한다.
3. 전비 배상금으로 2억 냥(일화 3억엔)을 7년 분할로 지불한다.
4. 청국·유럽 제국간 조약을 기초로 청일 통상 항해 조약 및 육로 무역에 관한 협정을 체결한다.
5. 사시(沙市)·중경·소주·항주를 개시·개항한다.
6. 의창 - 중경간, 상해 - 소주 - 항주간의 기선 항로를 승인한다.
7. 개항장에서 각종 제조업 종사권을 승인하고 내국세에 대해 특전을 부여한다.
8. 본 조약 비준 후 3개월 이내에 일본군은 철퇴하며 조약을 성실히 이행하는 담보로 위해위를 점령한다.
이 조약은 일본에게는 승리의 열매를 안겨주는 것이었지만, 청국에게는 굴욕임에 틀림없었다. 이홍장은 조인식을 마친 후 귀국을 서둘러 즉시 귀국선에 올랐다. 이홍장 일행이 천진에 도착한 것은 4월 20일이었고 비준서의 교환은 5월 7일 산동 반도의 지부(芝罘)에서 하기로 되어 있었다. 강화 조약의 내용이 청국 조야에 알려지자 각지에서 비준 거부 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났음은 당연하다.
조인식이 끝난 6일 후인 4월 23일 러시아·독일·프랑스의 3국은 일본의 요동 반도 영유를 정식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동경에 주재하는 3국 공사는 일본 외무성을 방문하고 본국 정부의 훈령을 전달한다는 형식으로 간섭에 나섰다. 3국 정부의 훈령은 대동 소이하지만 3국 간섭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러시아의 훈령은 다음과 같았다.
“러시아 황제 폐하의 정부는 일본국이 청국에 대하여 요구한 강화 조건을 살핀바 요동 반도를 일본이 영유하는 것은 청국의 수도 북경을 위협할 염려가 있을 뿐 아니라 동시에 조선국의 독립을 유명무실하게 하여 장래 극동의 영구적 평화에 장애가 되는 것으로 사료됩니다. 따라서 러시아 정부는 일본 정부와 그 성실한 우의를 다지기 위하여 요동 반도의 영유를 확실히 포기할 것을 권고하는 바입니다.”
일본에서는 즉시 어전회의가 열렸다. 3국 간섭에 대한 대책으로써 이토 히로부미는 다음 세 가지 안을 내놓았다.
1. 새로운 적국이 등장하여 불행한 사태에 직면하는 한이 있더라도 단연 3국의 권고를 거부한다.
2. 열국 회의를 소집하여 요동 반도의 문제를 그 회의에서 처리한다.
3. 3국의 권고를 그대로 받아들여 요동 반도를 청국에 반환한다.
이토 히로부미는 제1안은 현재의 일본 군사력으로는 사실상 실행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으며 그렇다고 제3안은 너무나 한심스러운 것이므로 제2안을 택함이 좋을 듯하다는 의견을 첨가하였다. 이때 무쓰 외상은 병으로 요양 중이어서 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고 어전회의의 의견은 제2안을 택하자는 쪽으로 기울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무쓰의 병상을 방문하여 그의 의견을 들어 최종 단안을 내릴 작정이었다. 그러나 무쓰 외상은 제2안에 반대하였다. 무쓰 외상은 반대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열국 회의를 개최한다면 그 회의는 반드시 3국 이상의 나라로 구성될 것이므로 요동 반도 이외의 문제가 거론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리 된다면 시모노세키 조약의 전체를 부정할 염려도 있다. 바꾸어 말하면 3국 이상의 새로운 대국의 간섭을 불러들이는 것이 되며 회의에는 시간이 많이 소요될 것이므로 그 사이에 어떤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할지 예상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청국이 비준을 거부하여 시모노세키 조약을 전면 백지화할 염려도 있다.”
사실 일본은 3국 간섭을 거부할 능력이 없었다. 특히 러시아는 무력까지 동원할 움직임마저 보였기 때문에 단순한 위협이 아니었다. 러시아와의 싸움에서 이길 승산이 없는 경우 굴복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일본의 실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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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쓰 외상은 각국 공사를 통하여 최후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사태릍 호전시키지는 못하였다. 결국 4월 29일의 어전회의에서 3국의 권고를 받아들여 요동 반도를 청국에 반환하기로 결정하였다. 청일 간의 강화 조약은 예정대로 5월 7일 산동 반도의 지부에서 비준서가 교환됨으로써 청일 전쟁은 어렵게 종지부를 찍었다. 청국은 3국 간섭 덕분에 요동 반도를 잃지 않았으나 이것은 자력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고 타력에 의해 얻은 것이므로 언젠가 또다시 빼앗긴다는 사실이 얼마 후 증명되었다.
증국번의 뒤를 이어 청말의 정계에 군림했던 직례총독·북양대신 이홍장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정계에서 물러나 얼마 동안 불행한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홍장과 함께 서태후 일파는 중앙의 권력에서 물러나고 장지동(張之洞) 일파가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광서제의 친정 체제가 성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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