폼페이의 역사

2024. 5. 18. 12:08역사와문화산책

2018-12-28 21:55:3

폼페이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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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헤르쿨라네움·스타비아이에는 캄파니아의 신석기시대 주민 후손들인 오스칸족이 처음으로 정착했다고 추측된다. 전략적으로 사르누스 강 어귀 근처에 있는 오스칸족 마을들은 이미 BC 8세기에 나폴리 만 건너편에 정착해 있던 그리스인의 세력하에 들어갔다는 고고학적인 증거가 있다. 그러나 그리스인의 영향력은 BC 7세기에 캄파니아로 들어온 에트루리아인들에 의해 도전을 받았다.

BC 474년 쿠마이 앞바다의 해전에서 시라쿠사의 참주 히에론 1세가 에트루리아의 해군을 전멸시킨 후 에트루리아의 영향력은 약해졌으며, 그리스가 또다시 주도권을 잡았다. 그후 BC 5세기말이 되면서 이탈리아의 호전적인 종족인 삼니움족이 캄파니아를 정복하고 폼페이·헤르쿨라네움·스타비아이를 차지했다. 당시의 화폐는 1세기 후에 폼페이·헤르쿨라네움·스타비아이가 속했던 동맹을 누케리아 시가 주도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폼페이가 역사기록상에 처음 언급된 것은 BC 310년 제2차 삼니움 전쟁 때 로마의 함대가 사르누스 항에 상륙하여 누케리아를 공격하려다 실패한 일이었다. 삼니움 전쟁이 끝날 무렵 캄파니아는 로마 동맹의 일부가 되었고, 그곳의 도시들은 로마의 동맹시가 되었다. 그러나 이 도시들이 완전히 종속되어 로마화된 것은 동맹시전쟁을 치른 후이다.

폼페이는 이 전쟁에서 다른 이탈리아 도시들과 힘을 합쳐 로마에 대항했으나 BC 89년에 로마의 장군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에 의해 포위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 이탈리아의 포 강 남쪽인 나머지 지역과 함께 로마 시민권을 받았다. 전쟁에 가담한 데 대한 처벌로 로마 제대군인들의 이주지가 설립되고 폼페이를 포위했던 로마 장군의 조카인 푸블리우스 술라가 통치하게 되었다. 초기의 난관을 거친 후 폼페이인들과 이주민들은 서로간의 마찰을 최소화하는 수준에서 적응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부터 오스칸어를 대신하여 라틴어가 공식 언어가 되었고, 폼페이 시는 곧 제도·건축·문화면에서 로마화되었다.

59년에 폼페이의 원형투기장에서 폼페이인과 누케리아인 간에 발생했던 폭동은 로마의 역사가인 타키투스에 의해 보고되고 있다. 62년의 지진은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 양 도시에 큰 피해를 입혔으며, 두 도시들은 17년 후에 일어난 마지막 지진으로 매몰되기 전까지 그 후유증으로부터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다.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한 것은 79년 8월 24일이다. 이 참사의 목격담은 대(大)플리니우스의 조카 소(小)플리니우스가 미네눔의 로마 함대 사령관이었던 대플리니우스의 죽음에 대해서 묻고 있는, 타키투스에게 쓴 2통의 서신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대플리니우스는 스타비아이에서 친구들을 구조하려고 애쓰다가 죽었다. 이튿날 화산폭발이 멈추었을 때 폼페이는 깊이 6~7m의 화산력과 화산재로 덮였다. 베수비오 화산에서 보다 멀리 떨어진 곳에 있던 스타비아이의 별장들은 그다지 많이 파묻히지 않았다. 헤르쿨라네움에서는 격류와 함께 떠밀려온 화산물질 더미가 20m 두께로 도시 곳곳을 뒤덮으면서 일종의 진흙용암으로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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