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chel`s

2024. 10. 12. 13:58팝아티스트

 
 
1990년대 초반 수면 위의 부표로 떠올랐던 음악 사조인 포스트 록(post-rock)은 말 그대로 '록 이후의 록'을 뜻하는 용어이다. 소장 록 평론가 사이먼 레이놀즈에 의해 확립된 이 잣대는 무엇보다 과거 클래식 록의 관습적 사운드와 메커니즘을 거스른다는 데서 항시 새로운 영토를 찾아 헤매는 하드코어 인디 마니아들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My Bloody Valentine), 시규어 로스(Sigur Ros), 모과이(Mogwai), 스테레오랩(Stereolab) 등이 그 대표적 밴드들이다.

음악적으로 일련의 포스트 록 그룹들은 불끈불끈 힘이 느껴지는 남근적 록과 대립각을 형성한다. 그들은 남근의 상징인 리프를 배제하고 대신 질의 은유인 노이즈로 그들만의 음악 캔버스를 채색, 록에 있어서의 '여성성'을 강조한다. “리프는 록 음악과는 전혀 다른 텍스처와 동학(動學) 속(노이즈를 의미)에서 소멸된다”라는 사이먼 레이놀즈의 언급이 이를 잘 말해준다. 자연스레 보컬, 기타, 베이스, 드럼이라는, 록 음악의 기본 편성표는 종종 무시되며 아예 세가지 악기를 전혀 쓰지 않는 케이스도 자주 찾아볼 수 있다.

레이첼스(Rachel's)는 바로 후자에 속하는 포스트 록 공동체이다. 레이첼 그라임스(Rachel Grimes, 피아노), 제이슨 노블(Jason Noble, 베이스), 크리스천 프레데릭스(Christian Frederickson, 바이올린)의 3인조로 구성된 그들은 현악기와 건반악기를 통해 펼쳐내는 실내악에 록적인 뉘앙스를 결합시켜 그간 대중음악계의 별스러운 존재로 주목 받아왔다. 그들의 최고 명반으로 평가 받는 <Selenography>(1999)의 독특한 소리샘이 그에 대한 좋은 증거물이다.

본작 <Music For Egon Schiele>(2003)는 제목이 말해주듯, 19세기의 천재 화가 에곤 실레를 위해 제작된 음반으로써 그룹의 디스코그라피 중 가장 이색적인 음악 무드를 들려준다. 본작을 제외한 레이첼스의 앨범들에서 음악적 중핵(中核)을 이루었던 노이즈가 전혀 들리질 않아 듣는 이들에게 당혹감을 자아내는 까닭이다. '이거 록 음반 맞아?'라고 반문할 팬들이 부지기수일 것으로 추측된다.

이유는 두 가지 정도로 분석된다. 하나는 본작이 에곤 실레의 그림을 보고 영감을 받아 완성한 것이 아닌 '그의 인생을 다룬 발레의 배경 음악'을 위해 작곡되었다는 점이다. 발레 공연에 소음이 난무한다니, 1990년대 이후 가장 파격적인 그룹 중 하나로 이름이 높은 그들이라도 미스매치를 이룰 거라 예상했던 모양이다.

둘째는 음반이 본디 밴드의 리더 레이첼 그라임스의 개인적 프로젝트에서 출발했다는 점이다.(제이슨 노블은 녹음에 참여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레이첼'만'의 음악적 취향이 대폭 반영될 소지가 높았던 바, 앨범이 그룹 음 세계의 일반적 포맷과는 완연히 다른 방향성을 취하게 된 것은 너무도 자연스런 귀결이었다. 사실 레이첼의 솔로작이라 말해도 별 무리가 없을 앨범이다.

앞서 설명했듯, 작품은 노이즈가 완전히 배제된 실내악의 전형을 들려준다. 그렇다고 복잡한 구성과 화려한 문양으로 치장된 종류의 것은 아니다. 그들은 미니멀리즘(minimalism)에 입각한 간결한 편곡으로 곡을 인테리어, 담백한 귓맛을 내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따라서 곡들마다 '의도된 여백'이 자주 등장, 듣는 이들을 텍스트 속으로 부드럽게 유도한다. 롤랑 바르트가 주창했던 텍스트 이론의 음악적 버전이라 봐도 괜찮은 셈이다. 산울림의 김창완은 이를 두고 “작곡을 끝낸 순간 작품과 나는 완전히 결별하게 된다.”라며 주장한 바 있다.

자연스레 청자들은 제2의 음악적 창조자가 되어 아티스트와 동등한 지위를 누릴 권리를 갖게 되며 고로 개개인마다 다른 방식으로 듣게 될 확률이 지극히 높다. 록만의 전유물인 감정의 과잉화 현상(헤드 뱅잉, 슬램, 기타 주법 흉내내기 등을 생각해보라.)도 철저히 배격되어 일종의 소외/소격 효과가 음반 전체를 포근히 감싸준다. 표현하자면 '음~좋은데?' 정도가 될까.

레이첼이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굳이 싱글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Family portrait', 'First self-portrait series', 'Mine van osen', 'Second family portrait' 등이 앨범의 돋을새김들로써 반복 청취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허나 처음부터 끝까지 쭉 듣는 것이 제대로 된 감상법임은 부인하기 힘들다.

발표된 지 무려 7년이 지나서야 라이선스된 본 음반은 빵빵하고 새로운 포장과 함께 재탄생, 현재 마니아들의 입 소문을 타는 중이다. 내부에 들어있는 에곤 실레의 그림 엽서들도 골수 팬들의 구미를 당기기에 충분하다. 인디 록 레코드임에도 불구, 꽤 적극적인 마케팅을 펼치고 있는 국내 음반사의 노력 앞에 만족스러운 열매가 놓여지기를. 그럴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그야말로 수작 앨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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