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ton Trio

2024. 9. 27. 08:19팝아티스트

 
 
팝 음악의 역사에서 보면 Blind Lemon Jefferson, Benny Goodman와
그의 오케스트라, the Beatles, Bob Dylan, Led Zeppelin 처럼 음악의
콘테츠를 다시 정립한 몇 몇 아티스트들이 있다.
킹스톤 트리오도 그러한 그룹 중 하나였고 그들은 포크 뮤직이
대중적인 상품가치를 가지는데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 유례없이
그들은 어쿠스틱 기타와 밴조(banjos)를 연주하면서 신선하고
조화로운 하모니로 포크 송들을 불렀다.

완전히 상업적 수준에서 본다면 57년 부터 63년까지 킹스톤 트리오는
세계어서 가장 활기 넘치고 대중적인 포크 그룹이었다. 캐피탈
레코드사와 미국 음반 산업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인기있었던 음반 중
하나로 평가받는 그들의 음반은 심지어 'Weavers'의 초기 성공을
능가한다. 세명의 트리오 Dave Guard, Nick Reynolds 그리고
Bob Shane은 전에는 포크 음악을 무시했던 풍조에서 그 음악을
대단히 대중적인 음악으로 우뚝 서게 했다.

Kingston Trio는 캘리포니아에서 스탠포드 대학 대학원생
Dave Guard와 멘로 칼리지 대학생 Bob Shane 그리고 Nick Reynolds
에 의해 결성되었다. Guard와 Shane은 둘 다 하와이에서 태어났고
그들은 호놀로루 고등학교에서 친하게 지냈다. 레이놀즈와 쉐인은
지루한 회계학 시간 때문에 친구가 되었다. 그들은 술마시고 여자를
쫓아다니다가 파티에서 음악을 연주하게 되는데 쉐인의 기타와
레이놀즈의 봉고스는 로컬 파티의 전형물이 되었고 이로부터 몇 주 후
쉐인은 레이놀즈를 데이브 가드에게 소개시켜 주게 된다.

화와이 음악은 로컬 지역에서는 잘 맞았기 때문에 쉐인과 가드는
레이놀즈에게 화와이 민속음악을 가르켜 주기도 한다.
그들은 1주마다 2번씩 로컬 터번에서 연주하지만 킹스톤 트리오의
결성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쉐인은 하와이로 돌아와서 그의
아버지의 스포츠용품 회사에 한동안 근무하고 가드와 레이놀즈는
베이스의 Joe Gannon과 싱어 Barbara Bogue와 함께 공연하다가
결국 Dave Guard와 The Calypsonians을 결성한다.

한편 레이놀즈가 졸업때문에 한동안 떠나 있는 자리를 Don McArthur
가 대신한다. The Calypsonians의 연주를 본 로컬 퍼빌리스트가
그들을 도와주겠다고 운명의 손길을 뻗친 후 결국 몇 명이 탈퇴를
하고 레이놀즈와 쉐인이 되돌아 와서 킹스톤 트리오가 결성된
로컬 클럽에서 공연 중 그들은 캐피탈 레코드사의 프로듀서
Voyle Gilmore에게 데모음반을 들려줄 기회를 얻게 되고 7년간의
계약을 체결하게 된다.

미국 도시 투어 공연 중 킹스톤 트리오는 그들의 셀프 타이틀 데뷔
앨범을 레코딩하는데 그 음반에는 "Scotch and Soda",
"Hard, Ain't It Hard" 그리고 "Tom Dooley"를 비롯해서 킹스톤
트리오의 대표적 곡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 중 "Tom Dooley"는
빌보드 탑 텐에 올랐고 약3백만장 이상이나 팔려나갔다.
그곡은 또한 "Heartbreak Hotel"나 "I Want to Hold Your Hand" 처럼
새로운 음악의 장을 연곡으로 평가 받는다. "Tom Dooley"는 꽤
성공적이어서 영화 The Legend of Tom Dooley의 타이틀 곡이 되었다.

킹스톤 트리오의 세번째 앨범은 스테레오로 녹음된 첫번째 앨범이자
그들의 사운드의 변화를 시도한 첫번째 앨범이기도 하다. 그 앨범에는
다양한 보이스와, 기타 그리고 밴조 소리가 잘 어울려져 있다.
그 때쯤 킹스톤 트리오는 그들의 음악스타일을 포크 송 뿐 아니라
R&B에 까지로 넓힌다.

킹스톤 트리오는 59년 8월 3일에 Life magazine의 커버를 장식했고
Billboard와 Cashbox Magazines은 그들은 59년 최고의 베스트
그룹으로 선정하였다.

그러나 진지한 포크 팬들은 킹스톤 트리오가 정통 포크를 너무 대중화
시켰다고 그들을 별 반기지 않았다. 그들이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을 지라도 그들은 결코 50년대 후반의 포크
팬들에게는 환영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거의 모든 음악 장르의 팬에게 인기가 많았고 특히
대학생들은 그들의 리렉스한 면과 포크 송의 다양함, 유머 그리고
그들의 정신을 좋아했다. 그들은 기성세대 뿐만 아니라 The Jack
Benny Show 같은 텔레비젼 시리즈에 출현함에 따라 젊은 세대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그 트리오의 레코드 히트 행진은 계속되었고 1960년 한 해 동안
캐피탈 레코드사의 전체 수익의 20%는 킹스톤 트리오 몫이었다.
비치보이스가 서프 뮤직을 명시하고 비틀즈가 소위 "Merseybeat"
사운드와 브리티쉬 인베이젼의 새 지평을 열은 그룹이었다면 그들
또한 전 포크 장르를 정립한 그룹이라고 볼 수 있다. 킹스톤 트리오의
젊은 열정, 그들의 업 비트된 감성과 트래디셔널곡의 믹스는 케네디
정부의 탄생과 잘 어울리는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케네디 대통령이 집무를 보기 전에 킹스톤 트리오는 첫번째
위기에 직면하는데 61년 1월에 자꾸 불어나는 음악적 차이로 Dave
Guard는 킹스톤 트리오를 떠난다. 킹스톤 트리오의 가장 중추적
멤버였던 가드는 포크 송 뿐만 아니라 트리오가 공연하고 음반을
냈던 특히 다른 나라의 곡들을 많이 알고 있는 멤버였다. 좀 더 광범위
하고 진지한 수준에서 포크 음악을 추구하고자 하는 열의 때문에 그는
킹스톤 트리오를 떠났다.

그러나 킹스톤 트리오의 성공은 멈추지 않았고 새 멤버 존 스튜어가
61년에 합류했다. 스튜어트는 한 때 락&롤 음악을 추구 했으나 포크
뮤직으로 전환한 아티스트였다.
스튜어트가 킹스톤 트리오 안에서 처음 리드 보컬을 맡았던 "Take Her
Out of Pity"를 필두로 새로운 킹스톤 트리오는 음악적으로 계속 발전
했고 그들의 음반은 꾸준히 팔렸다.

61년에 발매된 "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은 차트 21위에
올랐는데 그들의 초기 싱글보다는 상위권에 들지 못했지만 새롭게
생겨난 라디오 프로그램의 청취자들에게 인기를 끌었고 빌보드
이지 리스닝 차트에서 4위를 기록하였다. 무엇보다도 그 곡은 사회적
항의를 담고있는 곡으로서 수 많은 젊은 포크 팬들이 가장 선호하는
곡이 되었다.

일련의 복잡한 사회적 변화를 겪는 와중에 점점 더 젊어진 청중들은
킹스톤 트리오에게 별 매력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킹스톤 트리오가
58년에 처음 음악활동을 시작하였을 때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상대적으로 정치에 무관심 했고 그들은 학업에 열중하던지 여가시간을
즐겼던 세대였는데 킹스톤 트리오는 그 시대의 분위기를 완벽하게
소화한 그룹이었다.

젊어진 청중들은 더욱 진지한 포크 송들을 선호했다. 그들은 수적으로
적었지만 그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고 남부에서 시민운동의 시작을
말미암아 심각한 사회적 이슈에 민감 했던 사람들이었다. 62년 쯤에는
포크 음악 팬들은 양분되었는데 한 쪽에는 새롭게 정체성을 갖은
사회적 문제에 민감한 포크 송 팬들이 있었다. 그들은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할 뿐 아니라 시민 운동에도 깊게 개입되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소위 라이트 윙이라고 불리우는 포크 음악 팬들이 있었다.


킹스톤 트리오는 그들의 팬들을 많이 잃고도 활동을 계속 해왔는데
유동적이었던 젊은 포크 팬들은 락&롤로 눈을 돌리기도 하였다.
그 당시는 새롭게 락&롤이라는 새로운 물결이 출현하던 때였다. 젊은
팬층을 잃어버린 킹스톤 트리오는 사회적 이슈에 민감했던 밥 딜런
이나 순수 포크음악을 추구했던 Peter, Paul & Mary보다는 기반이
약했다.

The Weavers, Pete Seeger, Woody Guthrie를 모델로 했던 포크
가수들은 그들이 결코 이민 농장에 있었거나 40년대 파시즘에 대항
했던 시기에 살지 않았지만 마치 그들이 경험한 것처럼 행동하고
노래했다. 그에 반해 킹스톤 트리오는 특별한 정치적 입장을 띄지
않고 사랑이나 행복한 시간들을 노래한 그룹이었다. 이러한 점이
그들 성공의 기반이 되었던 동시에 또한 그들이 이루어낸 참신한
포크 앙상블의 바탕이 되었다.

63년 후반에 킹스톤 트리오의 음반 판매는 감소하였고 64년 초기
비틀즈가 미국에 상륙함에 따라 캐피탈 레코드사는 더 큰 물고기를
낚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64년에 캐피탈 레코드사와의
계약이 끝났다.

67년에 비틀즈는 앨범 를 발매 했는데 팝 뮤직에서 일대 전환기를 마련하였지만 67년 6월에 있었던
킹스톤 트리오의 Goodby 콘서트는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해체 후 스튜어트는 매우 성공한 송라이터가 되고 닉 레이놀즈는
오레곤 주로 이주해 양을 기르고 극장을 운영하게 된다. 데이브 가드는
91년 3월에 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뮤지션으로서 왕성한 활동을
하는데 그는 뮤직 인스트럭션에 관한 책들을 썼다.

Bob Shane은 해체에 반대를 하고 72년에 킹스톤 트리오를 재 결성
하게 되고, 여기에George Grove와 Roger Gambill이 합류를 하고
새로운 킹스톤 트리오는 소수이지만 열광적인 팬들을 갖게 된다.
그들은 70년대 후반에는 다시 음반을 내기 시작하고 1981년에는
킹스톤 트리오의 전 멤버 Bob Shane, Nick Reynolds, Dave Guard,
John Stewart, George Grove, and Roger Gambill가 모두 모여
텔레비젼 방송에서 콘서트를 하기도 한다.

80년대 후반 Roger Gambill의 예상치 않은 죽음으로 Nick Reynolds
가 다시 합류하고 킹스톤 트리오는 90년대 까지 포크음악행진을
계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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