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ton John - 4

2024. 9. 19. 18:20팝아티스트

세상일에 아무 관심없는 천재 작곡가

대중 음악인을 '음악 하는 자세'와 관련하여 분류한다면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그가 처해 있는 시대 상황을 면밀히 관찰하여 대중 정서의 현 위치를 찾으려는 사람들이며, 다른 한쪽은 주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든 무관하게 자신의 음악만을 표출하는 데 심혈을 쏟는 사람들이다. 두 가지 스타일이 혼재되어 있는 음악인도 있을 테지만 대체로 전자의 무게 중심은 시각(view)일 것이며 후자는 예술(art)이다.

엘튼 존은 바로 후자를 대표하는 금세기 최고 록 스타 가운데 한사람이다. 흔히 그는 1970년대를 대변하는 톱 가수로서 록 역사에 기록된다. 1970년대가 개막되면서 '보더 송(Border song)'을 빌보드 차트에 랭크시키며 등장한 그는 이후 당대 누구도 따를 수 없는 탁월한 선율로 인기 차트를 석권했다.

그의 멜로디를 뽑아내는 재주는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의 쌍포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경이적이었고 또 천재적이었다. 만약 1970년대에 그가 없었더라면 팝계의 '예술적 활기'는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와 관련, 록 평론가인 로버트 크리스트고(Robert Christgau)의 엘튼 존에 대한 서술은 참으로 맹쾌하다. “1960년대의 비치 보이스처럼 엘튼 존은 1970년대의 필수적인 시금석으로 남아 있다. 따라서 그가 해악의 진부성을 축약하고 있다고 믿는다면 그렇게 하라. 하지만 내 생각으로 그는 가장 유순하고 황량한 시절마저도 생기로 가득 채울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 인물이다.”

그런데 크리스트고도 인정하고 있듯이 1970년대는 사회성으로 특징지어진 1960년대 록 혁명의 정신이 함몰되어 버린 '록 예술성의 시대'로 정의된다. 크리스트고가 그때를 '해악'이니 '유순하고 황량한 시절'이니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인식에 기초한 것이다.

엘튼 존 스스로도 '음악을 만들면서 정치적 이슈를 내거는 것은 넌센스다. 세상사를 개선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가서 음악하는 것뿐' 이라며 자신의 비(非)참여적 음악관을 천명하곤 했다. 그는 “음악에 있어서 정치가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말로 세상을 바꾸려 했던 1960년대 가수들을 보라. 삶은 여전히 똑같지 않은가”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가 록의 사회성에 얼마나 등을 돌렸는지는 곡 쓰기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그는 다른 송라이터들과 달리 작사는 직접 하지 않고 남에게 맡겼는데 당시 그의 작사 파트너는 버니 토핀(Bernie Taupin)이었다. 버니가 쓴 노랫말은 지극히 개인적인 내용으로 가득 찼다. 버니는 사회를 떠난 신변잡기의 소재에 집착하면서 공상을 써내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엘튼은 그의 가사를 좀처럼 따지지 않았다. 그저 즐겁게 그의 공상을 팬들에게 전달할 뿐이었다. 그는 심지어 “난 정말 버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른다. 어떤 사람에 대한 노래냐고 묻기는 하지만 의미를 캐내지는 않는다. 난 그의 가사 10편에 곡을 붙일 때까지 그를 만나지 않은 적도 있다”고 스스럼없이 밝히기도 했다. 자기 환상만을 늘어놓는 작사가, 그것을 검증도 없이 곡을 쓰고 즐겁게 노래하는 가수, 그들에게서 시각을 바랄 수 없다. 그런 음악은 본질적으로 예술 쪽으로 치우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엘튼 존이 1970년대의 특성을 떠 안은 인물임을 시사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단서가 있다. 1970년대는 1960년대 히피의 프리 섹스 여파로 성의 일반적 개념이 철저히 해체되어 독신, 동성애, 그룹 섹스, 배우자 바꾸기 등 새로운 섹스 스타일이 마구 고개를 들던 시기이기도 했다. 때문에 1970년대를 '자극의 시대'라고도 일컫는 것이다.

엘튼은 소문난 양성(兩性)주의자였다. 아니, 스스로 바이 섹슈얼(Bi-sexual)이라고 공언하고 다녔다. 그런 충격적 신상 공개는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를 뺀다면 록 스타들 중에서는 그에게서 최초로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그는 양성주의자가 아니라 동성주의자, 즉 게이라는 사실이었다.

최근 <디테일즈>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왜 그 때 호모라고 하지 않고 바이 섹슈얼이라고 했냐”하는 질문에 “아마 겁이 나서였기 때문일 거다. 진실 파기이지만 그 당시에는 가능한 한 '외교적'으로 말하려고 생각했다”고 답변했다. 이 부분에 관해서 그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인터뷰 내용을 더 살펴보기로 하자.

- 언제부터 여성 관계를 단계적으로 끝냈는가?
:끝내다니? 어떠한 여성 관계도 결코 없었다. 그 누구도 나는 끝내고 자시고 하지 않았다.

- 몇 살 때부터 자신이 게이임을 알았는가?
:대략 23세쯤이었을 거다(그는 1947년생이므로 1970년쯤 된다). 그때가 나의 첫 실제 경험이었다. 아마 그 전부터 게이인지 알았을 텐데 23살에 실질적으로 그것을 맞이했다.

- 그런데 결혼은 왜 했나?
:잘못된 이유로 결혼했다. 난 결혼하면 내가 당하고 있는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난 게이야. 난 정말 불행해'라고 여기곤 했으니까.

동성연애자라는 여론의 화살을 피하려고 결혼했다는 얘기다. 그는 1984년 독일 출신의 레코딩 엔지니어인 레니트 블라우어(Renete Blauer)와 결혼식을 올렸다. 게이라고 공공연히 밝힌 사람이 여자에게 갔다는 이유로 화제를 모았던 이 관계는 당연히 오래가지 못했다. 둘은 3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1987년 이혼했다.

게이 발언, 여성과 결혼, 그리고 이혼 등의 사건으로 이미 타블로이드 신문의 가십 단골이 된 그는 1988년 마침내 한 차례 커다란 홍역을 치러야 했다. 영국의 <선>지가 “엘튼이 10대 어린이들을 모아 놓고 입에 담을 수 없는 추잡한 섹스 파티를 벌였다”는 기사를 게재한 것이었다. 그 기사에 따르면 그는 게이를 초월하는 '성도착증 환자'이자 '성격 장애자'나 다름없었다. 인간 관계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어머니마저 창피해 스페인으로 떠나버리자 분기탱천한 그는 두주먹 불끈 쥐고 <선>지를 고소했고 이어 치열한 법정 공방을 벌이게 됐다. 그는 이 재판에서 승소해 명예를 회복했지만 이후 언론으로부터는 '흥미의 대사(Ambassador of Fun)'라는 불명예스런 타이틀을 얻었다.

애초부터 매스컴과 우호적인 관계는 아니었지만-언론의 등쌀이 마릴린 먼로를 죽이게 했다는 내용을 노래 '바람속의 촛불(Candle in the wind)'로 알 수 있다-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언론에 몸서리를 치게 되었다. 그는 영화 <라이온 킹>의 사운드 트랙은 '오늘밤 그대는 사랑을 느끼나요?(Can you feel the love tonight?)'으로 재기한 94년까지 근 7년 간 가능한 한 언론과의 인터뷰를 회피했다. 그의 기자 혐오증은 너무나 유명하다. 스스로도 “난 영국의 언론에 분노가 치민다. 정말로 그들이 싫다. 그들은 거짓말쟁이들이며 지구의 깡패들이다”라고 강도 높게 말하기도 했다.

그의 언론에 대한 분노는 지금도 살아 끓어 넘친다. 올해 발표된 새 앨범의 타이틀 송 '메이드 인 잉글랜드(Made in England-8월 19일자 빌보드 싱글 차트 52위)'가 그것을 실증해 주는 곡이다.

“난 영국에서 만들어졌어. 블루 코티나차처럼 말야... ...넌 스캔들의 냄새를 좇았지. 여기 내 가운데 손가락을 봐. 난 고통의 40년을 살았어. 아무것도 기댈 것이 없어... ...넌 아직도 호모라고 얘기하고 모든 사람이 웃지.”

그가 이처럼 투정을 부리는 것도 일리는 있다. 원래가 솔직하고 감성적인 성격으로 자신의 성(性)을 고백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언론을 거치면서 일반인들의 미움과 손가락질이 생겨난 것이라고 그는 믿기 때문이다. 그의 인기가 하향세로 접어든 것도 양성주의자임을 밝힌 1976년부터였다. 그는 1989년 <파리 마치>지와의 인터뷰에서 “지난번 앨범 <레그 스트라이크스 백(Reg Strikes Back)>은 전세계적으로 판매 성적이 대단히 좋았는데 유독 영국에서만은 결과가 안 좋았다. 영국인들 대부분이 <선>지의 악의적인 기사를 믿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어떤 논리적인 응수에도 불구하고 그가 '예술과 자극'의 1970년대라는 보수 시대를 살아왔으며 보수 성향의 인물이라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는 또 명백한 '록 엘리트'다. 부자라는 점에서도 그렇거니와 음악 능력의 측면에서도 그렇다.

그는 “버니의 가사를 받아 기분이 좋을 때면 곡을 쓰는데 15분도 안걸린다”고 자랑했다. 그런 천부적 재능을 밑천 삼아 그는 지금까지 무려 32장의 앨범을 발표했다. 물론 이 왕성한 생산력을 아티스트의 성실성이라는 측면에서 극구 칭송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틀어보면 그것은 음악 엘리트만이 할 수 있는 일 아닐까. 실제로 그는 비평계 일각으로부터 '음악의 과소비'를 행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며 그가 1970년대 후반 '엘리트만이 아니라 누구나 음악할 수 있다'는 평등의 이데올로기를 내건 펑크 진영의 공격 대상이 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아직도 그의 이름에는 '로커'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그러며 연상되는 과거의 거친 피아노 연주나 기행적 무대는 분명 폭발과 반란을 특질로 하는 록의 전형적 제스처였다. 그러나 지금 그에게서 그러한 '록의 반항적 미학'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오늘밤 사랑을 느끼나요'가 말해주듯 중산층의 격조와 결탁한 'AOR(Adult Oriented Rock)'이나 스탠더드 팝으로 색깔을 바꾸어 안전지대에 정착해 있다. <타임>지는 얼마전 그의 새로운 전성기가 도래했음을 대서특필하는 순간에도 '그에게는 실재(實在)하는 록 스타의 고뇌와 거친 감정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빼놓지 않았다.

그가 '팝계의 불사조'라는 작위를 하사 받아야 함은 마땅하다. 정글과도 같은 팝계를 4반세기에 걸쳐 롱런한 '영광의 생존'만으로도 그는 위대하다. 1993년에 이미 엘비스 프레슬리의 벽을 넘어 24년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매년 차트 40위권의 히트곡을 낸(올해로 그 햇수는 26년으로 늘어났다) 사실만으로도 그의 위력을 충분히 실감할 수 있다. 마흔여덟 살의 노장이 신인들 틈새에서 몇 백만 장의 음반 판매고를 올리는 것 또한 우리 입장에서는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그 나이의 사람에게 록에 대한 충성을 요구하는 것도 무리일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시각이 없다. 그는 4반세기 동안 그의 관점을 개인으로부터 해방시킨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보수적인 시대에 환영을 받고 있는 것이다. 내내 부진하다가 미국 사회에 보수적인 기류가 소생한 지난해(1994년) 재기한 것을 보라. 그의 노래들 '굿바이 옐로 브릭 로드(Goodbye yellow brick road)' '오늘밤(Tonight)' '미안하다는 말은 정말 어려워(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 등은 아직도 우리들에게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는 실로 우리의 팝송 청취와 수용이 예술적 가치에만 집중되어 있음을 상징하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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