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lly Parton

2024. 9. 17. 10:42팝아티스트

 
 
Dolly Parton

1946년 1월 19일 Tenessee주 Locust Ridge에서 출생. 장 르 컨츄리, 컨츄리 팝 대표곡 Coat Of Many Color (1971), Jorlene(1974), I Will Always Love You(1974), Here You Come Again(1977), Islands In the Stream(1982, duet with Kenny Rogers)등등. 세상의 온갖 반짝이는 것들은 모두 Dolly에게로 흡수된 것은 아닐까. 그녀 의 곁에 서면 누구라도 자신의 행색?을 한번 쯤 돌아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기분을 들게 하는 '여자'이자 가수가 Dolly Parton일 것이며, 그 녀의 보컬, 노래들, 영화 속의 모습들에서 그러한 화사한 매력들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컨츄리에 바탕을 둔 음악을 한 가수로는 유례가 없는 전 세 계적인 인기를 누린, 누리고 있는, 한 마디로 정의하기엔 너무도 많은 매력 을 가진, 여자 중의 여자, 가수 중의 가수의 이러한 화려한 모습은 그러나 외적인 것에서만 기인하는 것은 아닐 터이다. 어찌 보면 천박하게 보이는 듯 싶은 외모나 보컬일 수도 있는데 대중에게 친근함으로 다가서 마음을 사로잡 을 수 있었던, 있는 그 이면에는 자신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되었을 자존심과 음악에의 지극한 열정, 주체할 수 없는 '끼'가 자리잡고 있는 때문은 아닐까. 12명의 형제 가운데 4번 째로 태어나 지독히도 가난한 나날들을 보내던 어린 시절, 소녀의 마음에 한줄기 희망으로 어린 음악, 그 즐거움을 끊임없이 곱 씹으며 피나는 연습과 노력 끝에 만들어진 이름이 바로 Dolly Parton인 것이 다. 1946년 1월 19일 테네시주의 그레이트 스모키 산맥 근처 Locust Ridge의 농장에서 12형제 중 네 번 째로 태어난 Dolly의 어린 시절은 말 그대로 지독 한 가난의 연속이었다. 부모는 자주 다투었고 지긋지긋한 가난은 소녀 Dolly 는 마음의 상처를 입고는 했다. 음악을 할 수 있어 그나마 행복할 수 있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농꾼이던 아버지는 음악에는 문외한이었다. 그러 나 그녀의 할아버지인 Jake Owens는 오순절 교회의 목사로 바이얼린 연주자 였으며 작곡가이기도 했고 Dolly는 이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음악에 흥미 를 느꼈다. 7세 되던 해에는 조카의 음악적 재능을 간파한 삼촌 Bill Owens 로부터 기타를 선물받아 연습을 시작, 12세 되던 해에는 녹스빌의 T.V. 프로 그램인 The Cas Walker Farm And Home Hour에 정기적으로 출연, 그후에도 꾸 준히 역량을 쌓아 1959년에는 Grand Ole Opry에서도 그녀에게 손짓을 보내기 에 이르며 1960년에는 첫 싱글인 "Puppy Love"를 취입하기도 한다. 14에 되던 해에는 Mercury와 계약을 체결, 그러나 1962년 발표한 "It's Su re Gonna Hurt"는 노래 제목 그대로 그녀에게 실패의 아픔을 주고 레코드사 는 그 즉시 그녀에게 결별을 선언한다. 그후 5년간 그녀는 자신의 노래를 취 입해줄 레코드사를 찾아 끊임없이 문을 두드리고, 몇 곡의 곡들을 발표 이슈 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이 시절 그녀는 고등학교 재학중이었고 밴드부에서 스네어 드럼을 맡고 있기도 했다. 고교를 졸업한 후 그녀는 컨츄리의 본고장 내쉬빌로 가 삼촌 Bill Owens와 머무르며 음악 활동을 계속하나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계속되는 실패에 결국 Dolly는 데모 테입을 제작하기 시작했고 마 침내 Monument 레코드사와 계약을 체결, 팝 스타일의 곡인 "Happy, Happy B irthday"로 거의 챠트에 진입하는 성과를 거둔다. 1966년, Bill Phillips가 Dolly가 쓴 곡 "Put It Off Until Tomorrow", 그녀 삼촌인 Bill Owens가 쓴 "The Company You Keep"를 불러 탑 텐에 오르며 그 여세가 Dolly에게도 옮겨 와 그녀의 싱글 "Dumb Blonde"는 1967년 챠트 24위에, 그 얼마 뒤에는 "Some thing Fishy"가 17위에 올라 비로소 그녀는 자신의 진가를 확인받았고 이 작 지만 소중한 성공은, 당시 컨츄리 스타로 텔레비젼의 쇼 프로그램에 출연하 고 있던 Porter Wagoner의 마음을 움직여 결국 1967년 9월 5일, 그녀는 그의 파트너로 쇼에 출연하게 된다. 또한 그녀는 Wagoner가 속해 있던 RCA 레코드 와 계약, 그와 듀오로 활동하며 첫싱글 "The Last Thing on My Mind"은 1968 년 초 컨츄리 챠트 탑 텐에 진입 6년간 챠트에 머무는 곡이 된다. 비록 그녀가 Wagoner와 함께 쇼프로를 진행하고 있었다고는 해도 사람들은 그녀를 개별적인 존재로 인식하지 않았고 단지 보조 진행자로만 여겼다. 이 러한 경향은 듀오 활동에서도 나타났는데, 그녀는 언제나 그의 그늘에 가려 진 채 과소평가되고는 했던 것이다. 1968년 Dolly는 솔로 싱글 "Just Becau se I'm A Woman"을 발표, 17위에 오른다. 그러나 60년대의 히트곡들 중에는 솔로 곡이 거의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1968년 컨츄리 뮤직 연합에서 이 듀 엣에게 Vocal Group이라 명명할 정도로 듀엣은 명성을 누렸으나 그녀의 솔로 음반은 계속해서 무시당했다. Wagoner와 Dolly는 그녀의 솔로 앨범이 별반 호응을 받지 못하자 좌절감에 빠지는데, 1969년부터 그는 그녀의 공동제작자 로 나섰으며 또한 그녀의 작품에 대해 절반의 저작권을 행사하는 것을 조건 으로 금전적 투자도 아끼지 않았기에 더 그랬다. 이에 Wagoner는 1970년 경 그녀로 하여금 Jimmie Rodgers의 "Muel Skinner Blues"를 부르게 한다. 이 음반은 챠트 3위에 오르며 이어서는 그녀의 첫번째 넘버 원 히트 싱글 "Josh ua"이 탄생한다. 그 다음 2년간 그녀는 제법 많은 솔로 히트곡을 내는데 이 가운데에는 그녀의 대표적인 노래 "Coat Of Many Color (1971, 4위)"도 들어 있으며 Wagoner와의 듀엣곡도 있었다. 비록 싱글로 성공을 거두기는 했어도 1974년 "Jorlene"이 넘버 원을 차지 하기 전까지는 블록버스터급 히트곡이라 할 만한 것은 없었고, "Jorlene"이 마침내 그것을 이뤘다. 이후 그녀는 Wagoner와 헤어지나 1976년까지는 계속 해서 그와 함께 쇼에 출연하기도 하고 듀엣으로 곡을 부르기도 한다. 어쨌든, 그와 헤어지고 난 후 그녀의 음악 경향은 보다 다채로운 흐름을 띄게 되는데, 발라드풍의 "I Will Always Love You(1974, 1위)", 레이시한 스타일의 "The Bargain Store(1975 1위)", 크로스오버 팝 스타일의 "Here You Come Again (1977, 1위)", 디스코풍의 "Baby I'm Burning(1978, 팝 챠트 25위)등의 곡들 에서 그러한 다양성을 엿볼 수 있으며, 1974년에서 1980까지 지속해서 그녀 는 컨츄리 챠트 탑 텐 안에 오르는 곡들을 발표, 이들 가운데에는 적어도 여 덟곡 의 넘버 원 히트곡이 포함되어 있다. 1976년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내 건 텔레비젼 쇼 'Dolly'의 진행을 맡게 되고 그 이듬해에는 자신의 곡을 직 접 제작할 수 있는 권리(이전에는 Wagoner에게도 그 권리가 반은 있었다)를 되찾아, 그 결과 1977년 그녀는 손수 제작한 New Harvest, First Gatherin이 라는 의미심장한 타이틀의 음반을 낸다. 또한 Rose Madoxx에서부터 Emmylou Harris, Olivia Newton-John에 이르기까지 1970년 대 후반의 많은 인기 아티 스트들이 그녀의 커버 버전을 발표 히트를 거두는 등의 성과를 거둔다. 1977년 "Here You Come Again"가 팝 챠트 3위, 컨츄리 챠트에서 5주간 넘버 원 히트를 치며 골드 레코드를 기록, 엄청난 성공을 거둬 Dolly Parton은 이 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슈퍼 스타가 되었다. 이어 발표된 Heartbreaker 역 시 골드 레코드를 기록하며 컨츄리 뮤직을 대변하는 인물이 된다. Wargoner 와의 저작권 문제로 인한 지지부진한 법정 공방도 그녀에게 이롭게 해결, 그 녀는 모든 권리를 되찾는다. 이 문제로 두 사람의 듀엣 앨범인 Making Plans 는 발매가 지연, 1980년에야 세상과 조우하고 타이틀 트랙은 컨츄리 챠트 2 위에 오른다. Donna Summer가 곡을 쓴 "Starting Over Again", "Old Flames Can't Hold A Candle To You"와 "9 To 5"등 세 곡의 넘버 원 히트곡을 내며 Dolly의 상 업적인 성공은 80년대에 들어서도 이어진다. 특히, "9 To 5"는 그녀의 첫 번 째 팝 챠트 넘버 원 곡으로, 동명의 영화 주제곡이며 그녀는 이 영화를 통해 배우로서의 끼도 마음껏 발산한다. 이 영화에는 또한 Jane Fonda와 Lily Tom lin도 출연, 미국 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대대적인 히트를 거둔 바 있다. 이 곡이 그녀에게 안겨다 준 것은 비단 그 뿐만은 아니었다. 이 곡은 80년대를 관통하는 그녀의 기념비적 활동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녀는 이어 여러 편의 영화에 출연, 1985년에는 근육질의 스타 실베스타 스탤론의 코미디 "Rhinest one"에서도 모습을 보인다. 1981년부터 1985년까지 12곡의 탑 텐 히트곡을 발표, 그들 가운데 반은 넘 버 원을 차지한다. 팝 챠트에서도 계속해서 모습을 보이며 재취입한 "I Will Always Love You"는 50위 권에, 비지스의 Barry Gibb이 곡을 쓰고 Kenny Rog ers와 함께 부른 저 유명한 "Islands In the Stream"은 2주간 넘버 원을 차 지하며 선풍적인 인기를 끈다. 어쨌든, 1985년 경 많은 올드 팬들은 그녀가 주류에서 너무 오랫동안 활동하고 있다고 여겼는데 사실이 그랬다. 많은 그 녀의 앨범들이 컨츄리가 아닌 어덜트-컨템포러리 팝 챠트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녀는 엔터테인먼트 사업에도 뛰어 들었고 1985년에는 Dol lwood라는 테마 파크를 개장한다.1986년까지 챠트에 등장한 그녀지만 RCA는 더 이상 그녀를 붙잡지 않았고 Dolly는 1987년 Columbia레코드와 계약을 한 다. Columbia에서 데뷔 음반을 내기 전 그녀는 린다 론스태트, 에밀루 해리 와 함께 Trio Album을 발표하기도 하는데 이 음반은 비평적인 면에서나 팬들 의 호응도 면에서나 대대적인 히트를 치며 밀리언 셀러를 기록, 팝 챠트 6위 에 오르고 컨츄리 챠트에서는 모두 세 곡이 탑 텐 안에 진입하는 성공을 거 둔다. 이 앨범의 성공으로 그녀는 비록 한 시즌 밖에 가지 못했지만, ABC의 주말 버라이어티 쇼 'Dolly'의 진행을 맡기도 한다. 또한 Columbia에서의 첫 데뷔 음반-White Limozeen도 이 음반의 성공에 힘입어 두 곡의 넘버 원 싱글 을 내며 히트한다. 1990년 Ricky Van Shelton과 듀엣으로 부른 "Rockin' Years"가 넘버 원 히 트를 기록한 것 외에는 별반 눈에 드러나는 활동을 보이지 못하며 서서히 챠 트 밖으로 밀려난다. 그녀의 "I Will Always Love You"는 1992년 Whitney Ho uston에 의해 불려져 14주간 넘버 원을 차지하는 등 그 영향력과 공헌도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어쨌든 이후 에도 그녀는 챠트에 연연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며 계속해서 음반을 발표하며 가장 최근작으로는 올해 초 발표한 Little Sparrow를 들 수 있다. 비록 예전 같은 인기를 누리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고 컨츄리 뮤직의 아이콘 같은 존재로 여겨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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