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bby Darin
2024. 9. 13. 16:32ㆍ팝아티스트
Bobby Darin은 1936년 뉴욕의 브롱크스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기전에 이미 아버지는 타계하셨고 워낙 어려운 집안 형편때문에 암울한 유년시절을 보내면서 심장질환등의 여러 병 치례를 하게 되었다. 그의 본명은 Walden Robert Cassott라고 하는 이탈리아계 미국인 혼혈아였다. 학업보다는 음악에 관심이 있던 나머지 다니던 맨하턴의 Hunter 대학을 중도에 포기하고 팝계에 뛰어 들었다. 이때 가수로서의 새로운 이름을 짓기 위해 고민하던중 마땅한 이름이 생각나지 않자, 전화번호부의 'D'란을 뒤적거리다가 Bobby Darin이란 이름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처음 56년에 몇몇곡을 만들었지만 히트는 내지 못하고 실패를 거듭하다가, 1958년 Bobby Darin이 직접 작곡한 'Splish Splash'가 폭발적인 히트를 기록하게 되면서 이곡이 Bobby의 실질적인 데뷔곡이 된다. 이곡은 58년에 차트 3위에 오르더니 1개월도 채 못가서 10만장의 판매고를 올렸고 그의 최초의 밀리언 셀러를 기록한 노래이다. 이 곡을 이후로 Bobby는 명실공히 50년대 10대의 우상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 곡의 뒤를 이어 약간의 리듬앤 블르스 필링이 가미된 'Queen of the hop', 'Dream Lover' 그리고 59년에 스윙 재즈 스타일인 'Mack The Knife'등의 골드싱글 곡들이 이어졌고, 그는 2개 부문에서 그레미상의 영애까지 안았다. 솔직하고 야망에 찬 Bobby는 Frank Sinatra보다 더 위대한 스타가 되겠다고 외치며 헐리웃으로 가서 영화제작자들에게 스카웃 된 60년에 첫 작품 [Come September]에 출연했는데, 나중에 이 영화를 계기로 함께 공연했던 Sandra Dee와 결혼에 골인했다는 풍문도 들림. 또한 그는 [Capt Newman, M.D]에 출연하여 오스카상 후보에도 오르기까지 하였다. 60년도에 'Beyond the Sea', 61년에 자작곡인 'Things'를 히트시켰고, 62년도에는 Ray Charles의 곡으로 알려진 'What'd I'm Say'를 리메이크, 63년에는 '18 Yellow Roses' 등을 히트 시켰다. 6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그 역시 50년대 활약했던 다른 아티스트와 마찬가지로 브리티쉬 인베이션 세력에 밀리기 시작하여 인기가 서서히 떨어지기 시작했을 즈음. 그의 마지막 빅 히트 곡인 'If I Were A Carpenter'를 66년에 내놓았는데, 이곡은 Tim Hardin과 Randy Newman이 작곡한 포크곡이다. 60년대 중반에 이르러 인기의 쇠퇴와 함께 66년 Sandra Dee와 이혼한 후에는 라스베가스에서 활약하면서 브라운관에도 자주 모습을 나타냈다. 더우기 68년 로버트 케네디의 유세연설에 참가한 것은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그러나 케네디의 장례식에 참여하면서 그는 크게 달라졌다. 신비적이고 종교적인 체험을 경험한 그는 결국 세상과의 인연을 끊게 되는데 그는 소유물을 모두 팔아 버리고 캘리포니아로 가서 이동식 집(Mobil House)에 기거 하였다. 1년여를 관조적인 자세로 보내다가 70년대 초에 다시 모습을 나타낸 그는 완전히 변했다. 청바지 차림에 수염을 기르고 이름도 Bob Darin으로 개명하여 [Born Walden Robert Cassott] 음반을 발매 하였으나 실패를 기록. 70년대 초에 자신의 소속을 모타운으로 옮기고 라스베가스에 출연을 하였다. 1973년 12월 심장수술 도중 37세의 나이에 사망을 했다. 그는 엄청난 양과 여러장르에 걸쳐 다양한 음반을 남겼다. 특히 락음악 비평가들로 부터 여러가지 평가 분석을 받았고, 1990년에 로큰롤 명예전당에 들어가게 되었다. [2부] Bobby Darin의 음악성.. 그의 음악적인 특징은 장르의 다양성에 있는 것 같다. 대개의 가수들이 이 가수는 스텐더드 계열, 저 가수는 컨츄리 계열, 로큰롤 가수 등등 명확한 선으로 구분지어 지는 데 반해 Bobby Darin이란 가수는 쟝르에 대한 경계선이 없었던 것 같다. 그 만큼 그는 어느 특정한 한가지의 쟝르에 갇히기 보다는, 매우 많은 것을 하고 싶어했던 그러한 가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Dream Lover, Splish Splash..등등의 곡에서는 로큰롤 리듬을 들려 주고 18 Yellow Roses나 If I Were A Carpenter등의 Folk곡들도 히트를 시켰고, Mack The Knife와 같은 스윙재즈 리듬..그 이외에 컨츄리풍의 곡들을 불럿는데 그의 장르의 다양성을 이해할 수 있다. 그는 56년부터 음악활동을 시작하여 2년간의 무명시절 끝에, 58년부터 성공의 싹이 보이면서, 50년대 틴아이돌 스타로 불리울 만큼 58년도에서 60년까지의 시기가 그의 음악기에서 최대 전성기에 해당하는 시기였다. 이 시기에는 로큰롤 리듬의 곡들을 주로 불렀던 시기로 판단되며, 브라스 악기가 가미되면서 그의 독특한 사운드를 맛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시기적으로도 이때가 로큰롤음악의 전성기인 것을 감안한다면 그 역시 로큰롤로 전면적인 승부를 걸어 가장 성곡적인 시기를 기록햇던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50년대 전성기를 지나 1960년대 초반까지는 로큰롤 리듬의 곡 이외에 Folk, 발라드, 컨츄리 등등의 여러가지 장르를 도입하여 성공을 하게 된다. 특히 그는 작곡에도 상당한 소질이 있었던 것 같다. 그의 히트곡중에 여러 히트곡이 직접 작곡한 곡이란 사실을 보면.. 60년대 초반까지의 왕성한 음악적인 활동을 보이다가 60년대 중반이후로 그다지 큰 히트곡을 내지 못했던 것 같다. [3부] Bobby Darin의 대표적인 히트곡 (빌보드에서 높은 차트를 기록했던 곡) Splish Splash(58) Bobby Darin의 실질적인 데뷔곡으로, 인기 디스크 자키인 머레이 라디오 프로그램에 줄연했던 그는 그곳에서 디스크 자키의 물을 튕기는 듯한 말소리에 힌트를 얻어12분 만에 작곡한 곡이라 한다. 전형적인 로큰롤 리듬의 곡으로 밀리온 셀러를 기록 Dream Lover(59) Bobby Darin의 자작곡인 이곡은 꿈속에서 만난 여인과의 사랑이 실제 현실이기를 바라는 내용의 곡으로, 로큰롤 리듬을 이용. 바비다린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그의 대표곡이라 할 수 있다. Mack The Knife(59) Brech-Weill의 뮤지컬을 영어 가사로 만든 곡으로 59년 Bobby가 불러 무려 9주간 1위를 석권한 곡이다. 이곡은 스윙재즈 스타일의 곡으로 스윙가수로서의 변신에 성공했음을 보여주는 곡 18 Yellow Roses(63) 역시 Bobby Darin의 자작곡으로 전형적인 Folk발라드의 곡으로 곡 중간 중간에 들리는 어쿠스틱 기타소리가 상큼함을 주는 것 같다. 그의 음악적인 다양성을 엿볼 수 있는 곡 (국내에서 특히 사랑 받았던 곡) A True True Love Bobby Darin의 곡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전혀 비트감을 배제한 애절한 발라드의 곡 현악기와 아코디언의 반주가 이채로우며 여성코러스가 그의 절제된 음성을 받쳐 주는 곡인 것 같다. 미국에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곡으로서, 국내에서만 사랑 받앗던 곡인 관계로 인해 정규 LP에는 수록되지 못하고, 싱글로서만 발매된 곡이다. I'll Be There 이곡 역시 미국 차트에는 올랐으나 그리 높은 순위에는 못오른 곡이다. Lost Love 60후반 트위폴리오등의 여러 가수들이 '잃어 버린 사랑'이란 제목으로 번안해 불렀던 곡으로, 의지해 왔던 사랑에 대한 갈망을 그리는 약간은 비관적인 내용의 애절한 발라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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