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

2024. 5. 21. 10:31아름다운생명의바다

2012-09-09 21:53:3


나의 아버지

 

나의 무의식 속에는

아니

나의 깊은 자의식 속에는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내 가슴속에 아로새겨진

나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있어서

.

.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로 부터 온 것일까...

나는

언제나 나자신에 대하여

끊임없이 되돌아 보게 되고

 

나의 분신과도 같은

아버지에 대한

아름답고 신비로운

기억의 그림자와 동행하며

울고 웃으며

때로는 분노하며 살아왔고

또한

살아가고 있는 오늘...

 

미동도 없이

눈에 보이지 않는 미물처럼

암흑속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던 나의 자아는

 

휘영청 달밝은 밤이었던

그 이전에는

전혀

자신의 존재를 기억하지 못하는

 

천진스런 웃음의

3년 4개월의 어린 아기 였었다

눈을 비비고 다시 헤아려 보는

믿을 수 없는

3년 4개월의 어린 아기...

 

어찌하여

어찌하여 나의 아버지께서는

세상의 빛도 인식할수 없는 나에게

시리도록 투명한

어린 나의 영혼을 깨트리며

어둠속에서

섬광처럼 번쩍이는 울림으로

커다란 울림으로

나를 한꺼번에 흔들어 깨우고

그 무서운 소리들을 듣게 하신것일까?

알아 듣게 하신것일까?

 

"너는 누구냐?"

어린 내 영혼위에 너무나 확연하게

비수처럼 날아 와 꽂히던

그 야수의

위협적인 공포의 목소리...

"내가 이 집 주인이다!"

너무나 거침없는 의연함으로

불꽃같은 의기를 뿜어 내시던

내 어버지의 음성!

 

아아...

그때 내가 처음으로 아버지를 깨닫고

그때 내가 처음으로 내 아버지의 음성를 들었고

그때 내가 처음으로 어둠속에서

 

그때까지 느끼지 못했던

내 아버지의 커다란 실체를

나의 뇌리에 영원히 각인 시킬수 있었다

 

아버지

나의 아버지께서는

 

당신께서 그 토록 사랑하시던

생명처럼 사랑하시던

딸을 두고 떠나야 하는

아프고 아픈

통한의 입맞춤을 하고 싶으셨던 것일까

그 이별의 슬픔이 너무 서러웠던 것일까...

 

내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갔던

남씨 집안 아들이

수십명의 인민군을 대동하고 집을 포위한채

" 꼼짝마라"는 외침속에서

열어 젖혀진 대청마루 난간을 붙잡고

벌벌 떨고 계시는 어머니의 치맛자락에 매달려

어머니의 가슴팍에 겨누어진 총구가

달빛아래 번쩍이는 것을 보는 순간...

" 김동무! 이동무!" 하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 탕! 탕! "

그렇게 고막을 찢기고 하늘이 무너지는

총성이 두발 울렸었다

........

그리고 나의 기억도 어둠이 삼켜 버린듯

총성이 울린 그이후가 전혀 기억에 없는 것이다

 

아버지가 끌려 가신 그 밤이 지나고

고요한 아침이 찿아 왔을때

가을 햇살이 쏱아지는 마당 한가운데 서서

나는

검은 머리를 풀어 헤치고

흰옷을 갈아 입으신 어머니께서

도회로 나가는 동구밖 언덕길을 울며울며

내달리는 모습을 보았다

 

누가 말해 준것도 아닌데

아버지를 맞으러 가시는 죽음을 맞으신

아버지를 맞으러 가시는 어머니의 모습임을

나는 직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슬픔이란 무엇인가

 

전혀 알수없었던 나의 눈에는 눈물이 흘렀을까...

 

한낮이 되어 돌아 오신 어버지께서는

객사 하셧다 하여

아버지가 거처하시던 본채로 모셔오지 못하고

일하는 분들이 거처하는 행랑채의 사랑방에

흰천으로 씌여진

커다란 안반위에 누워계셨는데

...

흰두르마기를 입으신 가슴위로

붉은 피가 뚝뚝 흐르고 있었다

 

돌아 가신지

한밤이 지나서 모든것이 멈추고

굳어 있었을 그몸에서

 

나의 눈에는 하염없이

붉은 선혈이

아버지의 가슴팍에서

샘물처럼 솟아 나와서

안반위의 하얀 천을 붉게 물 들이고 있었다

 

6.25때 죽은

한살 터울의 나의 여동생은

나의 언니가 업고 있었고

부모님과함께 우리집에 살고 있던 "옥희"언니가

나를 업고 있었는데

내가 그당시 울었던 기억은 전혀 없지만

나의 어머니와 친척들의 말에 의하면

내가 너무나 서럽게 울어서

모든사람들이 따라서 울면서 통곡했다고 한다

 

내가 성장하면서 그 소리를 들을때 마다

가슴이 미어지고 가이없는 아득한 슬픔에 목이 메이는 것이다

.

.

청년시절을 일본에서 보내시고

귀국하신후 늦은 결혼을 하셨고

집안의 맞아들로서 아들을 원하셨지만

아들을 낳으면 곧 잃게되는 불운속에서

아들도 아니면서

네번재 딸로 태어난 나를

동생을 제쳐두고 언니들을 제쳐두고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게

아버지께서는 나를 유난히 사랑하셔서

 

항상 안고 다니시고

업고 다니시고

언제나 아버지 진지상 앞에 앉혀 두셨다고

하여...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 고통스런 삶안에서

아버지께서 그때 쏱아 주셨던 사랑을 전해 듣고

그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가...

그 값을 헤아릴수 없을 만큼 내게는 귀중한 양식이 되었고

힘이 되었고

용기가 되었고 불굴의 의지가 되어서

온갖 고난과 슬픔을 참아 이길수 있었음에

감사하며

사랑하는 내 아버지가 지금도 얼마나 그리운지 모른다

 

아버지께서는 1898년 3월 28일 세상에 오시고

1949년 10월 13일 숙암 번천 도화곡에서 밤 12시

50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심으로

 

나는 아버지를 여윈 설움에 울고

내 아버지는 사랑하는 어린 딸을 두고 떠나시는 설움에

지쳐 우셨을 것이다

 

몇일후면 그 가을에 결혼을 해야 할

우리집에서 일해 오던 젊은 청년은

살아 보려고

그렇게 도망치다가

뒷담장으로 뻗어 내린 과일 나뭇가지에

거꾸로 매달린채 죽음을 맞았고

어둠속에서 애통한 아침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밤에

나의 아버지와 아버지를 보좌해 주시던 두분과

아까운 젊은 청년 이렇게

네사람의 생목숨이 희생된것이다

 

삼천리 금수강산

이 국토에 38선이 그어지기 전 인

1949년 10월 13일 아버지께서 돌아 가신 그날

그 이전 부터...

정신을 가르고 혼을 가르는

좌익우익의 안타까운 이데올로기의 극심한 갈등은

이미 한민족의 혼줄기를 두동강 내어 피로 물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죽이지 않으면 죽어야 하는 혼돈의 시대에

이념이 무엇이기에

비껴 갈 수 있는 수 많은 길을 두고서

아버지께서는 왜...

몸부림치며 앞장서서

당신의 소중한

값진 생명을 초개와 같이 버리며

자유를 지키려 하셨을까...

 

그 당시 양식있는 다수의 지식인들과 천민의 신분으로 오랫동안

핍박받고 살아 왔던 가난한 사람들이

환호하며 깊이 매몰되어 갔었던 마르크스..레닌..공산주의 이념은

모두가 평등한 삶을 향유하는 지상천국의 이상향이었고

그 달콤한 이념의 향기는 63년이 지난 지금

2012년 오늘에 이르러서도...

 

민족혼을 두동강내며 선혈이 낭자한 비극을 부르는...

한세기를 통하여 지구곳곳에서 시험되었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간...

페기처분된 이념을 붙잡고 국회에서 학교에서

어린 영혼을 쇠뇌 시키는 석화 시키는

붉은 깃발을 높이 들고 흔들어 대는 광신도들의

핏기없는 미소속에서

진저리가 쳐지는 슬픔과 전율을 느끼는 것이다

 

인민군을 몰고 와서 아버지의 목숨을 앗아간

남씨집안 사람들은 내 아버지의 소작인이었고

그들의 아들 사형제중 큰 아들은 월북했고

그들의 형제중 한명은 이북의 기밀 자금을 받아

프랑스 유학을 떠나는 그고장에서는 유일했던 일중의 하나로서

 

아버지를 죽인 그사람은 이북으로 갔다가

얼마후 고향으로 숨어 들어 왔다가

마을 사람들의 릴레이식 신고에 의해

군인 경찰 민간인 합동작전으로 체포하는 과정에서

산으로 도망치다가 수십발의 총에 맞아서 죽었고

 

그 시신을 떠메고 우리집으로 달려 오면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노라고 외침으로

어머니께서는 맨발로 달려 나와서...

" 네가 이렇게 가엾게 죽을것을 왜 몰랐느냐

왜 그렇게 남의 생목숨을 앗아갔느냐 "면서 통곡하셨었다

 

우리집 땅을 밟지 않고서는 그동네를 지나갈수 없을 만큼의

자산가 셨던 아버지셨지만

아무 대책없이 죽음을 맞으신 아버지를 떠나 보내신 어머니께서는

아들을 낳지 못한 죄 때문에 작은 아버지가

자신의 큰 아들을 내 아버지의 양자로 입적시켜서

내 아버지의 재산을 가로채어서 탕진하는 사이에

내 어머니와 남은 자녀들이 겪었던 삶의 곤궁함이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슬픔이기도 하였었다

 

오래도록 찾아 갈 수 없었던 내고향 그땅은

소녀시절 어느밤

봄이 오면 진달래가 온 산 가득

불 타는듯 붉게 물들이고

깊은 계곡 바위 틈에

고개 숙여 피어나는 할미꽃이

보석처럼

뭉클하게 가슴에 남아 있는 그곳이

물에 잠기는 꿈을 꾸었고...

 

나의 꿈처럼

그곳은 얼마후에

온 마을이 수몰되어 지상에서 사라졌고

다른 마을의 식수원의 공급처인

커다란 댐 되어버렸다

 

결혼하여 첫아이가 두살때 쯤

내가 제과점을 운영하고 있을때 였었다

산림청에 근무했던 공무원인듯한

청년 두사람이 가게안에서 차를 마시며

나누는 이야기를

카운터의 작은 골방에서 우연히 듣게 되었는데...

 

내고향 이야기와

아버지의 존함을 이야기하고

우리집안과 남씨집안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설처럼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며

그놀라움이 오래도록 나를 가슴 벅차게 하였었다

 

마땅히 그들과 이야기하고 인사하고 싶었던 마음은

가득했었지만

그자리에서 돌이 되어 움직일수 없었던 그때를

생각하면서

지금도 그들이 누구인지 몹시도 궁금하고 고맙게 생각되어 진다

 

그이후 언제인가

남편이랑 처음으로 찾아간 고향에서

목적했던 아버지의 산소를 찾지 못하고

하룻밤을 묵어야 했던 여관에서

말하기 좋아하는 남편이 여관 주인과

나누는 대화속에 아버지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깜짝 놀라신 여관 주인 아저씨가

" 장가 잘 드셨네요 애국지사의 따님이 시네요" 하시며

나를 칭해 주셨을때

이제 처음 알게된 사실에 놀라워 했었고

나로서는 잊을 수 없는 감격스러움이기도 했었다

 

그동안 어머니께서 또 언니들이 들려 주었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현실성없는 빛바랜 과장된 이야기 같아서 허무하게만

생각되었었는데

지역사회를 위해 많은 일을 하신 아버지에 대한 칭송은

높은 자긍심과 자랑스러움에 말할 수 없는 행복함을 느꼈었다

 

산사태와 같은 자연재해가 났을때

아버지께서 자비를 들여서 길를 내시고

축대를 쌓으시고 학교를 세우시고

공설운동장을 만들어 마을 사람들이

그시대에 접할수 없었던 신식 운동을

할 수 있도록 하셨다니까

 

그시대에 노블레스 오블리제( noblesse oblige) 를

실천하셨던 너무나 멋진 나의 아버지가 아니신가 하여

무한히 아버지가 자랑스럽고 존경해 마지 않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혼자사는 어려운 여성들을 도우셨다는

어머니의 말씀도 감격스럽고

 

아버지가 돌아 가셨을때

만장이라고 하는 애도의 깃발이

수백장이었고 애도의 인파가 십리길이었다는

전설같은 이야기마저 나를 더욱 애달프게 하고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무서운 분이신가 하면

거지가 오면

당신의 밥상을 직접 내어 주시는

정이 깊으신 분이셔서

언제나 어머니가 고달프지만

말없이 따라 갈수 밖에 없는

준엄한 분이 셨다고 한다

 

최근에 다시 찾아 나선

버려진듯 돌보는 이 없는 아버지의 산소를

고마운 사촌 동생이 선산에 고이 모셔 놓아서

감격의 상봉을 하였고

 

그감격의 고향방문길에

새롭게 알게 된 사실 하나는

해마다 봄이 되면

그곳의 군민들이

아버지와 함께 그당시 희생된 사람들의

명단을 모아서

충혼탑을 세우고

기념비를 세우고

 

학생들과 군경민 합동 위령제를 올리고 있다고 하니까

그고마움에 몸둘바를 모를 감격에 잠기고 있는것이다

 

우리집 뒤뜰 담장에 메달려 돌아가신 분의 조카님도 만났었다

그분의 어머니가 겪으신 슬픔과 애통함

그분의 약혼녀가 혼절하여 울었던 긴세월의 이야기는

이렇게 긴세월이 흘렀어도 퇴색하지 않고 생생하게

가슴을 아프게 하여 함께 울었던 기억에 지금도 눈물이 고인다

 

이북의 자금을 받아 프랑스 유학을 갔었던 그사람은 자손이 없이

최근에 죽었고 그의 부인이 물려 받은 재산은

우리고향 근방의 논과 밭을 온통 사들여서 그땅을 밟지 않고서는

동네 사람이 지나 갈수 없다하며 나의 아버지 처럼

양자를 들여서 재산을 관리하고 있다고

 

사촌동생이 소개 해준 군청에 근무하시는 공무원이

친절하게 전해 주셔서 그이름까지 들었었고

 

지난일이라 체념하고 싶었지만

처지가 뒤바뀐 묘한 반감에 가슴답답해 졌었다

 

그러나...

 

수몰되어 저 강물속에 잠겨 버린 내고향 마을과

아버지와 함께 했던 ...

행복했고 사랑이 넘쳤던 아버지와의 그시간은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내영혼의 큰 자산이고 양식인것이다

.

.

그래서 나는 내 아버지의 의로움과

인간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간직하신 고귀한 내 아버지의 정신을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바꾸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살겠고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그 순간까지

그렇게 내 아버지처럼

의롭게 아름답게 살고 싶은것이다

 

 

2012년 9월 9일 까꿍 

                        2024년 5월 21일  Lucy Ch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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