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속의 스페인 여행메모

2024. 5. 21. 08:55꿈속의까미노순례길

추억속의 까미노 길

2018-06-20 10:55:28


스페인 여행메모:

프랑스와 스페인의 45일간의 자유로운 여행이 남긴 발자국들을 그냥 지나쳐 버리게에는 아쉬워 그흔적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그토록 가고 싶어했던 스페인 여행을 언제나 다시 가보고 싶었던 프랑스 여행을 함께 할수있는 일정이 잡히고 바로 전날밤

무거운 배낭을 짊어진채로 천길아래 경이로운 세상이 내려다 보이는 낭떠러지 절벽위에 서있었다

아아.. 산들바람에도 나의 몸은 등짝에 짊어진 배낭의 무게 때문에 흔들거리고 한발자국도 옮겨 놓을수없는 절벽위에서

앞으로 갈수도 뒤로 갈수도 없는 상태로 서있는 꿈에서 화들짝 깨어났을때 고난의 길임을 확인하면서도 절대로 포기할수없는 산티아고행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동서양을 비롯하여 이제는 카토릭신자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스페인 까미노 데 산티아고 여행은 유네스코에서 인정해주는 스페인의 역사의 성지이기도 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가고싶어하는 스페인 까미노 데 산티아고 꼼포스텔라 걷기 30일간의 800km완주여행은 누구에게나 평생을 두고 한번 이루고 싶은 꿈이기도 하다

 

특히 여행이라하면 친구끼리 가족끼리 연인끼리 동반여행를 하거나 해외여행일 경우에는 여행경비와 외국어에대한 부담 때문에 페키지 여행을

선호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나역시 일본을 비롯하여 중국 태국과 백두산까지 페키지 여행을 하게 되었고 그 다음은 서유럽 동유럽을 다녀왔었고 2015년에 마지막으로 북유럽을 페키지로 다녀왔었다

 

사실 페키지여행은 편리하고 경비가 적게 든다는 장점은 있지만 자유롭지 못한 단테스케줄에 응한다는 것이 강한 반발심을 불러 일으켜서

독립된 자유여행을 꿈꾸게 되는것은 인지상정인것 같다

나는 제주 올레길의 저자가 쓴 책을 통하여, 또한 다른 루트를 통하여 스페인 산티아고길에 매혹되어 언제부터인가 그곳에 가고 싶다는 간절한 꿈을 꾸게된것이 오래되었다

그이후 북유럽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러시아등을 다녀온 이후로는 본격적으로 산티아고 가는 꿈에 꾸게 되어서

고령의 나이로 자살행위라는 담당 의사선생님의 말씀도 귀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강열한 의지가 생겼다

지금은 산악회에 나가지 않은지가 거의 8년이 되어가지만

지난날 산악회에서 주말마다 높은산을 7년이상을 탔었던 자신감을 바탕으로 그곳갈 용기가 생긴것이다

 

산티아고행을 위한 연구와 공부는 많은 서적들을 통하여 또는 인터넷에 등록된 카페에서 그지식을 습득할수가 있는것이다

하루 이틀에 이루어지는것도 아니지만 많은 서적을 탐독해야하고 여행에 필요한 준비물들은 하나도 소홀히 할수가 없는것들이라서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공부하기를 소홀히 해서는 안되는것이다

인터넷 창에서도 실시간으로 산티아고 현지에서 올라오는 소식들은 여행예비자들에게는 산지식을 습득하는 기회가 되는것이다

 

사람들의 모습이 모두가 다른것처럼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이 모두가 다르다는 것을 필연적으로 깨닫게 되는

여행지에서의 사람들과의 만남속에서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남들의 이기적 언행에 실망하기도하고 감동받기도 하면서 삶의 진리속을 깊숙하게 탐험하게 되는 너무나 유익한 시간여행이 되기도 할것이다

 

까미노 데 산티아고 꼼빠스텔라의 정식 명칭은 성서에서 비롯되는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의 복음전파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에서 출발하는

천년이 넘는 카톨릭 성직자들의 성지순례길에서 시작된것이다

스페인의 국기를 보면 그나라의 역사가 보인다 스페인은 태양의 나라이며 온땅이 뜨거운 태양아래 작물이 자랄수없는 황무지여서 스페인의 국기의 중간색은 황토색이고 위아래로 붉은색은 피로서 이나라를 지켰다는 의미라고 한다

 

우리들은 일제 36년을 말하며 언제나 흥분하게 되는데 스페인은 무려 800년동안을 아랍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그들 기독교인들이 아랍제국의 이슬람을 쫒아낸 레콩키스타로 불리는 십자군 세력의 위력으로 오늘의 스페인이 존재하며 피를 물들인 애국활동으로 국가를 재정복하였다는 자부심이 대단한 것이며 그땅에 심어진 스페인 사람들의 정신의 강인함을 놓쳐서는 안될것이다

 

스페인의 까미노 데 산티아고 여행에는 세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것 같다

첫번째로 이제는 세계적인 여행의목적지가 된 만큼 호기심에서 몇일동안 부부나 친구들이랑 단순 관광 목적으로 오는 사람들이 있고

두번째로는 친구들과 아니면 연인사이에 짝을 이루고 오는 사람들과 부부동반으로 모녀사이 모자사이에 오는이들도 있다

세번째로는 나와같은 홀로 걷기 선호족들일것이다

목적이 무엇이든지간에 혼자서 여행 온 사람들의 자신의 말을 들어보면 아주 다양한것이었다

장래문제에 대한 생각을 하기위해서 왔다는 젊은 청년도 있었고 집을 떠나서 있고 싶어서 이곳을 선택했다는 젊은 삼십대의 여성도 있었다

젊은시절에 이길에 도전하였다가 실패하여 재도정하고 있다는 아름다운 노년의 독일여성도 만났다

그중에서도 가장 감동적인 눈길을 끌게 되는 이들은 나처럼 의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왔을것같은

깊은 주름살이 얼굴에 가득한 노년의 말없는 순례자들일것이다

저들은 각자가 무엇때문에 땡볕아래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이웃을 향한 인사도 제대로 받지못할 만큼 힘든 고행을 하는가 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는것 만으로도 깊은 감동을 받게 되는것이다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단순한 관광목적으로 둘러보는 경우가 많지만

스페인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프랑스의 신심 깊은 카톨릭 신자들은 자신의 집앞에서 부터 시작되는 까미노 데 산티아고 길을 완주하는 이들도 있다고 들었다

이고행의 길을 기쁨으로 수행하는 자들의 간절한 기도의 형태를 온 몸으로 체험되게 하는곳이기도한것이다

나신이 믿는 신을 향한 간절한 구도의 마음을 표현하는것 중에서 티벳의 오체투지만큼 강열한 열망의 기도도 없을것이다

평생에 한번 그들이 믿는 신을 향하여 이마와 양무릎과 양팔꿉치가 땅바닥에 닿도록 기도하면서 티벳의 수도 라싸로 향하는 행열은 깊은 감동주게 되는것이다

저마다의 열망을 소망을 가슴에 품고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걷고자 하는 사람들의 마음의 자세에 따라서 그것은 하나의 작은 시골길의 풍경에 그칠수도 있지만 천둥소리보다 더 큰 울림의 감동의 시간을 간직하는 귀중한 평생의 한순간이 될수도 있는것이다

카톨릭 신자가 아닐지라도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은 한달이라는 긴 시간을 얻기가 힘이 들어서 시간이 날때마다 휴가철을 이용하여

800km를 끊어서 걷고 다음에 다시 이어서 걷기를 하여 까미노 데 산티아고길을 완주하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다

 

내가 오랫동안 남들처럼 까미노 데 산티아고의 길을 선호하고 걷기를 열망하였지만 그것은 나에게 이룰수없는 꿈인줄 알고지냈다

그래서 내가 이길을 떠나오게 된것은 나의 힘으로 온것이 아니라 내가 한때 열열히 사모했던 주님의 특별한 초대장을 받고 온것이라고

말하면서 나스스로가 언제부터인가 그것을 정말로 굳게 믿게 된것이다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자녀로 선택받은 자는 주의 곁을 떠나 있다고 하여도 그분의 인증은 이마에 그대로 새겨져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나의 본래의 여행 목적지는 산티아고에 한정되어 있는것이 아니었다

프랑스로 입국하여 프랑스에서 6일의 개인일정이 있었고 스페인과 프랑스국경지역인 생장(Saint Jean Piet Port)에서 까미노 데 산티아고 30일 일정을 시작하여 나머지 일주일 동안은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를 여행하고 프랑스로 돌아가서 한국으로 귀국하는 여행플랜이었다

그러나 그일정은 전혀 나의 뜻과는 다른 방향으로 정해진듯이 내가 실행을 못하도록 나의 기억을 마비시키고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서 통째로 진행이 되어갔다는것을 인정하지 않을수가 없게 되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30일의 여행일정을 이틀정도를 줄여서 산티아고 꼼빠스텔라에 입성하고

"묵시아" 라는 땅끝마을까지 가볼려는 야무진 꿈을 꾸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ㅎㅎㅎ

(나자신이 지금 생각을 해봐도 너무나 엄청난 무모한 나의 생각에 부끄러움이 가득가득 넘칩니다 지금도 죄송한 마음이 가득가득합니다)

 

숨가쁘게 돌아갔던 32일간의 산티아고길 걷기 일정표를 둘러 보면서 그속에 숨쉬는 언어들을 다시 한번 그리움속에 떠올려 보겠습니다

 

2018년 4월 25일 10시 인천공항 제2청사로 가기위해서 우리집 옆에 있는 잠실종합운동장에서 9호선을 탔고 김포공항에서 내려서 바로 건너편에있었던 인천공항행 지하철을 탈려고 하니까 지하철 타는곳이 변경되어서 지하실로 내려가서 타야한다고 했다고 하였다

그래서 당황스럽게 지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배낭을 메고 두리번 거리는데 아까 만났던 그 아저씨가 저쪽으로 가서 타야 한다고 알려줘서 아무 의심도 안하고 지하철을 타고 한참을 가다가 보니까 인천송도로 가는 지하철이었다

나는 그분이 현지인이어서 잘 아는줄 알고 의심없이 탔는데 반대편으로가는 차를 탔던것이다

그친절한 아저씨 덕분에 나는 프랑스행 비행기를 놓칠수도 있는 위기에 서게 되었고 어쩔줄 몰라하는 나에게 사람들은 지금 내려서 택시를 타야한다고 했다

어이없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내가 내린 그자리에서 얼마안되는 거리에 택시한대가 신호대기에 서있어서 35,500원의 요금을 지불하고 인천공항 제2청사에 겨우 제시간에 도착 할수있었다 휴 ~ 어쩌면 좋을까

나는 왜 남들처럼 아둥바둥 아착같이 확인하고 똑소리나게 모든일을 처리 못하는 것일까 ~ 하는 후회가 막심했지만

인천공항 제2청사를 들어섰을때 반짝반짝 빛나는 인천공항 제2청사의 최첨단 시설에 반해서 사진 찍느라고 온정신을 빼았겼다

멋지고 예쁜 공항청사 때문에 나의 실망감은 오래가지 못했지만 이여행에 대한 깊은 경고장이 아니었던가 싶기도 하다

 

서울인천 제2청사 26일 0시 55분에 출발한 비행기는 암스테르담을 거처서 프랑스 파리 드골 공항(Roissy라고도 부름) CDG 2F에 아침 6시 45분에 안착했다 철도와 지하철 버스 이용권 NAVIGO를 27.00 EUR 구입했다 그리고 시간이 넉넉한 관계로 공항에서 철도를 이용하여 일반 치하철역인 Opera Station에서 내려서 버스 68번을 찾는데 한참의 시간을 허비하였다 왜냐하면 로타리를 중심으로 여러갈래의길이 있기 때문에 일일이 다니면서 행선지를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려야 할 역은 프랑스어로 "JAURES" 인데 내가 아무리 프랑스인처럼 발음할려고 해도 그들은 못알아들었다 그리고 JAURES의 동네 이름이 한글로 "몽주르"로 나와 있지만 Monthouge 몽주르 라고 말하면 프랑스 사람 백명모두 못알아 듣는다 ㅋㅋ

나는 2018년 4월 26일 부터 5월 2일까지 Paris 시내의 정남쪽에 위치하는 몽주르의 Alexandre Myriam 집에 있으면서 프랑스의 가정과 내가 좋아하는 프랑스 파리 시내를 둘러 보는데 후회없는 시간을 갖기도 하였다

 

Paris에 입성한 첫날부터 오후시간을 이용하여 루브르 박물관을 다시 가보았고 27일은 멀리 기차를 타고 베르사이유 궁전을 다녀와서 집으로 귀가하는 중에 시간이 남아서 버스에서 내려서 어제갔었던 루브르 박물관앞에 다시 갔었다

루부르 박물관앞의 에집트 피라밋을 본뜬 유리피라밋이 어째서 오래된 건물들 사이에서 맛있는 핏자 조각에 녹아든 치스처럼 천연덕스럽게

고풍적인 빌딩들속에서 부드러운 화음처럼 잘 어우러져서 그귀한 빛을 발하는것일까 신기하가만 한것이다 그래서

길건너 버스 정류장에서 한없이 바라보기도 했다 그리고 루브르 박물관과 마주하고 있는 정면에는 카투젤 개선문이 서있는것 처음으로 자세히 둘러보았고 내친김에 박물관을 지나서 거대한 자연을 그대로 시민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하는 튈르리 공원의 풍요로움을 부러움속에 만끽하면서 걷다가 보면 역사깊은 콩고드 광장을 지나게 되고 세계의 모든 연인들의 사랑으로 물든 상제리제 거리를 지나 그유명한 에투알의 개선문과 마하게된다 너무나 먼길을 사진 한장도 찍을수 없이 파리지앵들과 나란히 걸었던 저녁 어스름에 개선문에서 지하철을 타고 다시 오페라 역으로 가서 68번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강행군의 하루가 마감되었다 이곳 프랑스에 도착하는 날 부터 이집의 wifi 연결이 되지 않았던 관계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이집의 호스트님께서 연세가 많으시고 아무리 봐도 엉뚱한 비번을 알려주어서 묻기를 포기하고 어디에서든지 스마트폰 가게를 발견하면 들어가 볼려고 눈을 부릎뜨고 다녔지만 허사였었다

 

28일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몽마르뜨르에 가서 2011년 3월에 이곳에 와서 그당시 사진을 찍으면서 지나가는 나에게 "아주머니!"하고 나를 불러 세웠던 새하얀 턱수염의 멋쟁이 화가님께서 아직도 건재하신가 하고 두리번 거리면서 걸어가는데 뒤에서 갑자기 "아주머니 !" 그러는 바람에 돌아보니까 문제의 그 화가님이셨던것 !

7년년전 그때도 놀랐었지만 요번에는 더욱 놀라서 돌아 보고 앞쪽으로 도망처서 사람들 속으로 숨어버렸다 ㅋㅋㅋ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했던가...나는 그동안의 나의 환상이 깨어진것에 조금은 환멸을 느낀것 같았다

만약에 내가 그분을 그가 있었던 자리에서 확인하고 내가 말을 걸었다면 차한잔이라도 나누며 기억에 남을 추억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꿈꾸는 것은 아름답지만 현실에서는 아닐수도 있다는 그 허상의 꿈을 확인하고 실망에서 깨어나오는 시간은 그리 길지는 않았다

그동안 그거리는 조금 변형되어있었다 사각형의 링처럼 삥 둘러서 화가들이 그림을 그리고 그사각의 링 한복판에도 화가들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그중간에 커다란 레스토랑이 생겨있었던것이다 그화가는 왜 나만 보면 아주머니 그럴까...내가 7년전에 왔었던 그아주머니라는것을 알고 있었을까 인연이란 내가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것이 증명되는 아이러니한 사건이기도 하다 ㅋㅋ

오늘도 어제와 다름없이 호스트마담의 인터넷의 비밀번호가 아이디랑 바뀌어있는것 같은데 아니라고 하니까 더이상 어쩔수가 없어서 인터넷없이 여행해야하는 난감함속에 몽마르뜨르의 사크레 쾨르 사원에도 올라가보았고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생피에르교회에 들러서 기도한 덕분인가 다소 먼거리에 있는 라데빵스까지 무리를 해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가게되었는데 세상에나 왠일인가요 ?

거대한 최첨단 신도시의 숲 한가운데에서 SAMSUNG의 로고가 선명하게 자리잡고 있는 거대한 빌딩이 있어서 뛸듯이 기뻤고

그곳의 매장을 찾아가서 내스마트폰의 인터넷을 바로 잡는 기적을 이루기도 했었다 우와 삼성이 너무너무 멋지고 자랑스러웠었다

29일 오늘은 지난번에 스마트폰 충전기가 바닥이나서 상제리제 거리의 풍경을 하나도 못찍어서 오늘 다시 가기로 했으나 하염없이 비가 내려서 루브르 박물관 근처에 있는 오르세 미술관으로 갔다 그리고 내가 전에 방문했던 노트르담 성당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상제리제 거리로 다시가서 샤를 드골 광장의 웅대하고 아름다운 개선문에도 올라가서 내가 가장 경이롭게 생각했던 개선문을 중심으로 파리 시내의 12개의 거리를 돌아보며서 경탄을 금치 못하는 부러움의 시간을 보냈다

누가 이러한 도시계획을 일괄적으로 만들었는가 놀랍기만 한것이다

나폴레옹의 전쟁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만든 루브르 박물관앞의 카루젤 개선문이 작아서 실망했기 때문에 다시 건립한 이문은 지금도 파리지앵들에게 애뚜알 개선문으로 불리고 있었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콩코드 광장을 지나고 거대한 시민의 숲을지나고 상제리제 거리를 걸었기 때문에 조금가다가 지하철을 타고 가야지 하면서 걷다가 고집스럽게도 그먼길을 다시한번 걷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아마도 프랑스 파리에 와서 루브르박물관 에서 에뚜알 개선문까지 두번씩 걸어본 사람을 나밖에 없을것이다 하면서 웃었다 다양한 사람들의 행복한 표정을 본다는것은 간접적인 행복감을 만끽하게 되는 값진 추억인것이다 오직 나에게만 그런것인지는 몰라도 ㅎㅎㅎ

 

30일 몽주르의 숙소에서 68번 버스를 타고 다시 지하철을 타고 몽파르나스역에 아침 7시 40분에 도착했지만 기차를 놓쳐서 다음기차를 타고 몽쉘미셀을 향하게 되었는데 좌석번호가 별로 였던것같다 나의 옆자리의 젊은 남자는 무엇인가 심각하게 컴퓨터작업에 열중하고 있었고

하필이면 마주앉은 두사람의 청춘남녀는 앞사람을 아랑곳 하지않고 열열한 사랑의 포옹을하는가 하면 쪽쪽소리가 나게 뽀뽀도 하고 마주 앉은 나는 눈둘곳을 몰라서 모처럼 준비해간 올드팝송을 들으면서 한시간 남짓한 거리를 가는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속철도라서 내리는곳이 그리 많은것이 아니라서 눈여겨 보았지만 내가 내릴 기차역은 보이지 않아서 시간상으로 벌써 지난것이 아닐까 하는 불길한 생각이 스쳐서 염치불구하고 앞사람들에게 물어 보았다

그랬더니 그젊은 남자가 깜짝 놀라면서 지나온지가 한참이라는 것이다 내가 국내에서 인터넷으로 예매하여 가지고 온 티켓의 봉투에 적혀있는 이름이 내가 내릴역의 이름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고 그것은 역의 이름이 아니라 철도회사의 이름으로 내가 내려서 버스를 갈아타야할 역의 이름과 스펠이 거의비슷했던것 때문에 큰 실수를 하게 된것이다 맙소사...

이일을 어찌할까 나보다는 앞에 앉은 두사람이 나를 더 걱정하면서 어쩔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내옆에서 너무나 심각하게 컴퓨터작업을 하던 남자가 내린곳이 내가 내려야할 곳이었던것이다

그런데 달리는 기차는 설줄을 모르고 마구마구 내달리고만 있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나를 보며 그남자가하는 말이 내가 몽쉘미쉘을 지나서 프랑스의 중부지방까지 오게 된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몽쉘미셀은 아무리 해도 오늘 가기는 힘들것이라고 하면서 역무원이 지나갈때 불러서 나의 입장을 설명해주고 기차표에 표식을 하여 나에게 불편한 일이 없도록 도와주었다 그리고 자기들은 다음 다음역에서 내리는데 나와 함께 내리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기차역을 내렸을때 그들의 부모님들이 마중나와 있었다 그리고 나의 이야기를 전하니까 안타까운 마음으로 위로의 말을 해주고 그들은 역전의 밖에서 기다리고 그젊은 남자는 역무실로 나를 데리고 들어가서 나의 사정 이야기를 해주어서 다시 표를 바꿔서 돌아가는 기차를 타도록 도와주었던것이다

그들은 신혼여행을 다녀오는 중이었고 그녀의 시어머니 그젊은남자의 어머니는 새며느리에게 무척이나 다정다감하게 안아주는 모습이 참 보기가 흐뭇하고 아름다웠다 그녀는 아시아계의 사람으로 보였는데 금발 머리의 프랑스인 시어머니의 편견없는 사랑이 기억에 오래 남을것이다

평소에는 남에게 물어보는것에 망서림이 없는 내가 어찌하여 벙어리되어서 올드팝송에 빠져있다가 그토록 가고싶어서 제일 먼저 몽쉘미셀을 신청해 놓고 그곳을 가지 못하고 돌아가야 한다니까 정말 돌아 버릴것 처럼 실망스러웠었다

사실은 그젊은 남자도 역무원도 하는말이 있었다 몽쉘미셀에 가는 기차는 하루에 두번뿐이라는것 그리고 중간에 내려서 버스로 갈아타고 한시간 이상 들어가야 하는데 늦은 시간에 그곳에 가면 돌아오는 차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가야한다면 1박 2일로 가야한다는것이다 내가 그렇게 한다고 하여도 스페인가는 시간의 열차를 탈수가 없기 때문에 절대로 갈수가 없는곳이 되어버리고 나는 나에게 고마운 친절을 베풀어준 그 젊은남자에게 나의 명함을 건네주고 기회가 되어 한국에 둘이오면 이틀밤은 공짜로 숙소를 제공하겠다고 하니까 어쩔줄 몰라하며 좋아했었다 그리고 반드시 연락하고 한국에 오겠다고 거듭말하며 아쉬운 작벽을 고하였었다

나는 그이후로 다시는 이어폰을 귀에 꼽고 음악을 듣지 않기로 마음을 단단하게 먹게 된것이다 지금 생각을 해봐도 너무나 억울한 몽쉘미셀여행의 평크가 아쉽고 분하다는 생각을 금치 못하는것이다

인천공항에가는길에서도 길을 잃었고 몽쉘미셀에서도 길을 잃은 나는 누구인가 그옛날에는 이러한 어머니는 그의 아들이 지게에 지고 깊은 산속에 가서 버리고 갔을 그러한 나이의 내가 아닌가 해서 민망하고 부끄러워서 지금도 죽을 맛인것이다

 

5월 1일 에펠탑에 갔었다 에펠탑의 주위를 산책하고 에펠탑안으로 올라가서 아무리 봐도 파리의 도시계획이 나를 사로잡는 경이로움으로 가득해서 많은 사진을 찍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지만 일주일 동안 유효한 NAVIGO라는 지하철 카드가 5일간 사용으로 끝장날줄은 몰랐다

그래서 지하철 표를 사야하는데 에펠탑 근처의 지하역에는 일회용을 동전으로 뽑는 기계가 없었다 또한 지하철 사무실도 없었고 신용카드만을 사용하는 기계가 있을 뿐이었는데 그기계를 사용해본적이 없는 내가 당황하여 몇번씩 거듭하는것을 보고 뒤에있던 중년의 남자가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고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할 순간에 _

내가 순간적으로 손으로 가리든가 몸으로 가리든가 해야할것을 알면서도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는 그사람앞에서 그러한 냉정한 행동이 나오지 못하는 나의 어리석음 때문에 불행을 자초했던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내가 시도했을때는 작동하지 않던 기계에서 일회용 지하철 표가 나와서 그것을 주어서 기쁜마음으로 돌아서는 나에게

카드를 꺼내라고 알려주었던 그점잖은 신사분에게 나는 다시 한번 고맙다는 인사를 하게 되었고

그순간 어디서 왔느냐는 대화가 시작되어 서로 악수를 나누는 인사를 하고 헤어져서 지하철을 타기위해서 한참을 걸어가다가 보니까

손에도 핸드백에도 어디에도 카드가보이지 않았다

맙소사 그곳으로 달려갔지만 흔적도 없이 사라진 그남자 이일을 어찌할가 하늘이 아득해졌었다

당장에 전화를 걸어야 하는데 인터넷도 밖으로 나와있는 상태에서는 불통인데 전화가 될리가 없었다

그래서 급한김에 에펠탑 근처의 기념품가게에 상주하고 있는 안전요원을 찾아가서

지하철 카드를 뽑다가 내카드를 도둑 맞았다고 경찰에 신고해 달라고 소리소리 질렀다 ㅋㅋㅋ 아이고

그순간에 생각을 해봐도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양심의 가책으로 더욱 공포스러운 불안감에 떨면서도

내돈이 이순간에 어디선가 마구 뻐져나간다는 생각에 공포속에서 계속해서 소리를 질르니까

그여자 안전 요원 두사람이 나를 달래면서 캄다운! 캄다운! 하면서 경찰을 불러주겠다고 몇번씩 말해주었고

그러나 경찰이 오는데는 30분이상의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지만 어쩔도리가 없었다

경찰이 와서 내가 상황설명을 했지만 네명의 경찰관들이 차안에서 내리지도 않을뿐만 아니라 내가 한국으로 전화를 걸어야 하는데 도움을 달라고 해도 고개를 도리도리 하면서 그것은 할수가 없는일이고 자기들이 할일이 아니라면서 행운을 빈다고하면서 조금후에 유유히 사라져버는것었다 그들이 묻는 것은 나를 도왔던 사람이 혼자인가 둘인가 셋인가 너의 카드를 빼앗아갔는가 등이었지만

그남자와함께 있었던 남자가 있었다는것 이외의 말은 경찰에게 믿음을 줄수가 없었던것이다

도둑을 맞았다면 확실한 증언이 필요한것이고 그렇치 않다는것을 직감한 경찰은 어쩔줄 몰라하는 나를 두고 가버린것이다

전화가되지 않는 나의 입장 같은것은 그들이 해결해야할 의무가 없다는것이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그런일이 발생했다면 그주위에 있는 사람도 도와 줄려고 했을것이란 생각을 하면서

이것은 시간을 다투는 일이라서 잠시도 시간을 지체할수가 없었기에 다시 안전요원에게 달려가서 내가 말했다

" 내가 돈을 줄테니까 니가 한국에 전화를 걸어달라" 그래서

그녀가 우리딸에게 전화를 걸어주면서 하는말이 "3분에 5.00 EUR" 달라는것이었다

우리딸에게 전화해서 나의 은행으로 조회를 보내고 또 은행에서 본인 확인을 위해서 내가 다시 전화를 걸게 되었는데

오늘 이시간까지 내가 사용한 해외이용 금액은 60.00 EUR 라는것이었다

나는 그말이 믿어지지 않아서 몇번씩이고 확인하고 다짐을 받았는데

확실하게 60.00 EUR를 오늘 사용한것 밖에 없다는것이다

나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땅바닥에 주저 앉아서 울고 싶었다

내가 프랑스에 입국하던 그날 말고는 미술관에 갈때밖에 카드를 쓰지 않았고 그날도 전혀 카드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60.00 EUR만 내통장에서 빠져나갔다는것은 기적에 가까운 행운이라고 할수있는것이다

사실은 내가 두개의 통장을 가지고 나왔는데 분실한 통장에는 많은 돈이 들어있었고 다른통장에는 돈이 별로 없었던것이다

하필이면 돈이 많이 든 통장을 분실했음으로

그남자가 나쁜 마음을 먹었다면 0 을 두개씩이라도 더처서 돈을 뽑아갈수가 있었던것이다

그런데 그남자는 왜 60.00유로만을 뽑아갔을까.... 나의 부주의한 습관에 대한 세금으로 회수해간것일까 ...

참 어이가 없었기도 하지만 너무나 다행한 일이어서 우리딸에게는 돈이 한푼도 빠져나가지 않았다고 말해서 안심하도록 했다

나는 안전요원에게 나의 지갑에서 5.00 EUR의 지페 하나를 건네주었는데 그안전요원이 눈이 동그래 지면서 왜 이것만 주느냐고

항의를 하는것이다

그래서 내가 나의 지갑을 열어 보이면서 돈이 한푼도 없다고 말했다

사실은 지갑안의 하얀 종이에 싸여있는 것이 돈이었는데 ~

순간적으로 돈만으로 계산되는 냉혹한 그들의 생리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에 나도 그리했던것이다

다행히도 그녀들은 나를 빙 둘러싸고 있었는데 태연하게 말하는 나에게 금새 미소를 지으면서 그래 ? 하면서

다시 친밀한 미소를 짓습니다 ㅎㅎㅎ

만약에 나의 지갑의 돈이 보였다면 내가 10.00 EUR 이상의 돈을 주지 않고는 못견디었을것이다

생각하면 참으로 아찔한 사건이었는데 불행중에도 행운이 겹쳐서 천만 다행이었다

나의 등뒤에서 나의 비밀번호를 기억했고 내가 인사하면서 악수하고 경황없이 떨어트리고 간 카드를 주어서

나의 돈 60.00 EUR만을 뽑아간 그사람은 분명한 도둑이기는 하지만 더큰돈을 훔쳐가지 않았던 그사람의 마음은

나의 기억속에서 오래도록 고마운 은인으로 남을것같다 나에게 이 더 다행인 일은 없을것이니까 말이다

 

국내에서 사간 유심칩도 제대로 작동하지않는 내가 묵는 숙소는

그집의 아들이 개설해준 Airbnb 호스트로서 그녀는 혼자 살고 있었고 나보다 나이가 두살이 위였다

그녀는 평소에 음악을 무척 좋아하는듯 TV쇼에서 방송되는 음악을 즐겨 불렀는데 수준급이었다

그녀가 시도하는 비번 찾기는 그녀의 이웃에 사는 초등학생 외손주가 집을 방문했을때 겨우 찾을수 있었다 ㅋㅋㅋ

똑똑하고 참 귀여운 아이였는데 아주 많이 해본 솜씨였다

내가 사랑하고 그토록 다시오고 싶었던 파리에서의 모든것이 좋았었는데

마지막날의 이아찔한 해프닝이 상처로 남을것 같아서 한동안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 생각을 해보아도 믿기지 않는 나의 행운이기도 한 것었다

 

5월 2일 이른 아침 7시 40분 생장(Saint.Jean de Piet Port)으로 출발하는 TGV를 무사히 타게 되었다

땡볕이 쏱아지는 거리에서 생장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면서 나는 왠지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하기만 하였다

다른 사람들의 가방의 무게가 너무나 가볍고 단출해 보여서 상대적으로 무게에 짓눌린 나는 무엇인가 잘못된것을 깨닫게된것이지만 이제는 어쩔도리가 없게 된것이다 왜 그토록 스페인의 마드리드와 바로셀로나에서 지낼 물품들까지 포기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챙겨온것인가..ㅠㅠ

한참을 기다린끝에 생장으로 데려다줄 버스가 왔다

그버스를 타고 생장이라는곳에 내렸을때는 "크레덴시알"이라는 일종의 까미노길을 걷게 되는 친구들의

신분증명서를 발급해주는 사무실을 찾는것은 별로 어렵지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고향에 온듯이 친근감있게 반겨주었다 그런데 나는 왜 소외감마저 드는 것일까

그무거운짐 때문에 쇠뭉치에 짓눌리는 마음이 아프고 미련한 고집으로 똘똘 뭉친 내가 밉고 슬퍼졌던것이다 !!!

나에게 "크레덴시알"을 발급해주신분은 다섯분 중에서 유일한 남자분이셨는데 몹시도 차분하고 성실한 분이셧다

그곳에서 내가 묵을 숙소를 정해주셨는데 10.00 EUR의 55호 알베르게(숙소)였다

내가 묵어야 할 방은 하필이면 지하실같은 계단을 두번씩이나 내려가는곳이라서 걱정스럽기도 했는데

창밖으로 보이는 먼산의 경치가 너무나 마음에 들어서 짐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와서 사진을 찍을려고 하니까

스마트폰의 화면이 새까맣게 변해있었다 ~~~

내가 2015년 북유럽가는날 아침에 스마트폰이 전혀 작동하지 않아서

인천공항에서 스마트폰을 사야하는 어이없는 소동을 겪은일을 기억해내고 기절하는줄 알았다

만약에 오늘 이곳에서 그런일이 또 벌어진다면 나는 이 여행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는것이다

너무나 다급해진 마음에 어쩔도리가 없어서 아까 크레덴시알을 발급해준 그분을 찾아가서

내가 스마트폰이 정지 상태가 되어서 당장에 스마트폰을 사야할지도 모르니까 매장이 있는곳을 알려달라고 하니까

여기서는 전혀 불가능하다는것이다

다만 이곳에서 멀지 않은 시내에 스마트폰을 취급하는곳이 있으니까 그곳을 가보라면서 메모지에 주소를 적어주셨다

이낮선곳에서 주소에 적힌 곳을 찾는것도 쉬운일은 아니라서 시내를 몇바퀴 돌아서 찾아간 곳은

그동네의 유일한 스마트폰을 고칠수있는 엔지니어의 사무실이었고 그동네 사람들도 잘 모르고 있는듯하였다

스마트폰을 파는 매장은 없는곳에서 일하고 있는 이사람은 그리 장사꾼의 약삭빠름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처음부터 스마트폰을 살수있냐고는 묻지 않았고 이스마트폰이 작동을 하지 않는데 좀 봐주실수있냐고 했었다

그랬더니 그사람은 내가 했던것처럼 아답터로 내스마트폰에 밧테리 충전을 시도하고 다시 시도하기를 거듭하는 어느 순간에

기적처럼 잠시동안 작동을 하기 시작했던것이다

그분은 나에게 30분후에 이것이 사용할수 있는가를 봐주겠다면서 갔다가 다시오라고 했었다

나는 그분의 매장을 떠나서 이곳 저곳을 다니다가 근처의 수퍼에 들어가서 내가 먹을 과일과 내일 산에서 먹을 예비음식을 사면서

그분에게 드릴 과일도 한봉지 넉넉하게 샀다

내가 그곳에 다시갔을때는 내가 처음에 매장에 갔을때 있었던 여성이 그분과 아직도 얘기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그남자분은 나의 스마트폰이 아무 이상없이 쓸수 있다는 판결을 내리면서 기분이 좋은듯 내어주는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과일 봉지를 그에게 전해주니까 깜짝 놀란듯이 정말 자기를 줄려고 사온것이냐 물으면서 기뻐했던 기억이 새롭다

세상에는 꽁짜가 없음으로 이정도의 기부 앤 테이크는 있어야 즐겁고 고맙지 않겠는가

나를 지옥의 가마솥으로 기어들게 만들수도 있었던 스마트폰이 해결되었지만

아무도 넘기를 즐겨하지 않고 피해가려는 이피레내산맥을

15KG이 넘는 가방을 메고 가야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무거웠지만 어쩌는수가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보니까

오늘은 문을 열지 않았다고 하던 "동키서비스 가게"가 문이 열려 있었다 그안에는 사람들이 짐을 맡길려고 웅성거리고 있었다...

크레덴시알 사무실에서 배정해준 숙소에 들어가서 그곳의 호스텔리아에게 처음부 물었었다

나의 짐을 동키서비스로 부치고 싶다고 ...그런데 그여자 호스텔리어의 말씀이 자기집에서는 동키서비스를 하지 않으며

다른곳에서 그서비스를 담당하는데 오늘은 그가게의 문이 닫혀있고 출근을 하지 않았다는것이다

그리고 전화를 걸어서 확인을 할려고 해도 연락이 되지 않으니까 기다려 봐야 한다는것이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실망과 좌절감으로 반은 체념상태가 되어서 그러한 호텔리어에게 계속적으로 무엇을 요구할수도 없는 입장에서

사진이라도 찍을려다가 화면이 중지된 상태의 스마트폰을 발견하게 되고 내속은 새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던것이다

어째서 나에게 이러한 일이 겹쳐서 일어나는 것일까...

나는 그토록 오랜세월 꿈꾸어 오던 생장에 도착하자말자 아득한 낭떠러지에 매달린 가엾은 영혼이 되어버린것이다

스마트폰을 고쳐서 돌아오는길에

동키서비스 한다는 그집앞을 들어가지 않고 그냥 지나오면서 나는 생각했다 ....

내가 나의 짐을 남에게 맡겨서 만약에 잃어버리는 경우에는 모든것을 포기해야할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필요해서 찾을때는 없었던 그가게에 나의 짐을 맡기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 버린것이다

서울에서 출발하기전부터 피레내산맥에서만큼은 짐을 맡길려고 했던 나의 계획을

한순간에 온전하게 포기하게 되는 마음의 변화가 나를 강열하게 지배하기 시작했던것이다

어떤일이 닥친다 할지라도 내가 지고 가야한다고 다집하고 있었던것이다...

피레내 산맥안에는 단한곳 오리손이라는 알베르게가 있는데 15명정도만을 예약을 받아서 숙소를 운영한다는것을 나는 알고 있었지만

프랑스에서 입국하는 이들은 오리손에서 하루를 묵기위해서는 여행의 일정을 하루 더 늘여야 그집에 묵을수가있는것이다

피레내 산맥이 위험한 코스이기 때문에 하루에 갈길을 이틀을 가면 그만큼 쉽고 위험부담을 덜게 되는것이다

다만 오리손에서 묵기위해서는 반드시 미리 예약하는것은 필수인것이다

나는 프랑스에서 입국했기 때문에 오리손에서 쉴수있는 자격도 박탈 당한것이고

나의 짐을 받아줄 "통키서비스"도 처음부처 나를 거부하는 바람에

내몸을 지탱하기도 힘든 상태에서 15kg의 등짐을 지고 피레내 산맥을 넘어야 하는 무서운 과제를 손에 받아든것이다

밤은 깊어가고 죽음이 내앞에 가로 놓여 있었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피해갈 길을 알지 못했던것이고 정해진 길임으로 가야한다는 생각으로 그밤을 맞이하고 있었던것이다

아아 ...까미노 데 산티아고 꼼뽀스텔라

그길이 어떠한 길이더라도 나는 이미 피해갈수없는 시간안에 서있었던것이다 !!!

천길 낭떠러지가 발아래 아득한데 내몸은 바람결에도 흔들거리고... 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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