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 Spector

2024. 10. 8. 09:41팝아티스트

 
 
마이다스의손, 필 스펙터 브릴 빌딩의 작곡가들과 함께 이 시기(60년대 초반)의 음악을 이끌었던 가장 탁월한 인물로 필 스펙터 Phil Spector를 빼놓을 수 없다. 뉴욕 브롱크스 출신 신의 유태인이었던 그는 볼품 없는 외모에 단신이었지만 그 영향력에 있어서만 큼은 아무도 넘보지 못할 거인이었다. 그는 10대를 장악할 새로운 음악적 / 경 제적 구조의 필요성을 가장 먼저 감지했고 일찌감치 이를 실천에 옮겼다. 그는 작곡부터 손을 댔다. 58년 테디 베어스 Teddy Bears에게 준 To Know Him Is To Love Him이 히트하면서 그의 천재성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1년 뒤인 1 9살 때에는 아틀랜틱과 계약을 맺고 프로듀서로 나섰다. 레이 피터슨 Ray Pete- rson, 벤 E 킹 Ben E King 등 수많은 가수들이 그의 손을 거쳐 스타덤에 올랐다. 이어 그는 LA에 필리스라는 독자 레이블을 설립하고 사업가로서도 수완을 발휘 하기 시작했다. 그는 앞으로 음악이 강렬해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다른 사람 들이 멜로디를 강조할 때 그는 리듬과 비트를 중시했고 여러 차례의 반복 녹음 을 통해 폭발적인 힘을 지닌 사운드를 만들어 냈다. 현악기와 두터운 코러스, 각종 소리들이 한데 어우러진 그의 사운드는 마치 소리로 벽을 쌓은 것 같았다. '월 오브 사운드 Wall Of Sound'라는 말은 그래서 생겨났다. 그가 프로듀스한 곡들은 10대들이 사춘기 이후 겪게 되는 감정이 주 테마로 브릴 빌딩의 곡들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소리는 브릴 빌딩 사운드는 물론이고 이제까지의 어떤 음악과도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자극적이었다. 스펙 터는 작곡가들이 만든 노래를 어떻게 다듬어야 하는가에 있어서는 독보적이었다. 그는 곡의 클라이막스를 강조하지 않았고 전체적으로 완만한 흐름이 되게 했다. 그런데도 그의 곡들은 강렬하기 이를 데 없었다. 리듬 악기를 가장 많이 쓰고 볼륨을 극대화해 로큰롤의 거친 면이 매끈하기만 한 도시적 감수성에 눌리지 않 도록 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스펙터의 곡 만지는 솜씨에 압도당했다. 그는 필 리스를 설립한 지 불과 3년 만에 'Be My Baby(63)', 'Da doo Ron Ron(63)', You' ve Lost That Lovin' Feeling(64)' 등으로 2천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24세 때는 이미 쇼 비즈니스계에서 가장 많은 돈을 벌어 들인 백만장자가 되어 있었다. 스펙터는 음악 산업과 프로듀스에 지워지지 않을 족적을 남겼다. 그는 음악 산업에 있어 최로로 독립의 개념을 확립했다. 메이저사의 지배 일변도였던 팝 시장의 질서에 정면으로 도전해 제작에서 홍보, 배급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완 벽하게 총괄했다. 그에게 적당히란 없었다. 레드 버드라는 레이블을 세운 브릴 빌딩의 리버 - 스톨러가 서류 더미에 쌓여 쩔쩔맬 때 그는 능수능란한 솜씨로 스튜디오와 프로덕션을 늘려 나갔고 TV 다큐멘터리 회사도 경영했다. 그의 성공 은 많은 독립제작자들에게 길을 터주었다. 또한 그는 자의식을 가진 최초의 최 초의 프로듀서였다. 그는 단지 곡을 녹음하는 기술자가 아니라 또 하나의 창작 자로서 프로듀서의 역할을 처음으로 보여 주었다. 그는 의식적으로 두껍고 강한 사운드를 만들었고 성공을 위한 두 가지 요소, 반항과 낭만을 어떻게 결합할 것 인가를 감각이 아닌 아이디어로 승부했다.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음악을 받아 들여 독창적인 사운드를 이끌어 냈고 풍부함과 복합성으로 대중 음악의 범위를 넓혔다. 그는 대중 음악에도 예술적 형식미가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입증한 인 물이기도 했다. 그러나 스펙터의 영광은 한 순간에 기울었다. 비틀즈가 등장하자 스펙터의 사 운드는 더 이상 참신하지도 센세이셔널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뛰어 넘지 못했다. 마치 지난 몇 년간 자신의 재능을 모두 써버려 음악적으로 고갈된 것 같았다. 그는 66년 아이크 & 티나 Ike & Tina의 'River Deep Mountain High' 가 처음으로 큰 실패를 안겨 주었을 때에야 그 사실을 인정했다. 스펙터는 은퇴 를 선언해 버렸다. 무료함을 이기지 못한 그는 30개월 만에 다시 음악에 복귀했 다. 그러나 그는 이미 사이키델릭 사운드와 히피 정서에 심한 거부감을 가진 기 성세대였다. 그는 이후로도 음반제작은 계속했지만 더 이상 '스펙터 사운드'는 만들 수 없었다. 그의 역할은 전지전능한 총괄자에서 프로듀서로 축소되었고 비 틀즈의 Let It Be(70) 제작에도 불구하고 이전과 같은 명성은 다시 얻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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