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의 업적

2024. 5. 20. 12:53꿈속의까미노순례길

2018-12-04 00:54:10


다산 정약용의 업적| 사진 자료

쭈쭈빵빵 | 조회 1251 |추천 0 | 2014.01.06. 15:26
정약용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같혀 죽었을 때에 태어난 조선의 실학자이다.
정약용은 아버지 정재원에서 학문을 배우고 성균관(지금의 대학)에 들어가6년후 과거에서 장원을 한 뒤 정조와의 만남을 가지게됨.
중요한 내용은 화성을 건축한 것인대, 원래는 공사기간을 10년으로 잡았지만 정약용은 녹로, 유형거, 등의 수레와 잘 아는 거중기를 발명하여 2년8개월로 줄인 것도 정약용의 업적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과학적인 설계를 거친 화성은 유네스코로 지정되었다.
정약용은 그 후 암행어사로 활동하면서 여러 탐관오리들을 잡아내었다. 그러나 정순왕후가 권력을 잡을때 천주교 신자도로 귀양을 갔지만 학문을 갈고 닦으면서 목민심서, 흠흠신서,삼미자집등의 책을 지은 조선의 대학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783년 회시에 합격, 경의진사)가 되어 어전에서 《중용》을 강의
어릴 때부터 시재에 뛰어나 사실적이며 애국적인 많은 작품을 남겼고, 한국의 역사·지리 등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여 주체적 사관을 제시했으며, 합리주의적 과학정신은 서학을 통해 서양의 과학지식을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1910년(융희 4) 규장각제학에 추증되었고, 1959년 정다산기념사업회에 의해 마현 묘전에 비가 건립되었다. 저서에 《정다산전서》가 있고, 그 속에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마과회통》 《모시강의》 《매씨서평》 《상서고훈》 《상서지원록》 《상례사전》 《사례가식》 《악서고존》 《주역심전》 《역학제언》 《춘추고징》 《논어고금주》 《맹자요의》 등이 실려 있다




관리로서의 업적


일단 대표적으로 수원화성을 쌓을때 거중기를 발명하여 성을 훌륭히 지어낸 것...



학자로서의 업적


18년간 전라도 강진에서의 유배생활에서 위에서 나오는 책 목민심서... 등 500여권을 지었고 이것이 후세에 전해져 큰 학문적업적을 이루었다는 것.


2.본받을점
다산 정약용 선생은 남인계열의 중농주의 실학자로 뛰어난 학문과 인품으로 정조의 각별한 총애와 신임을 받았고 수원화성을 쌓을 때, 인원과 비용을 절감한 거중기를 고안하였고 정조가 모후인 혜경궁 홍씨와 함께 수원화성으로 행차를 할 때! 쓰인 배다리를 설계하기도 하였고 지방에서는 훌륭한 목민관으로 활동하였고 암행어사의 신분으로는 어려운 백성들의 삶을 살피고 부패한 탐관오리를 적발하기도 하였습니다.
노론계열에서 진보적이고 상공업 진흥을 중요시하고 청과의 교역을 통해서 청의 발달된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북학파라고 불리는 박제가 등의 중상주의 실학자들과 활발한 교류를 하였고 정조가 승하 한 후에는 노론세력들이 세력을 잡고 안동김씨 등의 외척세력들이 권력을 잡고 세도정치를 행할 때는 유배지에서 목민심서와 경세유표 등의 책을 저술하였고 아버지로써 자녀 교육에도 신경을 썻습니다.


조선후기에 중농주의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 선생은 기예론을 통해서 기술을 발전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고 해서 청의 기술을 수용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고 유배지에서의 저술활동을 통해서 실학을 집대성 하였고 토지제도로는 여전제를 주장하였습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에 대한 평가는 나라의 관리로써 훌륭했고 학자로써 뛰어난 학문을 가져고 자녀의 훌륭한 아버지 였다고 생각 합니다.


업적
정약용은 실학의 대가로서 당시 실학을 정리하고 집대성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우리나라 실학의 대표주자로 떠오르게 된다. 정약용이 한 업적은 정말 많다. 조선시대 최고의 학자라고 불리는 것도 다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을 보면 모두 공통점이 있다. 다 실학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정약용은 전통적으로 중농학파였다. 즉 농사를 중시하는 학자였는데, 이러한 그는 북학파라고 불리는 중상학파 또한 포용하였다. 결과적으로 당시 실학을 모두 아우름으로서 그 가치를 더욱 빛나게 한다. 그리고 서학 연구 및 한국사에도 관심을 가지고 과학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대표적인 업적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실학사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중기의 발명과 수원성의 건립을 든다. 이러한 것은 당시 실용적인 학문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밖에도 목민심서 같은 훌륭한 책을 펴내어서 목민관, 즉 지방수령 등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옳은 지에 대해서도 잘 기술해 놓았다.


젊을 때 정조의 각별한 총애를 받아 중앙 요직을 두루거치고
전도 양양한 젊은 관료였지만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하자
전라도로 귀양을 가게 됩니다. 그의 아내가 천주교신자였다는
죄목이고.관료생활을 할 때 정조가 화성(=수원성)을 짓습니다. 아시는대로 정조는 장헌세자(=사도세자)의 아들로 왕이 되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할아버지 영조에게 죽음을 당한 아버지에 대한
효심이 지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장헌세자의 묘가 현륭원인데
수원에 있었지요. 정조는 자주 아버지의 묘를 참배했다.
수원성 축조에는 약 88만 냥의 국고 예산이 소요되어
요즘가치로 약 500억원 정도의 돈이 들었는데 이는 순수 경비만이고
무상으로 조달한 인건비, 자재비 등은 포함되지 않은 수치이다.
정약용은 도르레 원리를 이용한 거중기를 발명하여
바로 수원성 축조에 투입합니다. 그 덕분에 약 4만 냥의
경비를 절감할 수 있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정약용의 업적은 그러나 그가 귀양살이를 하던 중에
수많은 저서를 집필하면서 학자로서의 성취를 이룹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무척 빈한하고 불행한 귀양생활을 했지만.
그의 저서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경세유표, 흠흠신서, 목민심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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